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카셀 몬트라의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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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카셀 몬트라의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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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카셀 몬트라의 무지
2023.02.23.
“맞죠? 저 사람.”
하얀 가면 위로 연주황빛 생머리를 늘어트린 여자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속삭였다.
“티엔다에서 온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여자와 같은 가면을 쓴 적발의 남자가 나직이 답했다. 그래서 가면의 여자, 이비는 낮게 탄식했다.
‘저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왔지?’
아까 그 거창한 마차에서 내린 건 분명 카셀 몬트라였다.
비록 가면을 썼지만, 신분을 숨길 작정인지 옷차림도 평소보다 수수했지만 이비는 그 남자를 금방 알아보았다.
키와 체격, 머리 색, 걸음걸이, 뒤따르는 시종, 그리고 엄청 귀한 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듯한 호위의 규모까지.
조심성이 많고도 적은 그 남자는 모로 보나 카셀 몬트라였다.
‘내가 소금 얘길 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이비는 일전에 카셀을 떠보려고 소금을 어디다 팔았는지 물어봤었다.
그 말을 듣고 소금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다면, 그가 여기까지 도달한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왜 직접 왔지?’
이비가 아는 카셀은 밑 대륙을 시궁창처럼 불결하게 생각하는 인간이다. 게다가 곧 그믐인데 그 온실 속 대귀족이 직접 움직이는 건 영 이상하다.
이비가 카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데 디에스가 속삭였다.
“정말 그 사람이면 여기까지 괜히 오진 않았겠죠.”
“물론요. 가발 쓰기를 잘했네요.”
이비는 카셀이 성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낯선 곳에서 카셀과 마주치는 바람에 꽤 놀랐지만, 심지어 그자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빤히 쳐다봐서 굉장히 당황했지만, 이비는 그가 자신을 못 알아봤다고 확신했다.
허술하게 가면만 쓴 그와 달리 지금 이비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또각대는 구두 소리와 함께 이비의 벨벳 드레스가 탐스럽게 찰랑댔다. 이비가 입은 검은 드레스는 목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단순한 모양이었는데, 덕분에 그 위에 늘어트린 호박색 머리카락과 가짜 진주 목걸이가 더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은 성녀 후보이던 평소와 달리 화려하고 매혹적이면서 어딘지 저렴했다.
여기에 가면까지 쓴 탓에 어지간히 눈썰미 좋은 사람도 지금의 이비를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다.
옆에 선 디에스도 이비와 맞춘 듯 전신이 검었다. 정장 차림이지만 머리를 뒤로 넘기고 가면을 쓴 탓에 그 모습도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검은 옷과 흰 가면을 나란히 쓴 두 사람에게선 위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투기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혼잡스러운 거리엔 그보다 훨씬 더 험악한 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호위를 저렇게 잔뜩 끌고 오다니, 멍청이.”
“겁이 났겠죠. 이런 곳은 처음일 테니까.”
디에스의 말에 이비는 실없이 웃었다.
확실히 이 투기장은 티엔다의 화초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밤의 일족을 숨긴 브릭 가문은 남부의 폐허 깊숙한 곳, 운 좋게 반만 허물어진 성을 보수해 투기장으로 쓰고 있었다.
그 허허벌판에 투기장이 세워진 건 불과 1년 남짓, 하지만 성 주변은 이미 어지간한 번화가보다 복잡했다. 주워 먹을 게 있는 걸 알고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폐허를 치우고 대충 만든 대로변엔 싸구려 여관과 식당부터 대장간이나 약방이 즐비했다. 고리대금업자와 노예상도 대놓고 눈에 띄었다.
그런 상인들 사이를 다니는 사람은 절반이 용병이고, 남은 절반은 투기장에 삶을 저당 잡힌 도박꾼들이었다. 그래서 골목마다 시비 붙는 소리가 요란했다.
투기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리는 복잡하고 시끄러웠으며 매일 피를 보는 탓에 은은히 미쳐 있었다.
