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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이비도 그중 하나였다 (56/129)


56화. 이비도 그중 하나였다
2022.12.12.


고귀한 마냐냐 탑에는 지하가 있다.

그 지하의 존재를 아는 건 세드로와 역대 성녀들 뿐.

별로 특별하지 않은 그 실체에 아득히 절망하는 건 성녀가 된 자들의 공통된 숙명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걸 숨기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로블레 투하는 이 지극한 기만에 분노하는 성녀였다.

보기 드물게 용감한 그 성녀님은 자신이 마주한 탑의 실체에 저항했다.


“나는 인정 못 해, 어떻게 이런……!”

“그래? 그럼 네가 구해 봐.”

하지만 그에 되돌아온 건 탑주가 된 친구의 조롱이었다.


“네가 저 애들을 대신할 수 있다면 저 불쌍한 애들은 전부 놔줄게. 하지만 실패하면 입 다물고 착하게 지내는 거야, 다른 성녀들처럼.”

로히카가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로블레는 그 목소리에 넘어갔던 걸 지금도 후회했다.

끝까지 싸울 힘이 없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굴복하는 게 나았을 텐데.

미련하게 나서서 오히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일을, 그 성녀는 여전히 후회했다.

***

9년 전, 비스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마냐냐가 유례없이 침묵하며 정화가 멈추었기 때문이다.


“제발요, 마냐냐 님. 제발 들어주세요…….”

어둠이 내린 밤, 홀로 탑의 성소를 찾은 성녀, 로블레가 호수를 향해 간절히 속삭였다.

새로운 성녀가 탄생한 지도 어느덧 반년. 그 긴 시간 동안 티엔다의 호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정화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호수의 수문이 열리지 않아 비스의 강과 우물은 진흙탕이 되어 바닥을 드러냈고, 티엔다의 귀족들마저 갈증을 호소했다.

지난달, 참다못한 귀족들이 탑을 종용해 정화되지 않은 물을 비스로 흘려보냈다.

그 짠물에 초목이 시들고 사람과 동물이 병들었지만, 다행히 티엔다의 귀족들은 비스에서 걸러내고 끓여서 만든 담수를 다시 사들여 적게나마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 끔찍한 갈증에 불만이 커지며 결국 모든 비난이 성녀에게로 향했다.

성녀를 잘못 뽑아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모두가 한 사람을 탓했다.

그 빗발치는 원성을 홀로 감내하며, 성녀는 매일 울며 노래했다.

저 깊은 곳에 잠든 야속한 용을 향해서,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어린 동생이 먼발치서 지켜보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저 간절히 자비를 구했다.

리오는 그런 언니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했다.

안타깝고, 고결하고, 성스러운 그 뒷모습을.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비 아리아테의 모든 것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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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라 후작님을 모함한 게 정말 당신인가요?”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이비를 빈방으로 끌고 온 리오가 문간에서 곧장 쏘아붙였다.


“아니요.”

그래서 이비는 티 없이 맑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리오의 얼굴에 일순 의심이 스쳤고, 그런 리오에게 이비가 솔직히 덧붙였다.


“모함했다기보단 그냥 있는 사실을 밝힌 거예요. 거기 발등을 찍힌 건 자업자득이니 제 탓은 결코 아닐 거예요.”

“당신……!”

이비의 뻔뻔하고도 해맑은 자백에 리오가 경악했다.


“당신, 미쳤어요?”

어제오늘 참 자주 듣는 말이다. 이비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정신이에요.”

“웃기지 말아요, 제정신으로 어떻게 그런 짓을……! 당신이 정말 성녀가 될 자격이 있어요!?”

“자격이라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해요. 성녀의 역할이 물을 정화하는 거라면요.”

이비의 당당한 대답에 리오는 말문이 막힌 듯 이비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비도 이참에 이 까탈스러운 아가씨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그보다 환한 빛깔의 눈동자. 진한 눈썹, 둥근 눈매.

리오는 정말 언니를 많이 닮았다. 그러나 온 세상을 포용할 것 같은 분위기의 성녀와 달리, 리오는 인상부터 예민하고 완고했다.

자매인데 성격은 정반대일 수도 있구나, 이비는 이렇게 생각하다 몰래 실소했다.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성녀 역시 리오처럼 깐깐하고 고지식한 인물인데 부단히 연기를 하고 있을지도.

애당초 탑의 성녀란 온 세상을 속이는 직업이니까.


“투하 양에겐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요?”

“뭐라고요?”

“대공님에 이어 후작님까지 투하 양을 지지하기로 했으니, 어쩌면 투하 양이 성녀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물론 절대 그렇게 두진 않을 거지만.

이비는 이 뒷말을 삼키고 말갛게 웃었다.

이비는 모처럼 힘내 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리오는 오히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리오가 모욕당한 사람처럼 질색했다. 그래서 이비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댔다.


“이런 생각 안 하세요?”

“안 해요!”

“그럼 왜 보자고 한 거예요?”

리오 투하가 분위기를 잡고 보자고 해서 이비는 당연히 이런 대사를 상상했다.

후작님도 이제 내 편이니 알아서 주제 파악하세요, 이 천민!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리오는 다만 못마땅하다는 듯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의 행실 때문이잖아요! 성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세요, 성녀 자리는 그렇게 우습게 만들어도 되는 자리가 아니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정체불명의 훈계에 이비가 눈을 깜빡이자, 리오가 또 한 번 버럭 소리쳤다.


