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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타르데스의 따님들 (16/129)


16화. 타르데스의 따님들
2022.07.25.


어린 이비가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확인한 건, 티엔다에서 오신 성녀님을 통해서였다.

어느 날 이비가 살던 도시까지 성녀님께서 찾아오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녀님을 보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고, 지붕 없는 마차에 탄 성녀님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 이비도 대중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이비는 자애로운 성녀님이 아니라, 그 옆에 앉은 여자애를 보고 있었다.

이비와 또래로 보이는 그 애는 성녀님처럼 티엔다에서 온 것 같았다.

성녀님과 꽤 닮은 얼굴이었는데, 무척 좋은 옷을 입고 성녀님 옆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고 있었다.

어째선지 이비는 성녀님보다 그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내리꽂힌 어떤 의문이 이비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저 애는 왜 저렇게 나와 다른 걸까?

그 왁자한 거리에서 이비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항상 애쓰는데, 저 애는 왜 저렇게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있는 걸까?

날 보면 쫓아내기 바빴던 어른들이 왜 저 애한테는 먼저 인사하며 착한 사람처럼 구는 걸까?

순전한 의문이 이비를 사로잡았고, 이비는 성녀님의 행차가 끝날 즈음에야 겨우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나와 같은 나이의 여자애도 저렇게 중요하게 대해질 수 있구나.

다만 그게 내가 아닐 뿐.

저 애는 굶어 본 적이 있을까? 길에서 잠들어 본 적은, 구걸이나 도둑질을 해 본 적은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왜?

내가 저 애가 아닌 것처럼, 저 애도 내가 아니니까.

저 애는 나와 다르니까. 왜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니까.

빈민가의 고아들은 철이 들면 이런 운명을 자연스럽게 깨우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비는 오히려 새로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정말 이상하다.

사람이 다 다르게 태어나서 다 다른 삶을 산다면, 왜 하필 내가 여기고 네가 거기일까?

왜 하필, 내가 불행한 쪽인 걸까?

이비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 순간의 모든 것이 뇌리에 박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이따금 떠올랐다.

그건 열두 살이던 이비가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쪽이다! 갈라져서 쫓아!”

사내들의 고성과 욕설.

큰 개가 마구 짖는 소리.

돌바닥을 두드리며 쫓아오는 무수한 발소리.

이비는 그 모든 소리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와중에도 생각했다.

아. 나와 다른 너는, 과연 이런 순간을 상상이라도 해 본 적이 있을까?

골목에서 빠져나온 이비는 무너진 담벼락을 발견하고 그 비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여기만 지나면 돼. 여기만 지나면 못 쫓아 올 거야.


“아!”

그런데 무언가가 이비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사내들과 이비를 쫓던 사냥개였다.

이비는 아파할 겨를도 없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것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그사이 쫓아온 사내가 이비를 담벼락 사이에서 끌어냈다.


“와, 이 지독한 녀석. 겨우 잡았네.”

“이거 놔!”

사내는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더니, 이비에게 옆구리를 차이자 표정이 대번에 험해졌다.


“이런, 씨……!”

사내가 이비를 내리쳤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그때 이비가 느낀 건 아픔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그 세찬 충격에 어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마치 몸과 정신이 따로 분리된 것처럼, 바닥에 웅크려 얻어맞는 사람이 내가 아닌 것 같아졌다.

그래서 이비는 이름 없는 구경꾼이 되어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가만히 구경했다.


“야, 적당히 해!”

그때 다른 사내가 외쳤다.

순간 이비는 그 기묘한 감각에서 잠시나마 깨어났다.


“뼈라도 부러지면 골치 아프다고. 애써 잡은 걸 왜 못쓰게 만들어?”

하지만 사내의 이어진 말에, 이비는 실소하며 다시 그 나른함 속으로 돌아갔다.

그럼 그렇지.

모든 게 우습게 느껴졌다. 기분은 왠지 너풀너풀 가벼웠다.

몸은 여기 붙잡혀 꼼짝도 못 하는 신세인데, 마음은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이제 눈을 뜨면 나는 철창 속에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왜 하필 나일까?

계속 이런 식이면, 차라리 나를 그만두는 게 나을까?

이비가 멍하니 생각할 때였다.

아득하던 이비의 귓전에 생경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

사내들이 자지러지는 소리.

그리고 개들이 깨갱거리는 소리.

