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시온 라우렐의 혼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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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시온 라우렐의 혼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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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시온 라우렐의 혼탁
2023.01.09.
세상이 칠흑에 잠긴 시간, 바람이 몰아치는 대륙의 끝.
그곳의 위태로울 정도로 가파른 절벽에서 시온은 고요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한 바람을 견디길 한참, 여명과 함께 하늘 저편이 뿌옇게 밝아왔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시온은 낡은 검을 들고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새벽의 금빛이 수평선을 타고 달리기를 기다리다가, 잠시 바람이 멈춘 순간 그 무딘 검으로 허공을 벴다.
그와 함께 세상이 성급하게 밝아졌다.
시온의 검 끝에서 시작된 낙뢰가 하늘을 갈가리 찢으며 수평선 너머까지 뻗어 나갔다.
그것은 거침없이 하늘과 바다를 할퀴었고, 시온도 그 반동에 밀려나 하늘로 날려졌다.
그러자 그의 반려가 곁으로 날아와 시온을 낚아챘다.
직후 바다 저편에선 섬광이 일었고, 한발 늦게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췄나?’
시온이 다시 금빛과 먹빛으로 돌아온 바다를 살폈다.
그러길 한참, 전당에서 날아온 감시자가 고했다.
“태풍이 소멸했습니다. 잔바람이 일주일 내로 비구름을 만들어 낼 거라고 합니다.”
이상적인 보고에 시온은 거만하게 만족했다.
부하들에겐 절대 내색하지 않지만, 그는 태풍과 해일을 부수는 걸 내심 좋아했다. 예측과 결과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꽤 후련하기 때문이다.
‘다른 일도 이렇게 간단히 풀리면 좋겠는데.’
하지만 시온은 이 와중에도 속 편히 상쾌해하는 대신 덧없이 생각했다.
웃기는 일이다.
용을 떨어트리는 자, 티엔다비스의 진짜 주인, 그리고 미래를 아는 시온 라우렐이지만, 그는 제 앞에 산적한 문제를 무엇 하나 속 시원히 정리할 수 없었다.
여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모든 게 얽히고설킨 티엔다비스의 끔찍한 구조 때문이고, 둘은 그 남자가 시온에게 오기 전에 저지른 짓거리로 여러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은, 시온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가장 최악의 이유는 바로 그에게 내린 은폐의 저주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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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결국 그 남자의 기억을 받았다.
그로써 간신히 안도했다.
그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뒤틀린 건 아니라는 점에.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잔뜩 마모되어 밑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던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는 납득했다.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시온은 그 남자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반대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시온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무지한 친부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각하!”
모렌이 총사령관실로 다급히 들이닥쳤다.
“무사하십니까? 대공 전하께서 추락하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모렌이 이렇게 물을 때, 시온은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시온도 그 광경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난 척 거만을 떨어도 그는 아직 소년이었다.
“각하, 각하!”
멍하니 앉은 시온을 모렌이 연신 다그쳤다. 시온은 부사령관의 단단한 채근에 쫓겨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변명이든 해명이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말이…….’
나오질 않는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친부가 왜 스스로 투신했는지 말하고 싶은데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표정으로도 손짓으로도 이 심정을 전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모렌은 혀를 차며 혼자 방 안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방치된 시온은 제 상태에 당황하다가 친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용서해라, 시온. 부디 이걸로 마음을 풀어다오.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런 말을 해 놓고 내게 또 허튼짓을 하진 않았겠지.
시온은 제발 아니길 바랐다. 이게 제 못돼먹은 억측이길 빌었다.
그러나 그 실낱같은 희망은 며칠 후, 비보를 듣고 전당으로 내려온 이복형을 만나며 산산이 부서졌다.
“시온……!”
아버지의 유서를 들고 나타난 하르딘 라우렐은 시온을 보자마자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시온은 형의 접근을 막으며 차갑게 물었다.
“내가 성을 떠나던 날에 준 거, 아직 가지고 있어?”
“네 단추…… 얘기하는 거야?”
동생의 뜬금없는 물음에 하르딘은 영문도 모른 채 대답했다.
“아버지께 있어. 며칠 전에 보여 달라고 하셔서. 아직 돌려받지는 못했어.”
그 대답에 시온은 또 한 번 발밑이 무너졌다.
부디 아니길 빌었건만, 제발 그 정도는 아니길 바랐건만,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흉측한 괴물이 발톱으로 뱃속을 긁어 대는 기분이었다.
시온은 혹시 형도 이 일에 관여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물어보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다행히 하르딘은 이 일과 무관했다. 아니, 다행이 아니라 최악이었다.
아버지는 혼자 이 일을 꾸미고 저지른 뒤 죽었다. 그로써 밀실이 된 비밀 속에 아들을 가뒀다. 시온이 뭘 알게 됐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리석게 그 입에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
“시온, 그건 왜…….”
하르딘이 냉랭한 동생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그는 동생이 역대 백작들처럼 변해 버린 것 같아 두려웠다. 설령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죽음은 함께 애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온은 형의 심정을 외면한 채 다가오는 손을 맵게 쳐냈다.
