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우리는 매일 악마와 손을 잡는다 (57/129)


57화. 우리는 매일 악마와 손을 잡는다
2022.12.15.



“그대, 선택받은 자로서 티엔다비스의 정의와 질서를 최우선 할 것을 맹세하는가?”

“그대, 희망의 상징으로 두 대륙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것을 맹세하는가?”

“그대, 두 대륙의 연결자로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아껴 돌보기로 맹세하는가?”

“그대, 순결의 본으로서 어떤 순간에도 명예를 지키고 품위를 유지하기로 맹세하는가?”

“그대, 마냐냐의 대리인인 성녀로서 항상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는가?”

이 엄중한 물음에 열일곱 살의 어린 성녀, 로블레 투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맹세합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었다.

하늘이 마냐냐의 빛깔로 더없이 푸르던 그 날, 로블레는 찬란한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탑의 성소에서 성녀 발탁의 마지막 관문인 문답식을 통과했다.

탑주가 새로운 성녀의 탄생을 선포했고, 로블레는 드디어 성녀가 되었다.

기쁘고 벅찼다.

세간엔 ‘성녀는 어차피 투하의 딸’이라는 빈정댐이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로블레가 이 자리에 쉽게 오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투하의 성을 가진 또래의 친척들과 경쟁하며 선택되고 선택된 끝에 겨우 이 자리에 섰다. 그 긴 시간, 로블레는 누구보다 간절했다.

드디어 꿈을 이룬 로블레는 눈물을 참으며 대귀족과 전대 성녀에게 받은 질문을 곱씹었다.

감격스러운 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동시에 욕심도 났다. 반드시 잘해 내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성녀가 되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들떠 있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탑주 로히카의 묘한 미소를, 그리고 전대 성녀의 어두운 눈빛을.


 

.
.
.

새로운 성녀의 탄생을 기념하며 한 달 동안 축제가 열렸다.

그 축제가 보름째에 접어들 무렵, 탑주가 새로운 성녀를 탑으로 불러들였다.

로블레는 그날 처음으로 탑의 지하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탑에 지하가 있었어?”

“응, 이제 성녀가 됐으니까 보여 줄게.”

늘 위로만 향하던 승강기가 밑으로 움직이자 로블레가 놀라서 물었다. 로히카는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고, 그래서 로블레도 가벼운 마음으로 로히카를 따라갔다.

이윽고 도착한 탑의 지하는 아주 깊었다. 또 넓었다.

고귀한 탑의 일부답게 그 지하 역시 웅장하고 아름다운 구조를 자랑했으나, 일렁이는 등불의 빛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산했다. 마치 신의 무덤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로블레가 두리번댈 겨를도 없이 로히카가 앞장섰다. 영문도 모른 채 로히카의 뒤를 따르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익숙한 가락이었다.

로히카를 따라 걸을수록 소리는 가까워졌고, 어느 거대한 문 앞에 섰을 때 로블레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 문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로블레에겐 더없이 익숙한, 마냐냐를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그 노래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로블레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같은 노래를 수도 없이 불렀지만 이 노래가 이토록 장엄하게 해석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로블레는 저 너머에서 노래하는 것이 혹시 마냐냐가 아닐까 하는 상상마저 하게 되었다.

이윽고 시종들이 문을 여는 순간, 로블레는 말 그대로 압도되었다.

소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 낸 그 합창은 전율을 넘어서는 충격으로 로블레를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눈앞의 광경도 어린 성녀에겐 가혹할 만큼 경이로웠다.

그의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물이었다. 수면을 꿰뚫고 내린 햇살로 음영을 달리하는 그것은 분명 호수의 깊은 수중이었다.

그 물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쏟아지지 않고 벽을 이룬 채, 햇살이 물결 따라 일렁이는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과 마주한 거대한 단상 위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소녀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로블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십수 년간 노래해 왔지만, 전대 성녀를 비롯한 가장 유능한 교사들에게 지도받아왔지만, 저토록 날카롭게 벼려진 노래는 처음이었다.

이들의 노래에 비하면 성녀와 정화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아이의 장기자랑에 불과했다.

로블레가 감격과 절망 사이에서 외줄타기하고 있을 때였다.

