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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이비 아리아테의 마수 (79/129)


79화. 이비 아리아테의 마수
2023.03.02.


카셀은 묘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른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고 가면까지 써서 저 여자가 어떤 목소리와 표정으로 흥얼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저 여자를 보니 일전에 이비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성녀 발탁식 때 후작님은 그 자리에 없을 거니까요.

―어제 일로 열 받은 건 알겠는데 그게 이렇게 목숨 걸고 덤빌 일이야?

―목숨 걸고 덤빌 일이 맞아요. 난 항상 그랬으니까요.

‘설마…….’

카셀의 안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머릿속에서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팽하게 맞섰다.

갈등하던 카셀은 시종의 입을 빌려 투기장 주인에게 물었다.


“저 투기장에서 싸우는 자들의 신원은 확실한가?”

“신원이요?”

투기장 주인이 처음 듣는 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능구렁이처럼 대답했다.


“여기선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운과 실력으로 싸울 뿐이죠.”

“그래서 모른다는 건가?”

“실은, 예, 신원을 일일이 파악하진 않습니다만……. 귀빈들께서 머무시는 성엔 아무도 얼씬 못 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죠.”

투기장 주인이 질문의 저의를 오해하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 말은 카셀의 귀에 더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카셀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까 철창에 갇힌 꼬마를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뭔가 이상하고 싫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럼 여기 오는 자들은 주로 어떤 자들인가?”

“그야, 야망을 품은 자들이지요.”

카셀이 시종의 입을 빌려 다시 묻자 투기장 주인이 능청스레 답했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가면 쓴 사내만 남았던 경기장에 열댓 명의 새로운 용병들이 우르르 입장했다.

투기장 주인은 그걸 지켜보며 느긋이 말을 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순합니다. 도전자에겐 시련을, 승리자에겐 전부를. 이기기만 하면 누구나 영웅이 되지요.”

용병들은 미리 논의라도 한 것처럼 가면의 남자를 에워쌌다. 관객들이 흥분해서 소리쳤고, 투기장 주인은 그 열기가 흡족해 웃었다.


“바깥세상은 귀천이 정해져 있지만 여기서는 오직 능력으로 대우받습니다. 기회가 필요한 자들에게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투기장 주인은 한껏 자랑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객석의 소음이 너무 커서 목소리가 다 파묻혔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이곳엔 야망을 품은 자들이 가득하다.

용병들은 경기에 나가기만 해도 돈을 받고 승리하면 더 큰 돈을 받는다. 그러니 살아남기만 하면 누구나 막대한 포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빈번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엔 승리를 갈구하는 자들이 넘쳐났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함성에 파묻힌 채 카셀과 투기장 주인은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대치가 이어진다 싶더니 가면의 남자가 땅을 박찼다.

그가 건드리기 무섭게 용병들은 쓰러졌고, 또 한 경기가 끝났다.

가면의 압승에 경기장의 분위기는 한층 들끓었다. 돈을 잃었다며 난리를 치던 자들도 어느새 이 압도적인 장면에 열광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도 카셀의 시선은 가면의 남자가 아니라 경기장 외곽에 선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투기장 주인, 브릭 남작은 경기장 관리자에게 슬쩍 눈짓했다.

도전자에겐 시련을, 승리자에겐 전부를.

폐허의 투기장은 이 강렬한 두 마디로 혈기 왕성한 용병들을 끌어들였다.

그래서 저런 강자의 등장은 참 곤란했다. 그건 낚시꾼이 미끼만 빼먹고 달아나는 물고기를 싫어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브릭 남작은 부하에게 손을 쓸 것을 명령했고, 연전연승의 가면 남자는 그 모습을 은밀히 관찰했다.


‘이제야 움직이나.’

그 남자, 디에스는 쓰러진 용병들 사이에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힘드네.’

집사로 살아온 지 어언 2년. 그동안 장바구니 들기와 지붕 고치기보다 격한 일을 해 본 적 없는 디에스는 이 가혹한 노동에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경기장 끝에 선 이비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만 끝내자.

