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넘기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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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넘기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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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넘기고 싶지 않아
2023.01.05.
―이건 저주야. 아마네세르를 가두기 위한.
―이건 곧 사라질 거야. 그럼 아마네세르도 여길 벗어나고, 그 후엔 무슨 수를 써도 못 막아.
시온은 그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곤 숯의 표면처럼 검고 매끈한 땅에 손을 댔다.
땅에서 미세한 박동이 느껴졌다. 이 저주가 감춰 버린 아마네세르의 심장 소리였다.
시온은 아마네세르의 고동을 느끼며 지난 교전을 떠올렸다.
3주 전, 시온은 아마네세르를 떨어트리고 끝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 검은 땅에서 솟구친 정체불명의 형상들이 시온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그사이 아마네세르는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음엔 끝낼 수 있을까?’
시온은 잉크를 쏟아 부은 듯 검은 땅을 보며 덧없이 생각했다.
그 남자는 이게 미친 용을 동녘에 가두기 위한 노체의 저주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아마네세르와 싸운 시온은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단지 가두는 게 아니라 보호하고 있어.’
아마네세르의 역린을 찢으려고 할 때마다 시온은 땅의 방해를 받았다. 그사이 용을 놓쳤고, 그걸 반복한 것도 벌써 몇 년째다.
시온은 이 교착상태에 갑갑함을 느꼈다.
이 땅에 번진 저주가 사라지기 전에 아마네세르를 죽일 수 있다면 그가 혼자 떠안은 문제는 절반 이상 해결된다.
하지만 아마네세르는 좀처럼 죽어 주질 않고, 정해진 미래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온이 조용히 쓴 물을 삼킬 때였다.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감시자들과 타르데스의 따님들이 보였다.
저들이 경계 안까지 들어와 시온을 찾는 건 드문 일이다. 그래서 시온은 전당에 꽤 급한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각하, 단의 점성술사들이 태풍을 예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긴급한 보고였다. 그러나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시온은 바로 제 짝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곤 단숨에 산맥을 넘어 전당의 옥상, 점성술사들이 점을 치는 아마네세르의 단에 내려섰다.
아마네세르의 단은 마치 신전처럼 하늘을 향해 개방된 엄숙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제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이 생겼지만, 정작 그 중앙엔 제단 대신 풍향계와 나침반을 닮은 정교한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황금빛을 띤 그것은 제자리에서 맞물리며 천천히 움직였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점성술사들은 구조물의 움직임을 살피며 지혜를 짜내고 있었다.
저것의 이름은 선의 물레. 대기의 흐름을 읽기 위해 아마네세르의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각하, 태풍이 오고 있습니다.”
물레의 움직임을 살피던 점성술사가 시온에게 와서 고했다.
“방향은 북동쪽, 사정권에 도달하는 날은 내일 동이 튼 직후입니다. 비를 끌어 올 수 있는 바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점성술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들떠 있었다. 귀한 비를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단의 점성술사들은 아마네세르의 역할을 이어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아마네세르의 조각으로 만든 물레를 보며 기상을 점친다. 그리고 이 위태로운 공중 대륙으로 접근하는 태풍과 해일을 예견한다.
다만 그들의 역할은 예견하는 것뿐, 그것을 부수는 건 라우렐 백작의 몫이다. 이런 까닭에 아마네세르의 단은 타르데스 전당에 속해 있었다.
단의 점성술사들은 모두 현명하고 신중한 자들이지만, 시온은 그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저 점성술사의 옷을 뒤집어쓰고 어린 이비에게 접근했던 그 남자의 악취미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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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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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가 사는 세상에 그런 게 날뛰면 안 되잖아.”
남자가 온화한 음성으로 말할 때, 시온은 아득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이놈이 미쳤다는 사실을.
그러자 남자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녹듯이 사라졌다. 그런 것도 어느 정도 기대가 있는 상대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미친놈은 당연히 열외였다.
그래서 시온은 이제 화가 나는 대신 진지하게 두려워졌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뭘?”
“그 사람한테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말했잖아. 전부라고.”
담담히, 아니.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자를 보며 시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대체 뭐지?’
사랑? 애정? 헌신?
아니다, 이런 흔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저 남자가 가진 건 그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음습한 종류의 것이다.
그 남자의 본성에 질겁하던 시온은 문득 이 상황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용에게 물어뜯겼던 그는 아직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돌연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초라한 제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눈앞의 광인이 시온을 더더욱 궁지에 몰고 있었다.
만약 생판 남이라면 시온은 진즉에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온 라우렐이었고, 그래서 그 남자의 상태는 시온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시온은 멀쩡한 척 웃는 이 남자가 절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포악하고 뒤틀려 있으며 그걸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이비라는 여자를 맹목적으로 떠받들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 여자에게 ‘고작’이라는 말조차 허락하지 않는 광신도.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유도 단지 그 여자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미치광이 추종자.
그래서 시온은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자신이 머지않아 저런 인간이 된다는 사실에 거부감 이상의 혐오감을 느꼈다.
“……그 사람한테도 네가 전부야?”
