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숨기는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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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숨기는 거 있어?
2023.01.30.
로히카 세드로에겐 열 마리의 사냥개가 있다.
주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 개들은 철저히 암약하기에 티엔다의 귀족들조차 그 실체를 모른다.
대신 그들을 아는 극소수는 감히 장담한다.
탑주의 사냥개 세 마리가 있으면 성도 정복할 수 있노라고. 짖지 않고 어둠을 걷는 개들의 표적이 되면 열 겹의 성문도 백 명의 호위도 아무 소용 없노라고.
그들은 실체 없는 악몽이자 고요히 찾아드는 사신이었고, 탑의 가장 짙은 그림자였다.
그리고 전직 사냥개인 디에스는, 이비가 내민 찻잔 조각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요. 새로 사 줄게요.”
이비가 조심히 달래도 소용없었다.
“이 찻잔도 행복했을 거예요. 후회 없이 사랑했으니 그만 보내 주기로 해요.”
슬쩍 농담을 던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디에스는 이 처참한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일주일 전, 이비는 등꽃제에 참여하기 위해 티엔다로 올라가며 집사를 비스에 남겨 두었다. 뱀이 숨어 있다는 비스 동남부의 투기장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로써 운명공동체인 두 사람은 잠시 헤어졌다가 꼭 일주일 만에 비스의 작은 마을에서 다시 만났다.
이제 이비의 소유인 이층집, 그 아늑한 응접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성격 급한 이비가 먼저 위에서 있던 일을 간략히 전했다.
성녀는 이비에게 저주를 건 범인이 아니었던 것, 몬트라 후작의 변덕으로 예기치 못한 충돌이 생긴 것, 따로 바옌 공작을 만난 것, 그리고 이비의 저택이 불타 버린 것도.
이때까지만 해도 디에스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로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데 이비가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금파리를 내민 순간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하얗게 질려 헛숨을 삼키더니, 곧 세상에서 가장 침울한 사람이 되어 깨진 찻잔 조각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집사에게 위로도 농담도 통하지 않자, 이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넌지시 덧붙였다.
“이참에 다른 관심사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언니들이 잘 놀아 줄 거예요.”
언니들이라는 말에 디에스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눈으로 이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 좀 친해질 때도 됐잖아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단정 짓지 마세요.”
디에스의 부정은 단호했고, 그래서 이비는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사실 디에스는 이비의 언니들, 그러니까 저택의 하녀들을 무서워했다. 집사가 하녀를 무서워하다니,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이비는 디에스의 심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2년 전, 이비의 저택은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왜냐하면 서로 잘 모르는 이들이 하루아침에 우르르 함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히카는 성녀가 되겠다는 이비에게 세드로 소유의 저택을 내주며 수십 명의 목소리 노예들도 함께 보냈다. 보살핌도 받고 감시도 당하라는 의미였다.
이때 이비는 내심 걱정했다. 본인이야 저 하녀들과 같은 처지고 디에스와도 친하니 아무 문제 없지만, 이비를 제외한 양쪽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탑주의 사냥개였던 디에스와 지하에 갇혀 있던 노예들의 간극은 컸다. 그래서 이비는 저들이 집사와 하녀라는 신분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한집에서 살게 되자 그들의 관계는 순식간에 정립되었다.
―개다.
―전직 사냥개.
―유기견!
하녀들이 집사를 못살게 구는 형태로 말이다.
―집사님, 어제 라나가 장 보는 거 도와줬다면서요. 지금 편애하시는 거예요?
―집사님, 집사님을 생각하며 만든 거예요. 좀 많지만 남기지 말고 다 드셔야 해요?
―집사님, 이 옷을 입어 주세요. 단합을 위해 집사님도 우리랑 같은 옷을……. 도망간다, 잡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족쇄를 풀고 같이 두니 노예들은 생각보다 강성하고 사냥개는 의외로 허접했다.
그래서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집사에게 조심조심 접근하던 하녀들은 그가 만만한 걸 알아채자마자 매일 우르르 몰려가 그를 끝도 없이 데리고 놀았다.
먹이를 주고 옷을 입히고 사사건건 질투하면서 집사가 삐질삐질 식은땀 흘리는 모습을 악랄하게 즐겼다.
한편 디에스는 난생처음 받는 과도한 관심과 주목에 몹시 곤란해졌다. 그는 은밀하게 행동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더욱이 그때는 말주변도 없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하녀들을 부담스러워하며 침착하게 도망 다니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하녀들은 더 적극적으로 집사를 잡으러 다녔다.
그리고 이비는 그들을 먼발치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 역시 쪽수가 최고구나.
이비는 매일매일 놀림당하고 쩔쩔매던 시절의 디에스를 아련히 떠올렸다.
그땐 정말 과묵하고 음침한 멍멍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집안일도 바깥일도 척척 해내는 유능한 집사가 되었다. 언니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 긴장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이비는 격세지감을 느끼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하던 말을 맺었다.
“어쨌든 이 사달의 범인은 후작이에요. 그러니까 복수도 후작한테 하면 돼요.”
이비의 앙큼한 부추김에 디에스는 찻잔 조각을 만지작대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군요.”
“화 안 내요?”
“굳이 화낼 이유가.”
“앗, 실연 직후라 화낼 여유가 없구나. 이해해요. 시간이 필요하겠죠.”
“……누차 말하지만 저는 찻잔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농담도 계속하면 진짜 같으니까 좀 자제해 주세요.”
이비의 연이은 놀림에 디에스는 재차 한숨을 흘렸다.