폐허의 주인인 브릭 남작이 나왔다. 그건 이 불청객의 활약이 윗선까지 전해졌다는 뜻. 이로써 오늘의 목표는 달성했다.

카셀의 예상대로 이비는 달구경에 초대받을 수 없었다. 초대는커녕,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주변을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셀의 염려대로 이비는 다른 방법을 악착같이 찾아냈다. 관객으로 초대받을 수 없다면, 구경거리가 되어 그 안까지 들어가기로 했다.

이 압도적인 승리는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렇게 브릭 남작을 직접 행차하게 했으니 오늘은 이쯤 끝내도 될 텐데, 이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아직. 스무 번 채우고.

이비의 과격한 포부에 디에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 처량함이 전해졌는지 이비가 재차 수신호를 보냈다.


―최상위 경기장, 입장 조건, 스무 번 승리.

그러니 오늘 스무 번 마저 채우자.

이비의 타당한 주장에 디에스는 소심하게 항변했다.


―힘들어.

―힘내.

그러나 이비는 역시 가차 없었고, 그사이 새로운 용병들이 또 슬금슬금 나타났다. 경기 속행에 디에스는 하는 수 없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들의 손짓을 훔쳐본 자들은 여자가 남자를 가혹하게 부려먹는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그 내막은 상당히 달랐다.

호흡을 다스린 디에스가 가장 가까이 다가온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용병들이 대응하듯 칼을 치켜들었지만, 디에스가 옆을 스치자 그들은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맥없이 쓰러졌다.

연이은 제압에 사람들이 더 열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속고 있었다.

디에스는 용병들을 가볍게 건드렸을 뿐,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사실 사냥개는 암약과 급습이 특기지 이런 결투와는 연이 멀다. 그럼에도 그가 경기장에서 이토록 오래 버티는 건 애당초 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비는 괜찮나?’

디에스는 저절로 기울어지는 용병들을 밀어 넘어트리며 이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디에스 외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연승의 기적을 일으키는 건 사실 가면의 남자가 아니라 뒤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여자였다.

이 사기극의 시초는 약 2년 전이었다.


―있잖아, 사람은 피를 얼마나 흘려야 죽어?

어느 날 이비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살짝 기절하는 건? 피를 어느 정도 흘리면 돼?

이비는 순진한 얼굴로 흉악한 것을 물었고, 디에스는 이 위험한 녀석에게 정답을 알려 주기 전에 왜 그런 걸 묻는지부터 물었다.

그에 대한 이비의 대답은 창의적으로 살벌했다.


―그야, 사람도 반쯤 물이니까?

역시 디에스만 아는 사실이지만, 이비는 정화라는 온건한 가호를 받은 주제에 그걸로 사람을 해칠 궁리를 하는 배은망덕한 놈이고, 남몰래 급성 빈혈을 일으키는 법을 기어이 알아낸 암살계의 선구자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비가 그 무시무시한 사고방식에 비해 겁이 많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이비가 다른 사람의 피를 남몰래 맑게 해 준 일은 손꼽히게 적었다. 수국정원에서 뻗어 버린 카셀 몬트라는 그 희귀한 사례 중 하나였다.

디에스는 빈혈로 쓰러진 용병들이 실려 나가고 다시 새로운 희생양들이 들어오는 걸 안타깝게 지켜봤다.

이 신흥강자를 꺾으려고 더 우람한 자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의 땀과 노력도 성녀 후보의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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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를 등에 업은 디에스는 기어이 스무 번의 승리를 더 달성하고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이 이 놀라운 기록에 환호하는 소리는 이비와 디에스가 방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방엔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놀라운 경기였습니다. 위대한 영웅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정중히 인사한 여자는 척 보기에도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비는 그가 브릭 남작의 사람인 걸 눈치챘지만 일부러 신경질을 냈다.


