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열세 번에 걸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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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열세 번에 걸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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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열세 번에 걸쳐 죽었다
2023.01.12.
“완벽한 대처였습니다, 각하!”
모렌이 전당으로 복귀한 시온을 향해 쓸데없이 쾌활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시온은 너 뭐 하냐는 듯 모렌을 힐끗 쳐다보고 쌀쌀맞게 지나쳤다.
대놓고 무시당했지만, 심지어 부하들이 그걸 보고 황급히 눈을 깔았지만 모렌은 이 푸대접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각하, 이비가 없다고 바로 이러긴가요……?’
서운하기는커녕 히죽대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어야 했다.
모렌은 지난 등꽃제에서 상관을 향한 내적 친밀감과 외사랑을 한껏 키우고 돌아왔다.
부하의 체면을 위해 카셀 쓰레기에게 친히 경고하신 각하.
가련한 성녀 후보를 지키라고 이 몸을 보내신 각하.
이비를 아련히 지켜보시던 어화둥둥 우리 각하.
‘각하, 이비가 그렇게 좋아요? 우리도 좋았잖아요. 같이 꽃구경도 했잖아요. 내가 열심히 도왔잖아요. 근데 이비가 없다고 이렇게 날 버려요? 각하……!’
모렌은 속으로 질척이며 시온의 뒤를 따랐다.
유쾌한 기분 탓인지 시온의 넓은 등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충성과 존경을 지우고 봐도 그는 정말 근사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모렌은 언제나 아까웠다. 숙명에 잡아먹힐 저 눈부신 자의 모든 것이.
모렌은 라우렐 백작의 삶을 잘 안다.
그들은 대륙의 안위를 위해 매달 몸을 으스러트린다. 그렇게 한계까지 버티다 후계자가 나오면 간신히 그 지옥에서 벗어난다. 그 후 안락한 여생을 보내는 듯도 하지만, 실상은 인형처럼 텅 비어 화려한 저택에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영웅의 최후는 다 타버린 재와 같았고, 그래서 모렌은 그 전철을 밟을 시온의 운명이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그런데 모렌의 예상과 달리 그의 상관은 경계에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들어선 더 의외의 모습도 보여 주고 있다.
‘각하, 연애하는 거 맞죠. 나 몰래 이비 만난 거 맞죠. 방에 비밀 통로 봤어요. 그걸로 둘이 몰래 만났죠.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데요. 마지막 날 그 소린 뭐예요. 말해요. 나한테도 알려 줘요, 각하!’
차마 내색은 못 했지만, 등꽃제 첫날 모렌은 진심으로 비참했다. 한 여자애를 멀찍이서 음침하게 바라만 보는 총사령관의 고자적 면모가 그의 가슴을 박박 찢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사령관의 침실에서 이비가 쓰러졌을 때, 그런 이비를 위해 총사령관이 자신을 부를 때 모렌은 이 엄청난 반전에 감격해 버렸다.
‘역시 우리 각하, 연애도 훌륭히 잘하고 계셨군요!’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모렌은 얼굴 근육에 힘을 주고 총사령관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시온의 책상에는 모렌이 사전에 올려 둔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경계 병력에 대한 이번 분기 보고입니다.”
태풍을 깨기 위해 밖에서 밤을 새고 돌아온 참이지만, 시온은 쉬기 전에 몇 가지를 검토하고 싶었다.
그래서 피로를 누르며 보고서를 펼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앗, 실례했습니다. 제 개인 문서가 섞인 것 같습니다.”
시온이 엉뚱한 서류를 보고 인상을 쓰자 모렌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제 남동생에게 추천받은 부티크 명단입니다. 미혼 여성에게 선물할 일이 있어서 참고하려고 부탁한 것입니다.”
모렌은 그렇게 능청을 떨며 두근두근 총사령관의 반응을 기다렸다.
시온은 흥미가 있는지 그 서류를 내려다보며 초를 켰다. 그러더니 그 발칙한 종이 쪼가리를 모렌의 육체 대신 불살라 버렸다.