라우렐의 가신들이 그 모습에 눈을 부릅떴지만, 시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남자가 전해 준 기억은 방대했다. 그래서 시온은 앞으로 생길 일만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던 여러 지식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저주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 남자는 시온보다 저주에 걸린 기간이 훨씬 길었고, 그래서 이 증오스러운 족쇄의 실체를 강박적으로 파헤쳤다.
덕분에 시온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저주의 원리를.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너저분한지도.
친부는 자신이 의뢰한 저주가 깨지자 시온을 옭아매기 위해 하르딘이 가지고 있던 시온의 커프스를 사용했다. 그걸로 시온에게 새로운 저주를 걸었다.
그래서 이 저주의 의뢰자는 본의 아니게 하르딘 라우렐이었다. 그 매개를 본래 주인인 시온에게서 넘겨받은 자가 그인 까닭이다.
이로써 멍청한 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주에 연루되었다.
그래서 시온은 또 한 번 속이 뒤틀렸다.
결국 친부는 둘째 아들의 삶을 빼앗은 걸로 모자라 첫째 아들의 목숨마저 도박의 담보로 사용했다.
입으로는 마음을 풀라면서 그에게 또 한 번 더러운 짓을 했다.
이대로 가문을 위해 입을 닫을지, 형을 죽여서라도 자유를 얻을지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시온…….”
그리고 하르딘 라우렐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슬퍼한다. 널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내 앞에서.
“저 시체 가지고 당장 꺼져.”
참다못한 시온이 짓씹었다. 그러곤 충격에 빠진 형과 가신들을 버려두고 돌아섰다.
“기다려, 시온! 왜 그래, 대체!”
물러터진 하르딘이 다시 동생을 붙잡았지만, 시온은 형을 무자비하게 뿌리쳤다. 그러곤 바닥까지 무너진 형의 얼굴을 차갑게 노려봤다.
“그딴 표정 짓지 마.”
너도 똑같은 인간이면서 불쌍한 척하지 마.
시온은 이렇게 몰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고,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은 무고한 형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시온은 이미 보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공위를 물려받는 형을. 가문의 비밀을 계승하고도 경계에 처박힌 나를 외면한 가증스러운 하르딘 라우렐을.
그래서 시온은 이제 이해했다. 친부와 이복형을 죽여 봤다는 그 남자를.
또 한편으로는 나도 차라리 그럴 걸 그랬나 후회했다. 내가 먼저 아버지를 죽였다면, 적어도 이따위 저주에 다시 붙들리진 않았을 텐데.
시온은 제 처지에 이를 갈며 다시 돌아섰다.
뒤에서 애원하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더 죽이고 싶어졌다.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추궁하고 배신자라며 매도하면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며 원망하고 싶었다. 또 날 버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차라리 외면하기로 했다.
이건 시온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온정적인 처사였다.
하지만 너희는 이마저도 모를 것이다. 아마 영원히.
시온에게 내린 은폐의 저주는 상상한 것보다 더 악랄한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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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렐의 안위만 챙기던 친부의 오판은 결국 대륙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시온은 곧 재앙이 도래할 것을 알게 됐지만, 머저리 같은 아버지 때문에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게 되었다.
시온은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책상에 이마를 처박은 채 조용히 고민했다.
‘차라리 죽을까?’
아직 친부의 장례식 기간이었다.
비극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라우렐 대공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타르데스 전당에서도 꼬박 한 달 동안 그의 죽음을 기렸다.
그래서 시온은 이 어이없는 엄숙함 속에서 내리 생각했다.
정말 죽을까, 하고.
이것도 저것도 전부 짜증 난다.
이놈도 저놈도 죄다 떠넘기기나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차라리 죽어버리자. 그럼 망하든 말든 다른 인간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 하나 발 뺀다고 망하는 세상이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시온은 온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져 이를 악물었다.
‘젠장…….’
저도 모르게 울컥한 시온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모든 게 불쾌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이 감정은 온당한 것이 아니었다.
시온의 환멸을 부풀리는 여러 사건 중 대다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 남자가 넘겨준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시온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직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하르딘 라우렐을 미워하는 게 정당한가? 하지만 그가 나를 외면하고 배신할 인간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온 라우렐은 떳떳한가? 그 남자는 죽였다. 제 친부도, 형도, 로히카 세드로도, 그 밖의 이름 모를 사람들도.
시온은 역한 기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제껏 사람을 해쳐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엔 이미 자신이 저지른 피의 기억이 선명했다.
아, 결국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기억은 경험이고 경험은 인간의 기반이다. 그 남자의 기억은 시온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소년은 이제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미 벌어진 일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나누지 못해 혼자만의 세상에서 증오심만 키운다. 자기 자신마저 혐오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 혼란과 갈등을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다. 비밀에 파묻힌 것은 시온 라우렐뿐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라우렐 대공을 추모하는 흑색 휘장을 보며 멍하니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온에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친부처럼 조금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정도로 숨이 끊어지면 편하겠지만, 라우렐 백작은 용에게 짓밟혀도 살아남는다.
결국 그는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신세였다.
제왕이 될 줄 알았는데 제물이 된 것처럼, 모든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온은 불퇴의 저주에 걸렸을 때보다 더 공허해졌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이비…….”
다행히 시온에겐 빚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