그가 제 손으로 하나둘 모은 찻잔을 소중히 여긴 건 사실이지만, 이비나 하녀들이 모함하는 것처럼 그 무기체를 연인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사냥개라는 음침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제법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장품을 파손시킨 후작을 몰래 죽이기로 결심하는 대신 제가 간직하려고 했던 것들이 불길에 휩쓸린 걸 조용히 아쉬워할 뿐이었다.
이렇듯 지극히 정상인인 디에스는 이비가 가져다준 찻잔 조각을 잘 챙겼다. 그러곤 이비가 전해 준 이야기를 복기하며 담담히 평했다.
“후작의 일도 문제지만, 저주를 건 범인을 못 찾은 것도 크군요.”
“음, 그렇죠. 성녀가 범인일 줄 알았는데.”
이비도 태연히 대꾸했다. 하지만 마음은 내심 찔리고 있었다.
이비는 디에스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저주를 건 범인이 어쩌면 다른 시간대의 사람일 수 있다는 걸. 왜냐하면 이 말을 하려면 라우렐 백작과 점성술사가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복잡한 이야기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일은 디에스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떠드는 이비지만 왠지 이 말은 선뜻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비가 시치미를 떼는 사이 디에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백작의 주장을 의심 없이 믿어도 될지도 의문이고요. 그 자존심에 거짓말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이비 님이 성녀가 되는 걸 반대하니까요.”
“그렇긴 하죠.”
이비는 딴생각 중인 걸 감추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집사는 이 모습에 오히려 낌새를 채고 말았다.
디에스는 웬일로 고분고분한 이비를 잠시 쳐다봤다.
며칠 전의 이비라면 본인이 더 발끈해서 ‘그렇죠, 수상하죠, 그 인간 말만 믿고 넘어갈 순 없어요!’라며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백작과 함께 축제에 다녀온 이비는 왠지 백작을 향해 더 으르렁대지 않았다. 이전 같으면 돌아오자마자 백작의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을 성토해야 정상인데 말이다.
“백작이 티엔다에서 협조적이었나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요. 왜요?”
“백작을 제법 신뢰하는 것 같아서요.”
디에스의 의문에 이비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손사래 쳤다.
그렇게 얼버무릴 작정이었지만, 지난 2년간 이비를 바로 옆에서 지켜온 디에스는 역시 속지 않았다. 속기는커녕 묘한 직감에 되물었다.
“혹시 저한테 숨기는 게 있습니까?”
“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생겨서 꼭꼭 숨기고 있어요. ……이 저주는 정말 익숙해지질 않네요.”
집사의 물음에 본심을 속절없이 실토해 버린 후, 이비는 이제 화도 안 난다는 듯 흐린 눈으로 푸념했다. 그러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디에스에게 서둘러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좀 복잡한 이야기라 아직 정리가 안 돼서 그래요. 어느 정도 정리되면 얘기해 줄게요.”
“정리?”
하지만 이 변명도 집사에겐 통하지 않았다.
정리라니,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정리해서 말했어?
디에스는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며 아무 말이나 종알거리던 평소의 이비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정리.
디에스는 이비의 심상치 않은 태도를 관찰하며 잠자코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백작하고 무슨 일 있었어?”
“많은 일이 있었어. 같이 술 먹고 안아 줄 때 자는 척하고 침대도 몇 시간 빌렸어.”
집사의 물음에 이비는 자신의 치태를 명랑하게 나열했다. 그러곤 쳇 하고 혀를 찼다.
이때만 해도 이비는 조금 창피할 뿐 당당했다. 표현이 영 이상하긴 하지만 틀린 소린 아니며 잘못한 것도 없다. 그러니 아무렴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안일한 이비와 달리 디에스는 이비의 말을 듣고 표정이 변했다.
순종적이던 집사는 어느새 눈을 가늘게 뜨고 이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왜?”
디에스의 분위기가 변하자 이비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가 발끈해서 따졌다.
과묵하고 음침한 멍멍이 시절에도, 유능한 집사가 된 지금도 디에스는 항상 침착했다.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 저렇게 무서워질 때가 있었다. 그건 이비가 변명의 여지 없이 혼나야 할 때였다.
하지만 이비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혼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겁먹지 않은 척 디에스를 당당하게 마주 봤다.
팔짱을 낀 디에스는 그런 이비를 한동안 주시했다. 그러더니 평소보다 더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숨긴 게 그거야?”
“아니, 숨기는 건 따로 있어. 잠깐만, 정리되면 얘기한다니까?”
“뭔데 정리가 필요해. 그것도 백작하고 관련된 거야?”
“맞아. 그 사람 일이야. 아, 그만 물어봐!”
“너 대체 무슨…….”
“에잇!”
이비의 저항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디에스는 추궁을 계속했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이비는 디에스가 앉은 일인용 소파를 집사째로 냅다 뒤엎어 버렸다.
와당탕! 너무 얼토당토않은 기습이라 천하의 사냥개도 속수무책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윽, 너…….”
디에스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몸을 일으키다가 어느새 후다닥 자리를 뜨는 이비를 보고 소리쳤다.
“어디 가?”
“아무 데도 안 가! 그냥 도망치는 거야!”
이비는 그렇게 대답한 후 자신의 적나라한 발언에 진저리를 냈다. 그러곤 본인이 넘어트린 집사를 방치한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디에스는 바닥에 앉아 도망치는 이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처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필사적으로 강한 척하는 이비가 저토록 티 나게 허둥대는 건.
디에스는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비가 한 말을 곱씹었다.
위에서 백작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 불쾌한 확신에 그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