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순진했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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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순진했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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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순진했던 적이 없다
2023.01.26.
“자네 때문에 백 명이 넘는 바옌의 원로들과 그 열 배수의 가신들이 날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니 자네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할 거다.”
이렇게 말하는 티엔다비스의 유일한 공작, 이엘 바옌을 보며 이비는 생각했다.
세간의 평판 이상으로 괴팍한 할머니라고.
바옌 공작의 말처럼 이비가 접견을 청하기는 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거절당하거나 한참 기다릴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작은 이비가 서신을 보낸 당일에 이비를 바옌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저거다.
‘듣던 대로 대단한 심술…….’
억지스러운 책임 전가에 이비가 가만히 웃자, 공작은 한술 더 떠 스툴에 발을 얹었다. 그러곤 눈까지 감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본격적으로 오침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그럼 어디 해 봐라.”
그렇게 잘 준비 만만인 채 말하는 바옌 공작의 의도는 하나였다.
지루한 얘기를 하면 잘 거다. 하지만 날 부른 건 너니까 내가 잠들면 회의장의 원성은 모두 네 몫이다.
이 명백한 꼬장에 이비는 몰래 한숨을 삼켰다. 그러곤 느긋이 다리를 뻗은 바옌 공작을 잠시 바라보았다.
짧은 백발을 뒤로 넘긴 공작은 오늘도 제복에 가까운 정복 차림이었다. 각과 날이 서 있는 정복 아래의 몸은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척 곧았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만 가리면 마른 몸의 청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 정정한 노인은 지난 2년간 이비를 차기 성녀로 지지해 왔다. 그렇다고 이비에게 특별한 호감이나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가 지독한 실리주의자일 뿐이었다.
바옌 공작은 이비의 등장과 동시에 이비를 차기 성녀로 낙점했다. 성녀가 하는 일은 물을 정화하는 것이니 평민이고 나발이고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애가 당연히 성녀여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공작의 이 대쪽 같은 성격은 지하의 자매들이 모은 평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백전노장. 무섭거나 존경스럽거나.
―나쁜 건 아닌데 착하지도 않음. 비위 맞추기 어려운 괴짜.
―좋아하는 건 없음. 오늘 좋아했다고 내일도 좋아하는 게 아님.
―싫어하는 것은 비열한 것, 무능한 것, 답답하게 꿈지럭대는 젊은것들.
―바옌 공작 가 사람들이 뒤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제발 좀 은퇴해 주세요, 대모님!’
이렇듯 상대하기 어려운 성격이라 이비도 그동안 바옌 공작에겐 굳이 접근하지 않았다. 애당초 공작은 알랑대며 접근하는 녀석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눴을 뿐, 이렇게 먼저 청하고 독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초장부터 아주 대단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역시 대귀족은 다 이상해…….’
공작이 대놓고 압박해 왔지만, 이비는 서두르는 대신 태연히 뜸을 들이며 생각했다.
이미 고분고분한 평민 노릇은 글렀지만, 저주에 대한 건 여전히 잘 숨겨야 한다. 약점으로 이용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저주에 걸린 게 탑주의 귀에 들어가면 내기고 뭐고 다 끝장이기 때문이다.
죄도 비밀도 많은 로히카 세드로가 제 치부를 발설할지도 모르는 이비를 지금처럼 밖으로 내돌릴 리 없다.
그래서 이비는 가장 말을 적게 하면서 저 까탈스러운 할머니를 회유할 방법을 잠자코 고민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눈을 감은 바옌 공작의 이마 주름이 살짝 깊어졌다.
이비는 그걸 본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
.
.
집무실 문밖에서 전전긍긍하던 바옌 공작의 비서는 안에서 나온 이비를 보고 아주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가증스러운 두 얼굴로 소문난 이비 아리아테는 아주 예쁘게 웃으며 마주 인사하고 지나쳤다.
‘저렇게 태연히 돌아다니다니…….’
공작의 비서는 접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비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이제 회의장으로 돌아가셔야…… 앗, 공작님!”
비서는 집무실로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가 바옌 공작이 진열장에서 술병을 꺼내는 걸 보고 기겁했다.
“고, 공작님, 회의장에서 다들 기다립니다…….”
“회의 끝났다. 그놈들 다 집에 가라고 해.”
공작의 무책임한 발언에 비서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은 반쯤 채운 술잔을 들고 창가에 섰다. 그러곤 창밖의 무언가를 느긋이 바라보았다.
비서는 혼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슬금슬금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공작이 뭘 보는지 그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 보았다.
창문을 통해 복도를 지나는 이비 아리아테가 보였다. 노공작의 시선은 그 소녀의 뒤를 정확히 쫓고 있었다.
비서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직접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아 소심하게 중얼댔다.
“생각보다 금방 돌아갔네요…….”
“그래도 할 말은 다 하더라.”
“예?”
“건방지게 말이다.”
바옌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 표정이 꽤 험악했지만, 비서는 곧장 알아보았다. 공작이 보기 드물게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그, 보기보다 순진하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순진?”
비서가 어수룩하게 던진 말에 공작이 재차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덧붙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비 아리아테는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순진했던 적이 없다.”
“그게 무슨…….”
“티엔다 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비스 출신 평민이 순진할 리가 있나.”
오히려 아주 독하다고 봐야지.
공작은 이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길게 찢었고, 비서는 조금 멍한 얼굴이 되었다.