“악……!”
“시끄러우니까 나가.”
충정을 짓밟힌 모렌이 비명을 지르자 시온이 짜증을 내며 짓씹었다. 그 찌르는 시선에 모렌은 찔끔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 각하. 이비와 헤어지자마자 또 마음 없는 사람이 되셨군요…….’
하지만 이 또한 사랑…….
비록 혼이 났지만 모렌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부관을 쫓아낸 시온은 이마를 짚으며 신경질을 삼켰다.
예민한 시온은 모렌의 불순한 시선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저게 왜 저러나 했는데, 보고서에 옷 가게 목록 따위를 끼워 넣다니.
시온은 이를 갈며 경계의 기강을 가혹하게 다잡기로 결심했다. 그러곤 다시 보고서로 눈길을 돌렸다.
탑주가 탑을 다스리는 것처럼, 대공이 라우렐 성과 그 가신들을 이끄는 것처럼 이곳의 모든 것은 시온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경계의 감시자들은 오직 시온만 섬긴다. 그래서 시온은 모렌을 비롯한 부하들에게 이비와 관련된 것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뭘 알든 저들은 시온을 위해 함구할 테니까.
경계의 충성은 이토록 견고했다. 다만 이것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시온이 지난 2년간 직접 일군 것이다.
감시자들을 완벽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온은 꽤 공을 들였다. 그로써 자신의 군단을 이룬 지금, 그는 종종 생각한다.
5년 전 그때도 이들이 수중에 있었다면 이비를 그렇게 놓치지 않았을 텐데, 라고.
.
.
.
죽기를 바라던 시온은 가까스로 떠올렸다.
자신이 할 일, 갚아야 할 빚, 이비를 지키라는 그 남자의 마지막 부탁을.
그래서 시온은 부스러기가 된 마음을 간신히 긁어모았다. 어쨌든 그것만이라도 해내자는 심정으로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남자의 당부와 달리 시온은 이비에게 바로 갈 수 없었다. 친부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대공이 전당에서 투신하는 바람에 수많은 귀족이 이곳을 찾았다. 그 복잡한 상황에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게다가 그럴 정신도 없었다.
깊이 침잠하던 시온이 이비를 퍼뜩 떠올린 건 남자의 기억을 받고 보름이 지나서였다.
‘지금이라도 찾으러 갈까?’
남자를 붙잡고 울던 그 애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댔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야 이비를 떠올린 자신을 남자가 책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전당을 떠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남자는 이비의 존재를 티엔다나 탑에 노출 시키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 움직이면 시온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부사령관의 눈을 따돌릴 수가 없다.
게다가 이제 다시 아마네세르의 기상에 대비해야 할 때였다.
그 미친 용이 잠드는 시간은 한 달 남짓. 그래서 아마네세르가 잠들고 보름이 지나면 전당에서는 다시 교전을 준비했다.
이래저래 몸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가 안전한 곳에 있는 걸 떠올리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마르소 부인에게 부탁했으니까 한 달쯤은 괜찮을 거야.’
결국 시온은 다음번 교전을 마치자마자 이비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온은 남자의 경험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래서 이제 그처럼 아마네세르를 수월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녘의 진동과 함께 아마네세르를 다시 마주했을 때, 시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 처음 대면한 용은 그 자체로 아득한 절망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모든 걸 잊은 채 얼어붙었고, 역대 가장 처절한 전장으로 내몰렸다.
시온은 용과 맞서기 위해 일어났다 주저앉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용은 그런 소년을 가혹하게 짓이겼다.
소년에게 그것은 끝나지 않는 지옥이었다.
그들의 대치는 50일이 넘도록 이어졌고, 긴 교전 끝에 소년은 간신히 아마네세르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심하게 다쳐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시온이 다시 눈을 뜬 건 꼬박 한 달을 채운 후였다.
그 긴 시간 시온은 꿈을 꾸었다.