“당신 뭐야, 뭔데 여기 함부로 들어와? 죽고 싶어?”

“저는 이 성의 주인이신 브릭 남작님의 비서입니다. 투사님께 제안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안?”

“브릭 남작님께선 무를 숭상하시기에 용맹한 투사들이 그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길 바라시죠.”

“됐으니까 본론만 말해.”

이비의 날 선 태도에도 여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용병들의 대거리가 익숙한 모양이었다.

여자가 차분하게 본론을 이었다.


“저희와 계약하시면 요구하시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무리해서 싸우지 않고 더 유리한 위치에서 투사님의 명성을 높일 수 있게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머무실 동안 사례비로 바옌의 병사들이 받는 봉급의 열 배를 드리겠습니다.”

여자의 제안은 후했다. 그래서 이비는 브릭 남작이 꽤 화가 난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브릭 남작은 어디서 굴러들어온 가면 놈 때문에 기분이 저조했다.

도전자에겐 시련을, 승리자에겐 전부를.

이 문장처럼 투기장에선 싸움판에 들어온 자들에겐 소정의 보수를, 승자에겐 거금의 포상을 약속했다.

이걸 미끼로 용병이나 가진 게 몸뿐인 애송이들, 빚더미에 깔린 자들을 유인하지만 정작 약속한 돈이 제대로 지급되는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일단 많이들 죽는다. 그럼 연고 없는 자들에겐 돈을 줄 필요가 없고, 유족이 찾아와 남겨진 보수를 요구하면 오히려 사자의 장례비를 청구해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꼭 죽지 않아도 많이들 다친다. 그리고 투기장 주변의 의사들은 모두 브릭 남작의 하수인이다.

그들은 치료가 급한 자들에게 막대한 치료비를 청구하고, 그 돈의 일부는 남작에게 돌아온다. 그럼 치료받느라 빚을 진 자들도 하는 수 없이 투기장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도박꾼들에게 일부 떼어 받는 돈까지 더해 브릭 남작은 모든 경기마다 아무 손해 없이 큰돈을 번다.

도전자에겐 시련을, 승리자에겐 전부를.

다만 도전자는 영원히 도전할 뿐 절대 승리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건 타인의 몸을 팔아 주머니를 채우는 브릭 남작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불온한 가면이 남작의 이 완벽한 주머니에 구멍을 냈다.

말도 안 되는 연승으로 막대한 상금을 챙긴 걸로 모자라 상대를 죽이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고 살려 둔 것이다.

덕분에 이들에게 상금과 보수를 고스란히 지급하게 생긴 남작은 서둘러 손을 썼다.

그게 바로 이 파격적인 제안이었고, 그 뻔한 속내에 이비는 밝게 대답했다.


“싫은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디에스의 팔에 손을 얹고 얄밉게 조잘댔다.


“병사 봉급 열 배? 지금 장난해?”

“열 배가 적다고 생각하시면 열다섯 배는 어떠신지.”

“백 배.”

이비는 대책 없이 몸값을 올리고 당황한 여자를 약 올렸다.


“왜, 싫어? 우린 내일부터 큰 경기장에서 싸울 거야. 거기서 오늘처럼 이기면 백 배가 뭐야, 천 배도 거뜬할걸?”

“거긴 노련한 투사들이 모인 곳입니다. 오늘처럼 승리하긴 어려울 겁니다.”

“싫으면 관둬, 나도 사례비보단 포상금이 좋아. 이참에 네 주인을 거지로 만들어 주지, 뭐.”

이비의 경박한 도발에 여자는 곤란한 듯 웃었다.


“알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자는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여자에게서 이비의 말을 전해 들은 브릭 남작은 격분했고, 그 겁 없는 것들을 철저히 박살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작 박살 난 건 브릭 남작의 마음과 재산이었다.

다음 날, 가면을 쓴 이인조는 상급 경기장에서 또다시 연전연승하며 남작을 미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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