대열을 갖춰 노래하던 소녀 중 너덧 명이 돌연 쓰러졌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 소녀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로블레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쳐다보다가, 자신이 충격 속에서 간과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녀들은 멈추지 않은 게 아니라 멈출 수 없는 거였다.

그들은 리본 같은 레이스로 눈을 가리고, 풍성한 프릴로 손목과 발목을 묶고 있었다.

그래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장식인 줄 알고, 설마 저런 예쁜 걸로 사지를 구속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로블레가 그 기괴한 사랑스러움에 헛숨을 삼키는 사이, 시종들이 쓰러진 소녀들을 대열에서 끌어냈다.

소녀를 안고 나온 시종에게 로히카가 물었다.


“뭐야?”

“숨을 거뒀습니다.”

“저런.”

너무 자연스러운 대화에 로블레는 또 한 번 얼이 빠졌다.

어린 성녀가 멍하니 쳐다보자 로히카는 생긋 웃었다.


“오해하지 마. 극진히 보살피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잘 먹이고 재워도 소용이 없어. 용과 공명하면 몸이 상하거든.”

로히카의 설명에 로블레는 오히려 의문에 휩싸였다. 그래서 로히카가 상냥히 덧붙였다.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아무 재주 없는 귀족 아가씨 몇 명이 노닥대며 노래한다고 뭐가 되겠어. 그런 소꿉장난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참 좋기는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물을 정화하는 건 저 애들이야. 저 애들은 매일 반나절 넘게 용을 불러. 그렇게 꼬박 40일을 지내야 저 호수를 간신히 정화할 수 있어.”

“그럼 우리는?”

“너희?”

로블레가 흔들리는 눈으로 묻자 로히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는 이걸 감추기 위한 눈속임이지.”

“왜? 이걸 왜 감춰? 물을 정화하는 게 저 애들이면 그렇다고 사실대로 알리면 되잖아!”

로블레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소녀들의 노래는 쉼 없이 이어졌다.

로블레는 철이 들 무렵부터 성녀가 되기를 꿈꿔 왔다. 그런데 성녀라는 게 이런 덧없는 눈속임이라니. 자신의 근본부터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매섭게 따져 물었지만, 로히카의 대답은 여전히 가벼웠다.


“그야 이런 게 눈에 띄면 기분 나쁘잖아. 어린 여자애들이 물을 정화하느라 혹사당하고 죽기도 하는 걸 누가 알고 싶겠어.”

로히카의 대답에 로블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로블레가 아는 로히카는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 뿐, 마음은 여린 친구였다.

그런데 탑주가 된 후 로히카는 딴사람이 되었다. 로블레는 이토록 능숙하게 악독한 소녀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게 알려지면 노래할 아이를 모을 수가 없잖아.”

“모은다고……?”

“응, 네 역할이야.”

그건 티엔다 귀족들은 까맣게 모르는 이야기.

비스의 빈민가나 보육원, 노예경매장 따위에서만 떠도는 수상한 소문.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아이는 티엔다에 갈 수 있어, 저 성녀님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야.


“성녀가 주기마다 비스로 내려가는 건 노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야. 오갈 곳 없는 불쌍한 애들이 소문을 듣고 그 노래를 배우도록.”

그럼 탑에서는 자질이 확인된 아이를 건져 온다. 그 후엔 바로 저렇게.

로히카가 신록을 닮은 눈동자로 노래하는 소녀들을 눈짓했다.

그 모습에 로블레는 숨이 막혔다. 아주 독한 향수를 입안에 부은 것처럼 목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럼, 저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평생 저렇게, 아니면…….”

“들어온 지 3년이 지나면 풀어 주고 있어. 그 이상은 목이 상해서 쓸 수가 없거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 시간을 버티는 애는 거의 없어.”

로히카의 대답에 로블레는 흐느끼듯 신음했다.

그렇게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친구에게, 로히카는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세상을 위한 일이야. 모두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

“말도 안 돼……!”

로블레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 성녀가 된 소녀는 몸을 덜덜 떨며 탑의 잔혹함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 성토에 되돌아온 답은 비정했다.


“너는 너희 가문의 안위에 관심이 없니?”

