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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17/129)


17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2022.07.28.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지역에 있는 동안엔 신분을 숨겨야 합니다.”

디에스가 능숙한 칼질로 이비의 스테이크를 조각내며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위로 알려지면 괜한 의심을 살 겁니다. 최악의 경우 이비 님의 현재 상황을 들킬 수도 있고요. 그러니 신분을 숨기는 건 물론이고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비스의 치안은 티엔다처럼 질서정연하지 않으니까요.”

디에스가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곳은 비스 남동부의 어느 소도시, 거기서 그나마 세련된 레스토랑이었다.

이비는 그 가게의 2층 창가 자리에서 집사의 칼질을 구경하다가, 그의 과한 당부에 코웃음을 쳤다.

비스의 거리 출신인 내 앞에서 비스의 치안을 논하다니.

지금 날 뭐로 보고 그런 기초적인 얘길 하냐는 의미였다.

이비가 참으로 가소롭다는 얼굴로 입을 열 때였다.

돌연 창밖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의 가판이 엎어지며 채소 따위가 널브러지고 고성이 오갔다.

덕분에 이비는 여기가 비스인 것을 새삼 실감했다.

비좁은 거리와 허름한 가판과 왁자지껄한 북새통에 더해 난동을 부리는 취객이라니. 티엔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비는 저 비스적 상황이 나름 신선하고 반가웠다.

그래서 잠시 지켜보는데, 가판을 뒤집던 사내가 이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야! 뭘 봐?”

“당신의 후안무치한 꼬라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비도 똑같이 버럭 소리쳤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예쁘장한 소녀의 반격에 깽판을 치던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듯 주춤하더니, 곧 얼굴이 시뻘게져서 다시 소리쳤다.


“저런, 미친! 너 죽고 싶어?!”

“아니!”

이비의 빠른 대답에 남자가 격분하며 레스토랑으로 달려들었다.

물론 그 남자는 입구에서 제지되었다. 하지만 실랑이가 이어지는 바람에 분위기 좋던 레스토랑은 무척이나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얼토당토한 소란이 벌어지자 레스토랑의 사람들이 이비를 힐끗댔다.

그래서 이비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고, 한없이 작아진 이비를 위해 디에스가 앞서 한 말을 친절히 반복했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비스의 치안은 티엔다처럼 질서정연하지 않으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혹시 몰라서 귀마개도 가져왔어요. 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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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없이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마차를 잡았다.

저주를 풀기 위해 조력자와 만나기로 한 이 도시에서 이비가 살던 작은 마을까지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이비가 귀마개를 빼며 물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걸린대요?”

“세 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다행히 별로 멀지 않은데, 다만 돌아오는 일정이 좀 애매합니다.”

“아, 내일이죠. 그믐밤이.”

이비가 날짜를 헤아리며 말했다.

급하게 내려온 탓에 하필 그믐밤과 일정이 겹치고 말았다.

비스의 그믐밤은 용의 저주가 찾아오는 밤.

그 잔인한 재앙을 피하고자 사람들이 몸을 잔뜩 사리는 밤이다.

그래서 비스에서는 그믐밤의 초저녁부터 다들 외출을 삼갔고, 그건 손님을 태우고 멀리까지 다니는 마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맞습니다. 이 지역 마부들은 삭월이 뜨는 날엔 아예 일을 쉬거나 오전까지만 이동한다고 합니다.”

도시 안을 돌아다니는 마차와 달리 도시와 도시를 건너는 마차는 온갖 사고를 겪는다.

소소하게는 마차의 바퀴가 진창에 빠지는 것부터, 대수롭게는 노상강도를 만나는 일까지.

별별 이유로 도시 밖의 길이나 숲에서 발이 묶이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장거리 마차의 마부들은 그믐이 가까워지면 누구보다 보수적으로 행동했다. 도시 밖에서 저주를 마주치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저주를 피해야 해서 돌아오는 일정은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 그것도 아니면 아예 삭월이 진 후 새벽에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확실히 애매하네요.”

만약 오늘 밤에나 내일 아침 돌아오는 일정이면 이비가 살던 마을에는 고작 반나절밖에 머물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믐밤을 보내고 출발하면 조력자와 만나기로 한 약속에 늦을 수도 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해요. 별로 오래 있을 필요 없어요. 그냥, 시간이 남아서 가 보는 거니까요.”

이비는 별문제 아니라는 듯 쉽게 말했다. 하지만 디에스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닌 걸 눈치챘다.

말은 시간이 남아서 가는 거라고 하지만, 이비는 확실히 들떠 있었다.

매사 통달한 것처럼 뻔뻔하게 구는 이비가 이렇게 눈을 빛내는 모습은 디에스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비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혹시 지금 둘러보려는 곳이 그 점성술사라는 자와 같이 살던 집입니까?”

“맞아요.”

이비는 저주 때문에 솔직히 대답했고, 덕분에 꽤 민망해졌다.

이비는 간절함을 드러내는 게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구구절절한 옛날이야기도 싫어했다.

하지만 다 들킨 마당에 딴청을 피우면 그게 더 우스울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거기서 2년 정도 살았어요. 그때가 비스에서는 그나마 잘 지낸 기간이라 왠지 가 보고 싶더라고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이비는 점성술사와 함께 지낸 그 시기를 생애 가장 따뜻했던 순간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걸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는 건, 그 꿈같은 나날이 잘라 내듯 가혹하게 끝나 버린 탓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선 왜 나오신 거죠?”

“점성술사가 떠나서요. ……저기요, 괜한 질문이 좀 많지 않아요?”