이비는 그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을 지나 성으로 들어갔다. 다만 이비와 디에스가 향한 건 카셀이 들어간 정문이 아니라 뒷문이었다.
그곳에서 가면 쓴 하녀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하인들도 가면을 쓰는구나.’
이 투기장엔 얼굴과 신분을 감추고 싶은 사람도 많이들 찾아온다.
그래서 가면 쓴 사람이 도처에 널렸지만, 하인에게도 가면을 씌우는 건 조금 의외였다.
디에스가 가면 쓴 하녀에게 구겨진 편지를 건넸다.
하녀는 그걸 훑어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섰다. 그러곤 따라오라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입장한 성의 내부는 제법 깨끗했다.
‘버려진 성을 이용하다니, 머리 잘 썼네.’
이비는 투기장이 된 거대한 성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성이라면 귀한 손님을 모실 방도 많고 연병장이나 승마장 따위를 꾸며 투기 경기에 쓰기도 좋고 만일을 위한 지하 감옥도 있다.
그래서 이비는 브릭 가 놈들의 수완이 제법이라고 저도 모르게 인정했다.
성안으로 들어왔지만 시끌벅적한 소음은 여전했다.
하녀를 따라 성을 오르다 보니, 복도의 창문으로 연병장이 내려다보였다.
원래는 기사들의 공간인 그곳엔 기사 대신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기를 든 몇 사람이 서로 견제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와아아!
어느 순간 성이 떠나갈 듯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비는 반사적으로 창밖을 돌아봤지만, 디에스가 눈을 가려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보지 마.”
디에스의 속삭임에 이비는 상황을 눈치채고 앞서가는 하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슬슬 실감이 났다. 여기가 돈 때문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곳인 게.
하지만 디에스의 과보호가 무색하게 이비는 이 분위기가 별로 낯설지 않았다.
만약 점성술사를 만나거나 탑주의 눈에 들지 않았다면, 이비도 이런 곳에 팔려 올 처지였다.
***
투기장의 분위기에 금세 적응한 이비와 달리, 카셀은 가시지 않는 혐오감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이 미친 것들…….’
카셀은 하얗게 질려 자신이 본 광경을 떠올렸다.
성에 도착한 그는 얼떨결에 경기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귀한 손님을 극진히 모시려는 투기장 나름의 대접이었다.
카셀은 영 마뜩잖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밑 대륙의 삶을 경험해 보자는 기특한 마음을 먹었다. 몬트라는 어쨌든 티엔다비스의 재상 가문이니까.
그래서 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그 공간을 찬찬히 구경했다.
꾀죄죄한 밑 대륙 인간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은 역하고도 신선했다. 예절을 모르는 자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가축의 몰골을 한 주제에 나름 사람이라고 오락거리를 찾는 게 가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이 뭐에 열광하는지 이해하려고 경기장을 잠시 지켜보았다.
거기선 헐벗은 용병들이 칼을 들고 머뭇대고 있었다.
‘어설프게 뭐 하는 거야.’
카셀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데,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하나가 움직이자 경기장에 있던 용병 대여섯이 일시에 뒤엉켰다. 그들은 서로 가차 없이 찔렀고 매캐한 흙먼지 위로 오월의 장미 같은 피가 번졌다.
그 선명한 색채에 카셀은 헛숨을 삼켰다.
저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데, 용병 하나가 이미 쓰러진 자를 내리쳤다.
군중이 함성을 내질렀고 카셀은 정신이 멍해졌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비스의 투기장에선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 걸, 그걸 보려고 돈을 내는 야만인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그럼에도 카셀은 당황했다. 설마 그게 저렇게 쉽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그 생경한 충격은, 매일 먹는 닭요리가 어떻게 도축되는지 알게 된 아이의 경악과 비슷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귀한 분을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그 와중에 보기 좋게 살찐 남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카셀을 영접했다. 이름 따윈 기억도 안 나는 이 투기장의 주인이었다.
