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하나뿐인 같은 편
(71/129)
71화. 하나뿐인 같은 편
(71/129)
71화. 하나뿐인 같은 편
2023.02.02.
디에스는 로히카의 열 번째 사냥개였다.
마지막 번호를 받은 디에스의 주된 임무는 주인의 곁에서 은신하며 경호하는 것.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인 로히카가 평소와 다른 명령을 내렸다.
“지하에 이비라는 애가 있어. 아주 소란한 여자앤데, 네가 가서 좀 지켜보렴. 없어지거나 죽지 않게 말이야.”
지하에 갇힌 소녀들의 감시는 시종들의 몫이지만 디에스는 의문을 품거나 토 달지 않고 명령대로 내려갔다.
거기서 처음 만났다.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조차 없는, 성격 사납고 목소리 큰 여자애를.
“저기, 내가 한 말 그 탑주라는 사람한테 전했어?”
“탑주님은 지금 어디 있어? 바쁜 거야? 여긴 언제 와?”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데, 그 사람이 나한테 약속했다고!”
이비라는 이름의 그 여자애는 다른 노예들과 달리 묶여 있지 않았다. 심지어 여기가 어딘지 조차도 잘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시종들을 붙잡고 탑주의 행방을 물어 댔다.
다른 소녀들이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가혹하게 억압받는 것과는 꽤 다른 양상이었다.
하지만 디에스는 그 점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탑주에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도 않았다.
사냥개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복종이기에, 그저 그림자 뒤에 몸을 숨긴 채 명령을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으익, 이거 놔!”
겁도 없이 지하의 최하층까지 내려간 이비가 수상한 철창 앞을 기웃대다가 그 안에 있던 것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으…… 그……!”
어두운 철장 속에서 그르렁대는 무언가가 어린 소녀를 잡아끌었다.
이비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댔지만, 그 기괴한 것의 괴력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것의 또 다른 손이 이비의 목을 그러쥐려 할 때였다.
콰앙!
디에스가 철장 밖으로 나온 그것의 팔을 걷어차 부러트렸다.
“카아악!”
팔이 꺾이자 그것이 비명을 지르며 철장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것에게 붙잡혔던 이비는 놀라서 풀썩 주저앉았다.
지켜보라는 로히카의 말엔 도망치지 않게 잡으라는 말과 죽지 않게 지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림자 밖으로 잠시 나왔던 디에스는 할 일을 끝내고 다시 몸을 숨기려 했다.
“아저씨!”
그런데 이비가 갑자기 디에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잡히기도 전에 내동댕이쳤겠지만, 그 여자애는 주인이 지켜보라고 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무감한 눈으로 제 허리를 붙든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절박하게 디에스를 붙잡았던 이비가 흠칫 놀라며 손을 뗐다.
“아…….”
그러더니 크게 실망한 얼굴로 알아서 물러났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헷갈린 모양이었다. 그때 디에스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저 좋을 대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디에스는 침울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이비에게 ‘조심해라’, ‘여긴 다시 오지 마라’ 같은 최소한의 당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이때만 해도 디에스에게 이비는 주인이 맡긴 일감에 불과했고, 이비에게 디에스는 잠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낯선 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이게 끝일 줄 알았다. 더는 아무런 접점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몹시도 끈덕지게 엮여 버렸다.
그러다 종국에는 생과 사를 함께 하는, 피차간에 하나뿐인 같은 편이 되고 말았다.
.
.
.
그로부터 5년 후인 지금, 디에스는 이비가 엎어 버린 소파를 일으켜 세우며 고뇌하고 있었다.
―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생겨서 꼭꼭 숨기고 있어요.
―아니, 숨기는 건 따로 있어. 맞아. 그 사람 일이야.
―아무 데도 안 가! 그냥 도망치는 거야!
디에스는 이비가 던지고 간 말을 떠올리며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지난 2년간 이비는 자신의 모든 행보를 디에스에게 공유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이비의 운명을 따라가는 디에스의 처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착한 척하느라 입이 근질근질한 이비의 성격 탓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집사를 붙잡고 그날 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드는 게 이비의 하루 마무리였고, 그래서 디에스는 방금 이비가 보인 동요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뭐지?’
디에스는 불편한 기분으로 이비의 낯선 모습을 곱씹었다.
이비 아리아테는 자기가 잘난 걸 아주 잘 아는 건방진 성격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말도 많은데, 그런 이비가 시치미를 뚝 떼며 말을 아끼는 경우는 딱 하나였다.
그건 바로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때다.
이비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지독히 싫어해서 이따금 강한 척 허세를 부렸다. 마음이 쓰이는 일일수록 아무렇지 않은 척, 별로 상관없는 척, 관심 없는 척을 부지런히 해댔다.
그래서 디에스는 아저씨, 그러니까 점성술사에 대한 것도 최근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마저도 이비가 저주에 걸린 후 억지로 들은 이야기였다.
허세로 가득한 이비는 자신이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조차 드러내기 싫어했다.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그조차도 제 약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성격이 이 모양인 이비 아리아테가 백작에 대해 말하기를 갑자기 꺼린다면, 디에스가 예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어. 같이 술 먹고 안아 줄 때 자는 척하고 침대도 몇 시간 빌렸어.