시온이 자신을 변호할 구실을 찾기 위해 물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남자는 다만 처연히 웃었고, 그 모습에 시온은 또 한 번 숨이 막혔다.
“설마 혼자 이러는 거야?”
“그건 직접 판단해 봐.”
시온이 추궁하자 남자는 말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난 곧 사라질 거야. 들켰으니까.”
“뭐?”
놀라는 시온을 뒤로한 채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이 시간대에 존재하기 위해 섭리를 속였다. 그리고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겨 왔다.
하지만 저 냉혹한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는 무자비한 섭리로 조율될 것이다. 마땅한 절차로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너한테 기억을 넘기러 온 거야.”
남자가 아직 바닥을 구르는 시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청하듯이.
하지만 시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네가 손해 볼 건 없어. 어차피 네가 겪을 일들을 미리 아는 것뿐이야. 그걸 꺼내 쓰는 건 순전히 네 몫이고.”
시온이 경계하자 남자가 덧붙였다. 그럼에도 시온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억을 넘기겠다니.
기억은 경험이다. 그리고 경험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반이다.
그래서 시온은 받고 싶지 않았다. 저 남자의 기억 따위, 그가 가진 기괴한 감정의 근거를 이어받고 그 모습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시온이 손잡기를 거부하자 남자가 차분히 말했다.
“이제 맨정신으로 아마네세르와 싸워야 하니 필요할 거야. 내가 저 용을 죽인 기억들이.”
그 말에 시온은 퍼뜩 떠올렸다. 흐릿한 기억 속 아마네세르의 형상을.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통을 조이는 그 존재를.
남자의 말대로 이제 시온은 자신의 의지로 그것과 맞서야 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이제 정말 시간 없어.”
남자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미지근한 채근에 갈등하던 시온은 결국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남자가 시온의 몸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그는 억센 팔로 소년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내일 당장 이비한테 가. 만나서 내가 누군지 알려 줘. 그리고 안심시켜 줘. 나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못했으니까.”
남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시온은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시온을 더 단단히 붙들며 당부했다.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가. 티엔다가 이비의 존재를 눈치채게 하지 마. 특히 탑에서 접근 못 하게 막아.”
시온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시온이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을 믿고 맥락 없이 말을 이었다.
“이젠 되돌릴 수도 다시 시작할 수도 없어. 마지막 기회야. 그러니까, 이번엔 꼭 끝까지 지켜 줘.”
시온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그렇게 얼굴을 감춘 채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또 절실했다.
그래서 시온은 참다못해 남자를 밀쳤다.
“몰라, 그런 거.”
그러곤 필사적으로 선을 그었다.
“빚은 갚겠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 나는 네가 아니고 그 여자도 나하곤 상관없어, 떠넘기지 마.”
시온은 남자가 애원하는 꼴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면처럼 웃을 땐 언제고, 자길 태연히 밟아 댈 땐 언제고, 어느새 빌고 있는 저 남자의 위태로움과 비굴함을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시온은 자신이 이토록 나약하게 무너지는 인간인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를 밀어내자 커다란 손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목이 졸렸다.
“큭!”
남자가 목을 움켜쥐자 시온은 경악하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소년은 그 남자의 악력을 떨칠 수 없었다.
남자가 시온의 목을 잡은 채 속삭였다.
“나도 넘기고 싶지 않아.”
“이거 놔……!”
“내 심정이 어떤지 알아? 차라리 널 죽이고 싶어. 널 죽여서, 빈자리를 억지로 만들어서 다시 만나고 싶어. 지금도,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지만…….”
“윽!”
남자가 속삭이는 사이 시온은 그 손을 가까스로 뿌리쳤다. 그러곤 악에 받쳐 고개를 치켜들었고, 도로 굳어 버렸다.
“……난 이미 실패했으니까.”
그렇게 신음하는 남자는 울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게, 모든 걸 잃은 얼굴로 조용히 눈물을 쏟고 있었다.
시온은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이 남자가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이제 사라져야 하는 그와 달리 아직 기회가 있는, 그래서 그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나를 지독히 시샘하며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걸 알게 된 시온은 똑같이 울고 싶어졌다.
설마 자기 자신을 질투하다니, 이렇게까지 미쳐 돌아 밑바닥조차 남지 않았다니.
그 남자는 시온이 아는 모든 것 중 가장 포악하고 뒤틀려 있으며 비루한 존재였다.
역겹고 혐오스럽지만 외면하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도 시온 라우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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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 북부 격언에 ‘못난 자를 보면 자신과 닮은 구석부터 찾아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되먹지 못한 인간을 만나면 혹시 자신에게도 저런 흠결이 있진 않나 되돌아보라는 뜻이다.
시온에게 그 남자는 저 북부 격언에 정확히 부합하는 상대였다.
5년 전 그때 시온은 다짐했다. 절대 너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그래서 시온은 오늘도 의무를 다한다.
지겹기 짝이 없지만,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싶지만, 온갖 욕을 다 하면서도 자신의 역할과 의무에 매달렸다.
그 인간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그 인간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가 아무것도 없는 대륙의 끝에서 밤을 지새운 것도 그런 이유였다.
동이 트고 있었다.
태풍을 깨트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