그 뒤로 화려한 식탁이 귀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카셀은 입맛이 조금도 돌지 않았다.
“경기는 어떠셨는지요, 먼 길 와 주셨는데 저희 볼거리가 초라하진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투기장 주인의 아첨에도 카셀은 기분이 저조했다. 그래서 그의 시종이 나서서 대꾸했다.
마지못해 식탁에 앉고도 카셀은 대화에 끼거나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이 불결한 곳에 내려온 처지가 끔찍해 이 상황의 원흉을 속으로 연거푸 원망했다.
그가 이 시궁창에 들어온 건 이비 아리아테와 미엘 세드로 때문이었다.
이비가 같잖은 선전포고를 했지만, 카셀은 이비를 그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몬트라의 장부를 확인하고 이비의 저택을 불태우는 걸로 그만 신경을 끄려고 했다.
그런데 작은 세드로가 무작정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는 이비 아리아테의 속셈을 다시 진지하게 헤아렸다.
그때만 해도 카셀은 이런 걸 마주할 줄 몰랐다.
‘난 잘못 없어.’
소금을 어디에 팔았냐는 이비의 질문에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켕겼다. 그가 탑의 소금으로 장난을 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카셀 몬트라가 후작이 되기 전까지 정화의 소금은 비스의 각 지역으로 고르게 분배되었다. 이유는 물론 그믐의 저주나 밤의 일족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금의 분배량이 정해져 있으면 파는 쪽은 재미를 보기가 어려웠다.
소금이 안 팔려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불가능하니, 비스의 영주들이 힘들다고 칭얼대면 결국 소금값을 깎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셀은 이 자유롭지 못한 거래가 싫었고, 그래서 선대의 방식에 슬쩍 변화를 줬다.
소금을 지역별로 분배하는 규칙은 그대로 두되, 인구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영토의 면적에 따른 분배로 기준을 바꾼 것이다.
반발은 없었다. 사실 인구가 많은 북부와 서부의 항의가 있긴 했지만, 남부와 동부가 적극적으로 찬성해서 잘 무마되었다.
그로써 영토의 절반이 폐허인 남부와 아마네세르의 서슬로 척박한 동부에선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소금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카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경매 제도를 도입해 부유한 영주들이 소금을 더 비싸게, 그리고 경쟁적으로 사 가게 부추겼다.
그로써 소금값을 크게 올리고 탑에 막대한 수익을 돌려주면서 본인은 경매 수수료까지 제법 챙겼다.
하지만 카셀은 이게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사업 수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사람만 많고 가난한 북부에서 볼멘소리를 좀 했지만, 여태 배려받았으니 이제는 다른 지역과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게 옳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말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비 때문에 소금의 경로를 추적하다가 남부의 폐허까지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밤의 일족을 이용한 투기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내 책임 아니야, 난 이딴 거 몰랐다고!’
카셀은 밑 대륙의 천박한 영주들이 용의 저주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비가 바옌 공작과 독대했다는 소식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기집애가 바옌을 등에 업고 이걸 문제 삼으면 가문의 늙은이들까지 덩달아 날뛸 게 뻔했다.
결국 밑 대륙까지 마지못해 내려온 카셀은 상상보다 더 최악인 투기장의 꼴에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이비 아리아테, 그 발칙한 것을 더더욱 원망했다.
겨우 환멸을 삼킨 카셀이 자신의 시종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시종은 그 말을 투기장의 주인에게 그대로 전했다.
“밤의 일족을 미리 볼 수 있나?”
“아, 원래는 안 되는 일인데…… 원하신다면 특별히 데려오겠습니다.”
주인은 곤란한 척하더니 비굴하게 웃으며 하인들을 불렀다. 애써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그는 카셀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눈치였다.
한참 후, 사람 하나가 들어갈 크기의 철장 두 개가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카셀은 난생처음 마주한 밤의 일족의 모습에 더욱더 질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