로블레는 말문이 턱 막혔다.

투하가 그 약소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떨치는 건 성녀를 가장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을 밝혀 성녀의 존재를 부정하면, 나아가 역대 성녀들의 기만을 폭로하면 투하는…….

로블레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성녀의 맹세를 떠올리며 소리쳤다.


“가문은 상관없어! 나는, 나는 인정 못 해, 어떻게 이런……!”

“그래? 그럼 네가 구해 봐.”

로블레의 반박에 로히카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종들이 끈을 당겨 소녀들의 노래를 멈추게 했다.


“축하해. 네 자비가 저 애들을 구했어. 이제 저 애들의 생사는 너한테 달린 거야.”

뜻밖에도 로히카는 로블레의 말을 곧장 들어주었다. 그래서 로블레는 도리어 당혹스러웠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네가 저 애들을 대신할 수 있다면 저 불쌍한 애들은 전부 놔줄게. 하지만 실패하면 입 다물고 착하게 지내는 거야, 다른 성녀들처럼.”

 

.
.
.

로블레의 예상대로 그건 함정이었다.

그 후 정화가 멈췄다. 로블레 투하는 역대 가장 무능한 성녀로 지탄받았다.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다.

견디다 못한 로블레는 꼭 반년 만에 탑의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로히카는 돌아온 탕아를 기쁘게 맞아 주었다.


“물이 정화되지 않아서 비스에 가뭄이 들고, 염해 때문에 전염병이 돌았어. 마실 물도 없는데 전염병이라니 불쌍하기도 하지. 서부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다는데, 아직 보고조차 없는 남부는 어떨지 모르겠네. 게다가 절망적인 흉작 때문에 올겨울에도 꽤 죽어 나갈 거야.”

로히카는 공부를 가르쳐 주는 선배처럼 비스의 절망적인 상황을 조목조목 읊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 잔혹한 물음에 로블레는 결국 로히카의 발치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화를 내지 그랬어! 내가 겁도 없이 덤빈다고, 어리석은 소릴 한다고 혼내고 가르치지 그랬어!

하지만 이렇게 원망해 봐야 너무 늦었다.

로블레는 결국 어느 쪽도 구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노래하는 소녀들도, 아무 죄 없는 밑 대륙의 사람들도.

다만 지극히 미움만 받으며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성녀의 또 다른 역할을 스스로 깨우쳤다.

아, 성녀란 화살받이였다. 탑을 대신해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거리로 끌려 나가는 자. 지극히 편리한 존재. 그게 탑이 애지중지하는 성녀였다.


“괜찮아, 이제라도 잘하면 돼. 수백 명을 구하려다 수천 명을 죽였지만, 그걸로 네가 훌륭한 성녀님이 된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로히카가 로블레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로블레는 그런 로히카가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귀족들에게 탑의 실체라도 알려 볼까 했다. 그런데 저 녹색 눈의 악마를 보는 순간 모든 의지가 부서졌다.

이걸 알린다 해도 과연 누가 나설 수 있을까?

몰아치는 파도를 피해 올라선 반석이 다른 사람의 머리인 걸 알고 싶은 사람이 세상 어디 있을까. 그걸 알았다고 해서 선뜻 내려올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우리 모두 이미 공범인 것을.

아득한 절망 속에서 로블레는 성녀가 되던 날의 문답식을 떠올렸다.

그대, 선택받은 자. 희망의 상징. 두 대륙의 연결자. 순결의 본. 마냐냐의 대리인…….

온갖 미사여구를 차지하고 맹세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귀와 입을 뜯어내고 싶었다.

아, 성녀의 진짜 역할이 이런 거라면 대체 왜 그런 맹세를 시킨 걸까?

그게 세상 물정 모르는 성녀를 길들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녕 악마나 할 법한 발상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매일같이 악마와 손을 잡는다.

.
.
.

로블레는 결국 성녀의 역할을 받아들였고, 그 후 5년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숨을 죽이던 어느 날.


“일단 그거 내려놔!”

“싫은데?”

“위험하다고!”

“알면 비키든가, 아니면 다 같이 타 죽는 거야.”

아주 침착하게 미친 애가 탑의 지하로 흘러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