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길들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58/129)


58화. 길들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2022.12.19.



“알면 비키든가, 아니면 다 같이 타 죽는 거야.”

그 앳된 소녀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호기로웠다.


“아하하, 쟤 좀 봐!”

그리고 탑주 로히카의 웃음소리는 믿을 수 없이 경쾌했다.

그래서 로블레에겐 눈앞의 상황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이상했다.

5년 전, 탑주에게 엎드려 빈 이후 로블레는 단 한 번도 탑의 지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탑주가 갑자기 지하로 불러서 마지못해 내려온 참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죠?”

“아, 왔니?”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웃던 로히카가 로블레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너도 와서 구경해, 내가 데려온 애야.”

탑주가 직접?

뜻밖의 말에 로블레는 머뭇대며 로히카의 옆에 섰다. 그러곤 한층 아래에 있는 어수선한 홀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선 소녀 한 명과 시종 열댓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세한 건 소녀 쪽이었다.

그 어린 소녀는 기름이 흥건한 바닥에 대고 등불을 흔들며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종들은 그 여자애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저게 대체…….’

저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 로블레는 몹시 당황했다. 이곳에서 저런 촌극이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등불을 들고 슬금슬금 옆으로 걸었다. 그러자 시종들도 저 불을 빼앗고 여자애를 잡기 위해 함께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렇게 묘한 긴장이 이어지길 잠깐.


“에잇!”

여자애가 자신에게 접근하던 시종에게 등불을 집어던졌다.

시종들이 허공에 떠오른 불을 잡으려고 허둥대는 사이 여자애가 날쌔게 내달렸다.

시종들도 여자애를 잡으려고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는데, 몇몇이 기름을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 같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덕분에 소녀는 여유롭게 홀을 가로질렀다.


“푸핫!”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로히카가 다시 한번 폭소했다. 하지만 로블레는 차마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아, 저러다 정말 도망치겠네.”

로히카가 큭큭대며 난간 밖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 옷의 남자가 소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 남자의 등장에 한발 늦게 달려온 시종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로블레 역시 저 남자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짐짓 놀랐다.

저건 소문으로만 듣던 로히카의 사냥개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검고 어두운 사냥개는 한눈에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붙잡힌 소녀는 발버둥 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만약 겁에 질렸다면 저토록 태연하게 한숨을 내쉴 리도, 도리어 뻔뻔하게 물어볼 리도 없었다.


“이번엔 무슨 벌 줄 거야?”

 

 
로블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히카는 아예 난간에 이마를 처박고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킥킥대길 한참, 로히카가 아래층을 향해 즐거운 목소리를 소리쳤다.


“이비야!”

로히카의 부름에 뒷덜미가 잡힌 소녀가 힐끗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로히카를 보고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감히 탑주를 보고 벌레 씹은 표정을 짓는 여자애.

역시 로블레의 눈에는 이 상황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상했다.

하지만 정작 로히카는 개의치 않고 로블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기 성녀님인데, 관심 없니?”

갑작스러운 소개에 소녀의 시선이 로블레를 향했다.

그렇게 성녀와 마주한 소녀의 얼굴은 뜻밖에도 매우 귀여웠다. 까만 눈동자가 무척 도전적인 것을 빼면 지극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다.

한편 이비라고 불린 그 애는 로블레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팩 돌리며 뭐라고 중얼댔다.

그 무성의한 속삭임은 한층 위의 복도까지 닿지 않았다. 그래서 로히카가 사냥개에게 물었다.


“방금 이비가 뭐라고 했어?”

“사기꾼, 죽어. 라고.”

“푸흡!”

적발의 사냥개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로히카는 또 한 번 쓰러졌다.

저 애도 애지만, 로블레는 배를 잡고 웃는 로히카가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로히카 세드로가 이렇게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었나? 아니다, 로히카의 웃음은 언제나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애가 마냥 예쁘다는 듯 격 없이 굴고 있다.


“아, 정말 귀엽게시리. 저게 왜 저 모양이 됐지?”

로히카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애를 특별하게 여기는 건 분명했다.

상황이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앞세울 상황은 아니었다. 로블레는 이 공간에서 한시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을 뒷전에 둔 로히카에게 조심히 물었다.


“저를 왜 부르신 건가요?”

“아, 쟤한테 보여 주려고. 이제 가도 돼.”

단지 보여 주려고 불렀다니,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취급이었다.

그러나 이 처우에 모멸감을 느끼기에 로블레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가도 된다는 말에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둘러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뒤, 로블레는 그 소녀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달 전에 탑주님께서 직접 데려온 아이입니다.”

탑의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시종을 통해서였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정말 신비합니다. 그래서 탑주님께서도 관심을 두고 계신데, 문제는 그 애가 틈만 나면 반항하는 골칫거리라는 점입니다.”

“골칫거리?”

로블레는 마치 모르는 단어를 따라 하듯 중얼댔다.

골칫거리라니, 그건 로히카 세드로와 양립할 수 없는 말이다. 로히카에게 무언가를 길들이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로블레는 직접 겪어 알고 있었다.


‘로히카가 방치하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하에 갇힌 아이의 반항이 두 달이나 이어질 리 없다.


‘왜지?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길들지 않으면 쓸모가…….’

무심코 생각하던 로블레는 깜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길들이다니, 쓸모라니. 로블레는 자신의 발상에 몸서리치며 경악했다.