이비의 끔찍한 발언이 다시 떠올라 디에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잠시 후 손 틈새로 흐르는 한숨 소리는 명백히 화가 나 있었다.
***
같은 시간, 이비는 난감한 기분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디에스를 공격해 버렸어.’
하지만 이건 물어보지 말라는데 계속 캐물었던 쪽의 잘못.
그래서 이비는 디에스에게 떳떳했다.
대신 자기 자신에게는 긴 변명이 필요했다.
‘그냥 말하면 됐잖아.’
좀 해괴한 소리 같지만, 아무래도 백작이 점성술사와 동일인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말했으면 디에스는 진지하게 들어 줬을 거다. 게다가 전직 사냥개는 수상한 상식도 많아서 쓸 만한 조언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니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도망칠 필요 역시 없다. 그러기는커녕 얼른 가서 말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나는 걷고 있는가…….’
이비는 이층집을 등진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스스로를 향해 한탄했다.
아직 정리가 안 됐다며 얼버무렸지만, 이것도 정말 말 같지 않은 소리였다.
등꽃제 마지막 날, 백작과 이야기한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이 정도면 정리가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나야 했다.
아니, 정리라면 이미 진즉에 했다.
백작에게 의지하는 건 점성술사에게 기대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운명을 맡긴 채 염려하는 건 이제 사양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점성술사가 누구든, 진실이 어떻든 달라질 건 없다.
이비는 분명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야.’
이비는 땅을 보고 걷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눈앞의 광경에 재차 탄식했다.
“정말 뭐 하자는 거야…….”
어느새 마을 뒷편의 언덕까지 올라온 이비는 자길 여기까지 데려온 자신에게 잔뜩 짜증을 냈다.
무작정 집에서 나온 건데 습관처럼 이 언덕을 올라오고 말았다. 여긴 어린 시절 이비가 점성술사에게 시위할 목적으로 종종 등반하던 언덕이었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담기자 이비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과 맞닿은 언덕 위엔 커다란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가지 위에 작은 집을 지어도 될 만큼 굵게 우거진 나무였다.
여전히 큰 나무이지만, 어릴 때 올려다보던 것처럼 무섭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이비는 나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 녹음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어릴 때를 떠올리며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댔다.
그대로 고개를 드니 자그마한 마을과 그 곁의 호밀밭이 한눈에 보였다. 지난 그믐의 저주가 다 꿈인 것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백작이 이 마을에 정착한 게 2년 전이라고 했지.’
2년 전이면 이비가 티엔다 사교계에 막 발을 들일 때다. 단지 우연일까? 아니면…….
이비는 가슴이 또 술렁이는 걸 느끼며 고개를 더 들었다.
그러자 하늘을 겹겹이 가린 연둣빛 잎사귀와 바람결에 흔들리는 여린 잎 사이로 자잘하게 쪼개진 햇살이 보였다.
이비는 그걸 보며 멍하니 떠올렸다.
그들의 같은 목소리를. 같은 체온, 같은 키, 또 같은 어깨. 같은 듯 다른 손등의 상처들을.
그리고…….
―나는 결혼까지 생각했으니까요!
이비는 진저리를 내며 땅을 콱콱 밟았다. 자신의 치명적인 과거를 그렇게라도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땅을 학대하길 한참, 이비는 다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바보처럼 허둥댈 때가 아니야.’
내 자유와 디에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머저리 같은 카셀 몬트라를 치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백작이 누군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비는 복잡하게 뒤엉킨 머릿속을 애써 비웠다. 그러곤 당장 디에스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 걸음을 떼려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비는 그 느낌을 따라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웬 새하얀 녀석과 눈이 마주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이비는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벌렁벌렁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길 바라보는 하얀 소년, 유비아를 쳐다봤다.
“어, 언제 온 거야?”
“1시간쯤 전에.”
놀라서 말까지 더듬는 이비와 달리 유비아의 대답은 느긋했다.
그 대답에 이비가 미간을 좁히자 유비아는 제 등 뒤를 슬쩍 눈짓했다. 거기엔 이 작은 체구의 소년이 웅크리고 앉으면 쏙 들어갈 만큼 높게 자란 나무뿌리가 잔뜩 엉켜 있었다.
유비아는 처음부터 저기 앉아 있었는데 이비가 딴 데 정신이 팔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비는 유비아가 자신보다 선객인 걸 알고 또 한 번 당황했다.
“땅한테 왜 화냈어?”
……봤구나, 역시.
“수치심을 참을 수 없어서 죄 없는 땅에 분풀이해 보았어.”
그리고 저주는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
이비는 자괴감을 느끼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이 치욕을 무마하기 위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구경.”
유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언덕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연결된 것들을 구경하고 있었어.”
일주일 만에 만난 유비아는 여전히 난해했다.
이비가 대꾸할 말을 찾느라 머뭇대는데, 유비아가 먼저 물어왔다.
“저주를 건 범인은 찾았어?”
“아니, 못 찾았어. 내 예상이 틀렸어.”
이비의 대답에 유비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유비아의 양 갈래도 덩달아 흔들렸고, 그 백발의 반짝임이 이비의 눈에 새삼 들어왔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흔치 않은 머리 색. 점성술사 또한 저렇게 새하얀 백발이었다.
이비는 홀린 듯 유비아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저도 몰래 이렇게 물었다.
“있잖아, 혹시 노체는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