이비의 꿈이었다.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 그러나 기억 속에 가득한 이비는 아름답지만 냉혹한 여인이었다. 동시에 사랑스럽고 명랑한 여자아이였다.
막 눈을 뜬 시온이 이비의 잔상을 쫓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각하, 깨어나셨습니까?”
부사령관의 목소리였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곧 아마네세르가 깨어납니다!”
당장 나가 싸우라는 소리였다. 용에게 으깨지고 막 눈을 뜬 자에게.
가혹한 요구지만 시온은 화가 나지 않았다. 이게 제 처지인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여자를 제 전부라 말하던 남자를.
텅 빈 세상에서 겨우 얻은 한 줌 연민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게 된 그 초라한 인간을.
그래도 나는 너처럼 되지 않을 거야.
시온은 이렇게 되뇌며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엔 단 세 시간 만에 아마네세르를 추락시켰다.
두려움을 이긴 소년에게 남은 것은 용을 죽인 기억뿐이었고,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었다.
시온은 용을 잠재우고 곧장 이비에게 찾아갔다.
하지만 시온이 호밀밭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비는 그곳에 없었다.
불과 일주일이었다.
이비가 그 마을에서 사라진 것은, 시온이 찾아간 날로부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 휑한 빈자리에 시온은 겁에 질려 이비를 찾았다.
하지만 이 광활한 대륙을 혼자 뒤져 소녀를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 그때 감시자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면 그들을 시켜 대륙을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백작은 충성의 대상이 아닌 병기에 불과했고, 결국 시온은 누구도 믿지 못해 홀로 절박하게 이비를 찾아 헤맸다.
그러길 3년, 티엔다에서 낯선 소식이 전해졌다.
마냐냐에게 사랑받는 이비 아리아테라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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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보고서를 덮었다. 그러곤 창가에 서서 훈련장의 감시자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시온 휘하의 감시자들은 역대 가장 큰 규모를 이루고 있다.
저들은 티엔다와 비스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오직 시온에게만 충성한다.
이로써 탑을 정복할 준비는 끝났다.
‘남은 문제는 이비를 빼돌리는 건데…….’
시온은 팔짱을 끼며 가만히 인상을 썼다.
적당히 좀 따라올 것이지, 성녀가 될 거라며 죽자고 버티는 이비 아리아테.
그래서 조용히 납치해서 감금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변수가 생겼다.
―백작님은 나중에 생길 일을, 미래를 알고 계신 건가요?
그 변수란 예상을 뛰어넘는 이비의 통찰이다.
덕분에 시온은 새삼 갈등하게 되었다. 이대로 티엔다를 장악하고 탑을 무너트릴지, 아니면 이비가 자신의 비밀을 파헤치는 걸 기다릴지.
시온은 창틀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두 결정의 장단을 계산했다.
이비가 그의 비밀을 푼다면 시온에겐 새로운 길이 열린다. 티엔다에 무력을 쓰지 않아도 되는 보다 평화로운 길이.
하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 목표를 확실히 달성하기 위해선 기존 계획을 강행하는 편이 낫다. 준비는 충분하고, 반역자나 독재자라 불릴 각오도 마쳤다.
그러니 이제 와 머뭇댈 필요는 없지만…….
―저는 일상의 소중함을 잘 알아요. 그러니까 백작님의 일상도 지켜 드릴게요.
절로 떠오른 목소리에 시온은 짜증을 내며 혀를 찼다.
짧은 갈등 끝에, 시온은 농락당한 기분을 뒤로하며 중얼댔다.
늦으면 너부터 가둬 버릴 거야, 라고.
남자의 기억 속, 아직 오지 않은 시간대의 이비는 이미 탑의 성녀였다.
그 이비는 신의 가호를 받는 자로서 마땅히 칭송받았고, 열세 번에 걸쳐 죽었다.
남자가 넘긴 처절한 기억에 시온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너무 멀리 돌아온 시온을 책망하듯 남자의 마지막 당부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번엔 꼭 끝까지 지켜 줘.
시온은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