디에스가 내친김에 더 캐묻자, 이비는 마지못해 대답하고 집사를 타박했다.

이비는 이 화제가 썩 달갑지 않았다.

점성술사는 어느 날 이비를 찾아온 사람이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던 이비의 곁에 있어 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의심 많고 사납던 이비를 아무 대가 없이 아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다 이비가 마음을 열었을 때 홀연히 떠나 버렸다. 제발 가지 말라고 애원하던 어린 이비를 뿌리치고.

이비에게 그 남자는 구원자이자 배신자였다.

찾지 못해 일부러 잊은 서러움이었고, 그럼에도 사라진 적 없는 그리움이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나도 그 집에 더 있을 수가 없었어요. 집주인이 나가라고 한 건 아니지만, 좀 그렇잖아요. 그래도 처음 한 달은 그 사람이 돌아올까 봐 그 집에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찾아 나섰다가 영영 못 돌아가게 된 거예요.”

이비는 이미 다 지난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행히 디에스는 더 묻지 않았고, 이비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아까 디에스에게 한 말을 일부러 되뇌었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가 보는 것뿐이야. 단지 궁금할 뿐이야. 그게 다야.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분명 실망할 테니 기대를 꺾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이비의 가슴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고, 이비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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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은 새싹이 파랗게 올라온 호밀밭을 끼고 있었다.

초록빛 호밀이 바람에 눕고 서길 반복하는 너른 들판 너머 아담한 마을의 입구가 보였다.

그 마을은 아까 이비와 디에스가 들른 도시와 달리 무척 한적했다.

길에서 마주친 마을 사람들의 표정으로 보아, 이렇게 장거리 마차가 찾아오는 일조차 드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티엔다 귀족들이 입는 케이프를 벗고 아까 디에스가 사 온 코트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귀마개까지 한 후 마차에서 내렸지만,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비는 그들을 뒤로한 채 기억을 더듬어 한때 자신이 살던 집으로 찾아갔다.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은 헤맬 줄 알았는데, 기억은 놀랍도록 선명했고 이 마을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비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예쁜 울타리와 녹색 지붕이 있는 그 이층집을.


“여기인가요?”

디에스가 물었지만 이비는 귀마개를 한 탓에 듣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다만 눈으로 그 집의 외관을 하염없이 훑었다.

이 집도 그때 그대로였다. 울타리를 새로 칠한 것 외엔 다 똑같았다. 아직도 그 부인이 세를 놓고 있을까?

그때 그 집에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꽤 어른티가 나는 소년부터 열 살 남짓한 꼬마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이었다. 다만 생김새가 형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외부인인 이비와 디에스를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금방 관심을 끊고 저들끼리 와글와글 떠들었다.

그러더니 돌연 크게 소리쳤다.


“야, 공은?”

“아, 맞다. 선생님!”

아이의 큰 목소리는 귀마개로도 막을 수 없었다.


‘선생님?’

그래서 이비는 의아한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공 좀 던져 주세요!”

“선생님!”

아이들이 2층 창문에 대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길 한참, 덜컹 소리와 함께 창문이 밖으로 열렸다.

다행히 아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렸는지, 창가로 나온 남자는 손에 공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아이들에게 순순히 공을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하늘 저편으로 있는 힘껏 공을 던져 버렸다.


“으악! 선생님, 뭐예요!”

“아, 진짜 성격!”

아이들이 멀리 날아가는 공을 보며 원성을 토했다. 그러곤 헐레벌떡 공을 쫓아갔다.


‘뭐야…….’

이비는 꽤 기가 막혔다.

아이들의 태도로 보아 저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따위로 행동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닌 것 같았다.

이비는 황당해서 아이들을 달리게 만든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크게 당황했다.


‘어……?’

창가에 선 그 남자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안경 뒤에 놓인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겼다.

어느 정도로 잘생겼냐면, 라우렐 백작과 똑같이 생긴 정도로 잘생겼다.

게다가 하필이면 머리카락 색도 백작처럼 화사한 금발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혼란에 빠졌다.

왜지? 왜 저 사람이 시온 라우렐의 얼굴을 하고 있지? 그냥 닮은 사람인가? 착각인가? 꿈인가?

이비가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느긋이 감상하던 남자가 뒤늦게 자길 쳐다보는 이비를 발견했다.


 
남자는 이비를 보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

이비는 더 고민하지 않고 집 안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방문이 잠기기 전에 저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올라가 노크도 없이 문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문은 바로 열렸다. 그래서 이비의 눈앞엔 몹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한때 점성술사가 쓰던 방, 그래서 구조도 채광도 익숙한 그 방에 시온 라우렐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놀라기보다는 난감한 얼굴로 이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이 움직였다. 귀마개 때문에 들리진 않았지만, 얼추 입 모양을 보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야말로 묻고 싶어졌다.

한때 내가 살던 집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 남자가 하필이면 시온 라우렐과 똑같이 생긴 이 상황을, 내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고.

심지어 그 남자는 라우렐 백작과 똑같이 생긴 주제에 이비를 처음 보는 양 생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살며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그 남자의 허벅지 부근에 놓인 손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는 맨손이었고, 그 손을 본 이비는 이내 홀가분히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했나 봐요. 실례 많았습니다.”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러곤 계단을 내려가며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저 남자의 손은 곱상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상처가 가득했다.

최근에 생긴 듯 아직 붉은 상처도 있고, 오래되어 하얗게 흔적만 남은 상처도 있었다.

또 개중엔 이비가 형태를 또렷이 기억하는 상처도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저 남자가 시온 라우렐인 것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불변의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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