지난 5년, 로블레는 지하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그러나 아무리 밝은 곳에 있어도 그것의 존재감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그에게서 단 한 순간도 멀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성녀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지하에 갇힌 소녀들의 고요한 희생으로 성립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계속 의식하면 미칠 것 같아 부단히 무시했는데, 이 얄팍한 회피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로블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탑의 사고방식에 물들고 있었다.

로블레는 그걸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래서 뇌리에 박힌 지하의 일들을 다급히 떨쳐냈다.


‘로히카가 무슨 변덕을 부리든 오래 가진 않을 거야. 그 애도 곧 길들겠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로블레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소녀에 대한 것을 잊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로블레의 바람과 달리 그 소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정확히 3년 후, 처음보다 더 충격적인 모습으로 로블레의 인생에 난입했다.

***

그날은 로블레가 성녀로서 78회째 정화식을 여는 날이었다.

탑의 실체를 막 알게 되었을 때, 로블레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 가책도 8년째에 접어드니 무뎌질 대로 무뎌져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내고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것만 끝내면 앞으로 스물두 번…….’

로블레는 탑의 테라스를 드문드문 채운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댔다.

성녀의 임기는 100회의 정화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명예롭게 종결된다. 그러니 이제 반의반도 남지 않은 셈인데, 로블레는 임기의 끝이 다가올수록 홀가분하기는커녕 새로운 압박에 시달렸다.


‘새로운 성녀도 나를 경멸하겠지.’

내 임기가 끝나고 차기 성녀가 발탁되면, 그 아이도 탑의 지하에 초대될 거다. 그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전대 성녀들에게 환멸을 느끼겠지. 고결한 가면을 쓰고 노예를 유인하는 탑의 부역자에게.

겨우 견뎠는데 또 이런 두려움에 시달려야 한다니.

로블레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전대 성녀들을 원망하다가,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좌절했다.

그 역시 자신을 따라 성녀가 되겠다고 말하는 소중한 동생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애가 자신처럼 좌절하는 것도, 자신의 비겁함을 알게 되는 것도 못 견디게 괴롭지만 로블레에겐 힘이 없었다.

투하 가의 가장 큰 어른은 전대 성녀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라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 역경을 이겨 내 투하의 이름을 높인 것처럼 가문의 어린 딸들도 그렇게 해 주기를, 그래서 투하의 내일도 찬란하기를, 자신의 여생에 부족함이 없기를.

고결한 성녀인 로블레 투하에게는 이런 가문의 압박조차 이겨 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성녀도 지하에 갇힌 소녀들과 같은 신세였다. 예쁜 것에 묶인 보기 좋은 노예.

그나마 위안은 저 지하의 애들보다는 형편이 좋다는 것.

귀족이어서 수명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비겁의 대가로 우아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선택의 여지 없이 밟히는 쪽이 아니라 미안한 척하며 밟고 올라서는 쪽이라는 것.

로블레는 이 모든 게 역겨웠지만, 잘 길든 성녀답게 내색하지 않고 푸른 호수를 향해 웃었다.

그러곤 용의 노랫소리를 흉내 내려 입을 열 때였다.

어디선가 울려 퍼진 목소리가 성녀의 노래를 가로챘다.

귀에 또렷이 박히는 노랫소리에 숨을 마시던 로블레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은 곳, 탑 중간에 창밖으로 몸을 내민 소녀가 보였다.


“뭐야, 저건?”

그 소녀는 검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수수한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웬 정신 나간 하인이 정화식을 방해하는 줄 알고 웅성댔다.

하지만 그들의 의문과 불평은 다음 순간 지워졌다.

그 소녀가 목소리를 높이며 믿기 어려운 음색을 토해 냈기 때문이다.

그 압도적인 목소리에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정화자들도 넋을 잃은 채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로블레는 저 소녀의 정체를 홀로 깨닫고 기함했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로블레는 저 소녀가 지하에서 탈출한 아이라고 확신했다. 저토록 소름 끼치게 노래할 수 있는 건 지하에 갇힌 소녀들뿐이었다.

더없이 난감한 상황인데, 로블레는 어쩐지 움직일 수 없었다. 소녀의 노래가 제멋대로 파고들어 성녀에게서 초조함을 빼앗았다. 그래서 상황을 아는 성녀조차도 저 노랫소리에 속절없이 매료되었다.

소녀의 노래가 듣는 이를 부드럽게 압도했다.

그래서 다들 마음 편히 귀를 기울이는데, 어느 순간 소녀의 음색이 높아지며 그들의 호흡을 훔쳤다. 굴복을 요구하는 노래에 귀족들이 장갑과 옷자락을 말아쥐었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이어 잔잔하던 호수의 수면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놀라서 흔들리는 호수와 바람에 휩싸인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소녀의 노래에 화답하듯 대기가 움직였다. 마치 세상이 저 소녀를 특별히 아껴 직접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저거……!”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찬란한 물빛으로 밝아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대 성녀의 기적.

어린 시절 읽던 신화의 한 장면이 낡은 책장을 찢고 현실로 도래했다.

참다못한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녀를 더 잘 보려고 발을 돋웠다. 정화자들은 정녕 믿기지 않은 노래에 하얗게 질렸고, 성녀인 로블레는 막연히 울고 싶어졌다.

그들은 세상과 별리된 채 노래하는 소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영원인지 찰나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을 채우던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감히 움직이는 자도 없었다. 그들은 충격에 휩싸여 침묵으로 저 소녀를 경배했다.

그러자 노래를 마친 소녀가 창밖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그건 길게 나풀대는 끈, 리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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