“도대체가,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

“아니요, 안 해도 돼요. 그리고 투하 양이 추구하는 성녀다움이 있다면 본인이 성녀가 돼서 하세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요.”

어리둥절한 와중인데도 질문을 받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주는 이비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서 잘 꺼내 놓았고, 그래서 이비는 슬슬 이 저주가 편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리오는 이비가 태연히 따지는 모습에 놀란 듯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로 눈썹을 곤두세우며 따져 물었다.


“당신, 날 놀리는 건가요?”

“네, 놀리고 있어요.”

“뭐라고요!?”

“놀리는 거 맞아요. 투하 양을 대할 땐 항상 놀리는 마음이었어요.”

아니, 취소.

이 저주는 역시 망했다. 아무리 솔직해지기로 했다고 한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깝죽댈 필요까지는 없었다.

의도치 않게 도발해 버린 이비는 아차 하며 리오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리오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니, 내 말은…….”

“당신,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솔직히 우습긴 해요.”

변명하려고 했는데, 저주가 이비의 인성을 또 한 번 훌륭하게 파탄 냈다.


“이……!”

그리고 연이은 모욕에 리오가 결국 손을 치켜들었다.

콰앙!

이비가 반응할 겨를도 없이 리오의 단단한 손이 이비의 머리 옆을 지나치며 벽을 내리찍었다.

그래서 이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콰앙?’

손으로 벽을 쳤는데 왜 그런 소리가 나는 거야? 손은 살이잖아. 말랑말랑한 거잖아.

이비는 얼이 빠져 자신의 머리 옆에 놓인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여태 데면데면하게 지내느라 티타임 한 번 함께해 본 적 없는 이 영애님의 손은 이비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듬직했다.

그래서 이비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스산하게 내려다보는 리오를 올려다보았다.

엄청난 위기감과 함께 아르코 영식의 목소리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투하 양은 말이죠, 우리 큰 누님이 눈독 들이는 인재예요. 아마 정화자로 활동하는 기간이 끝나면 입대를 권유할지도 몰라요.

그 말을 뒤늦게 떠올린 이비는 창백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아, 뭐야. 평범하게 위험한 인간이잖아!’

툭하면 바르르 떨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리오 투하가 비범한 기골을 가진 영애임을.


 
싸우면 무조건 지고 맞으면 반드시 피를 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비가 바짝 쫄아 있는데, 몰래 재우고 도망칠까 하는 생각마저 하는데, 리오가 으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나까지 이름뿐인 성녀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우리 언니를 밀어낸 걸로 모자라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이 노래하는 자리가 원래 누구 자리인데, 언니가 누구 때문에 베일을 쓰고 다니는데!”

리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래서 이비는 리오 투하가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비로소 깨달았다.

리오의 말대로 정화식 때 이비가 노래하는 맨 앞자리는 원래 성녀의 자리였다. 그러나 이비가 등장하며 성녀는 그 자리를 자연스레 빼앗겼고, 이후 두꺼운 베일을 쓰고 다니며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리오도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비가 언니의 모든 것을 부숴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언니는 마냐냐가 침묵할 때 모두의 비난을 감수하고 홀로 발버둥 치던 고결한 성녀님이었다.

그런데 이비 아리아테가 그런 언니를 우습게 만들었다.

언니가 안간힘을 쓰며 매달리던 일을 손쉽게 해내고 별거 아니라는 듯 겸양을 떨어 성녀인 로블레 투하를 영영 매장했다.

그래 놓고 생글대며 사교계를 누비는 이비가, 역대 성녀들의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비웃으며 자신의 특별함을 전시하는 이비 아리아테가 리오는 정말 죽도록 얄미웠다.


“잘난 척 적당히 해요. 운 좋게 선택받은 주제에, 그저 운이 좋은 게 전부인 주제에! 대체 왜 하필 당신 같은 사람이……!”

리오는 제 분을 못 이겨 소리치다가 말을 뚝 멈췄다. 이 뒷말까지 해 버리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중에 멈춰 본들, 이비는 이미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얼떨떨해졌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리오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

하지만 저 리오 투하의 입에서 ‘왜 하필 너야’ 같은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공교로운 상황에 이비는 과거로 끌려갔다.

9년 전이었다. 이비는 비스에 내려온 성녀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었다.

아, 왜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까?

그런데 지금은 그것과 같은 말을 오히려 듣고 있다. 9년 전, 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저 리오 투하에게.

이비는 이 사실이 그리 통쾌하지 않았다. 도리어 황당스러웠다. 네가 이것마저 부러워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냐 싶었다.


“성녀님이 그러시던가요? 내가 자리를 뺏어서 베일을 썼다고.”

“언니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요!”

“그럼 이참에 한번 물어보세요. 내가 성녀님의 자리를 빼앗은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이비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곤 차분히 리오의 팔 안에서 빠져나왔다.

리오는 이비를 싫어했다. 언니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비도 딱 그만큼 리오를 싫어했다. 역시나 그의 언니 때문이었다.

이비는 차라리 리오 투하가 성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탑의 지하를 보게 된 후에도, 과연 저렇게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 언니처럼 당연하다는 듯 적응해 버릴지도.

고결한 마냐냐 탑에는 지하가 있다.

그리고 그 지하에는 귀족들이 성녀이니 정화자니 하며 명예를 나눠 갖고 노는 동안, 수명을 바쳐서 노래하는 어린 소녀들이 있다.

이비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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