말마따나 이비 아리아테는 이제껏 예의범절로 지적받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잘 배운 자들도 이따금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왕왕 있는데 말이다.
비서는 점 멀어지는 이비의 뒷모습과 느긋이 술잔을 기울이는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얘길 했기에 공작이 이토록 흡족해하나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저, 회의장에는 정말 안 돌아가실 겁니까?”
“나 술 마셨다.”
“그래도…….”
“취한 김에 돌아가서 칼부림이라도 하랴?”
공작의 짜증에 비서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바옌 공작은 가문의 젊은것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천상 군인이었던 이엘 바옌은 젊은 시절을 비스에 바치고 혼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역에서 물러날 때 바옌 군의 통솔권을 조카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그런데 장군이 된 조카 놈은 티엔다에 눌러앉아 게으름을 피우며 가끔 서면으로만 군을 관리했다. 당연히 바옌 군의 기강과 비스의 치안은 얼마 못 가 엉망이 되었다.
공작은 그 덜떨어진 조카를 가르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며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했지만, 애당초 그를 비롯한 그의 파벌들은 군을 이끄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설상가상 반년 전부터는 비스의 영주들이 직접 군대를 운영하게 하자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단지 비스의 치안 관리에 손을 떼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비스의 영주들에게 전쟁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화가 난 바옌 공작이 ‘그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숨 쉬는 부담부터 줄여 주마’라며 조카의 목을 조르려 한 게 불과 지난달의 일이다.
오늘의 회의도 저번과 똑같은 안건과 똑같은 실랑이의 반복이었다.
그 와중에 이비 아리아테가 만나 달라는 서신을 보내서 바옌 공작은 짜증이 난 김에 이비를 불러 버렸다.
가문의 젊은 놈들에게 굴욕을 주려는 의도 절반, 요새 계속 시끄러운 이비 아리아테에 대한 심심풀이 같은 호기심 절반이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성녀 후보를 앉혀 두자, 이비는 이렇게 첫 운을 뗐다.
―바옌 군의 무능을 증명해 볼게요.
공작은 이게 미쳤나 싶었다. 안 그래도 이비 아리아테가 대귀족과 싸우는데 재미가 들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제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스의 영주들에게 군사력을 넘기면 안 될 근거도 가져다드릴게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는 움찔 눈을 뜰 뻔했다.
바옌 공작과 그 조카가 이 문제를 두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외부인이 감히 입을 댈 사안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서 감히.
공작은 이비의 맹랑함에 괘씸함과 흥미를 함께 느꼈다. 그래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대신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하지만 부탁이라는 말에 공작은 곧장 실망하며 혀를 찼다.
얄팍한 것 같으니.
공작은 이비가 몬트라 후작과 척지고 불리해져서 자신에게 매달리러 왔다고 생각했다. 이래서야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는 소리 아닌가. 게다가 이러려고 바옌의 사정을 들먹였다고 생각하니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이비의 다음 말은 공작의 예상을 한없이 빗겨 갔다.
―제가 진상을 밝혔을 때, 그 일에 책임 있는 자를 끝까지 문책해 주세요.
뭐?
뜻밖의 말에 공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러자 이비가 이제껏 보여 준 적 없는, 어쩐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고기를 취하려면 뼈를 먹는 것을 가까이해라. 선대 공작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시죠. 저는 뼈가 필요해요. 그러니 고기가 필요하시면 이번만 절 가까이해 주세요.
이것 봐라?
공작은 어이가 없어 이비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이비가 이렇게 덧붙였다.
―덤으로 라우렐 백작을 놀릴 수 있는 기회를 또 만들어 드릴게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네?”
어리둥절해하는 비서를 뒤로하고 공작은 혼자 웃으며 이비의 말을 곱씹었다.
설마 이 정도로 건방질 줄은 몰랐다.
감히 공작 가의 일에 참견한 것도, 그걸 이용하려 든 것도, 또 이엘 바옌의 성미와 호불호와 존경하던 이가 남긴 말까지 알아내서 교묘한 말재간을 부린 것도 정말이지 건방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건방진 건 바로 이비 아리아테의 담력.
바옌 공작 정도 되는 자가 앞에서 눈을 감고 버티면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눈치를 보거나 허둥대기 일쑤다.
그런데 이비는 그 앞에서 허둥대긴커녕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공작이 오히려 답답해할 즈음에야 도발이나 다름없는 말을 툭 던져 버렸다.
정녕 건방지기 짝이 없게도 말이다.
조카의 안일함에 질려 있던 바옌 공작은 이비의 도발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일단 한 번은 어울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
그 시각, 카셀 몬트라도 자신의 저택에서 어려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냐냐의 작은 주인님.”
카셀은 긴장한 얼굴로 탑의 오만한 공주님을 맞이했다.
탑의 후계자인 미엘 세드로가 기별도 없이 카셀을 찾아왔다.
그래서 카셀은 크게 당황했다. 이비 아리아테가 혹시 차기 탑주에게 허튼소리를 해서 부추긴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긴장하지 마. 미엘, 가르쳐 줄 게 있어서 온 거야.”
카셀이 연신 눈치를 보자 미엘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있지, 이비네 집사가 비스에서 뭘 하는 것 같아.”
그러곤 탑주와 꼭 닮은 얼굴로 덧붙였다.
“그게 뭔지 후작이 직접 확인해 주면 좋겠어.”
아무래도 널 잡으려고 하는 것 같거든.
미엘은 이 뒷말을 삼키며 해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