이비는 그 소리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을 안아 드는 손길의 다정함 역시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다시 깨어났을 때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비현실적으로 포근한 침대에 누워, 거짓말처럼 상냥한 점성술사와 마주한 현실을.

.
.
.

그렇게 구사일생의 추억이 생긴 지 어언 8년.

이비는 또 한 번의 회생을 위해, 티엔다의 바람 언덕에서 파충류인 날짐승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지, 집사, 여기 좀 어떻게 해 줘요……!”

이비가 답지 않게 질겁하며 말했다.

지금 이비가 있는 곳은 티엔다의 서쪽 끝 벼랑.

바람이 쉴새 없이 불어오는 그 푸르른 언덕에서, 외출복 차림의 이비는 자기 앞에서 기웃대는 새빨간 용 때문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용은 말보다 두 배 정도 컸다. 그리고 석양처럼 선명한 홍색 비늘을 가지런히 덮어쓰고 있었다.

이비가 그 용의 눈치를 보며 뻣뻣하게 굳어 있자 디에스가 말했다.


“그렇게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알잖아요, 나 개한테 물린 적 있는 거.”

“그 발언은 타르데스의 따님들께 실례죠…….”

디에스가 목소리를 낮춰 핀잔하자 이비도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힐끗 눈을 돌려 풀밭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용들을 바라보았다.

티엔다비스에서는 저 붉은 용들을 ‘타르데스의 따님’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저들이 깊은 상처를 입어 은신 중인 황혼의 용 타르데스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타르데스는 마냐냐처럼 세상의 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마냐냐가 티엔다비스를 위해 해수를 정화한다면, 그 물을 까마득한 바다에서 퍼 올리는 것이 바로 대기를 움직이는 타르데스였다.

하지만 노체와의 전쟁 후 깊은 상처를 입어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타르데스는 자신을 대신할 존재를 만들어 보내 주었다.

그게 바로 저 작은 용들, 타르데스의 따님들이다.

타르데스의 따님들은 어머니를 대신해 대기를 안정시키고 바닷물을 끌어 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티엔다와 비스를 오갈 수 있게 등에 태워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가축처럼 길들이거나 소유하려 드는 건 금물이었다.

본디 용이란 인간을 돌보는 신성하고 지혜로운 존재.

바로 그런 존재의 분신이니 사람들은 타르데스의 따님도 마땅히 존중해야 했다.

설령 그분이 아까부터 사람을 향해 코를 킁킁대며 집요하게 기웃대더라도 말이다.


“그럼 잠깐 계십시오, 우릴 태워 줄 분을 찾아오겠습니다.”

디에스는 난처해하는 이비를 뒤로하고 들판에 앉은 용들에게 다가갔다.

타르데스의 따님을 타려면 먼저 정중히 도움을 청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로써 따님 한 분과 단둘이 남은 이비는 쩔쩔매며 대화를 시작했다.


“저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왜 이렇게 저한테……. 아, 설마…….”

따님의 관심에 부담스러워하던 이비는 자기 주머니에 뭐가 있는지 뒤늦게 떠올렸다.

그건 커다란 초콜릿 쿠키. 비스에 가려면 왠지 비상식량도 필요할 것 같아 무심결에 챙겨 온 것이었다.

이비가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자 타르데스의 따님이 눈을 빛냈다. 그래서 이비는 주저하며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저, 이거 드시겠어요?”

이비가 권하기 무섭게 용은 그 쿠키를 한입에 덥석 먹어 치웠다.

그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디에스가 뒤늦게 제지했다.


“이비 님, 그러면 안 됩니다.”

“앗, 쿠키 같은 거 주면 안 되는 거예요?”

“아뇨, 한 분만 드리면 다른 분들이 항의합니다.”

“히익!”

디에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쿠키를 본 타르데스의 딸들이 이비에게 몰려왔다.

그러더니 내게도 내놓으라는 듯 주둥이로 이비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앗, 이러지 마세요. 이제 없어요. 아얏…….”

따님 중에는 날개로 바닥을 탕탕 치거나 앞발로 직접 이비의 주머니를 뒤지는 분도 계셨다.

이비는 안 그래도 무서운 용들이 자신을 에워싸자 거의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이비에게 쿠키를 받아먹은 따님이 자매들을 향해 포효했다.

이비나 디에스에겐 들리지 않는 호통에 이비를 괴롭히던 용들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리고 그 한 분의 따님은 디에스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엎드렸다.


“우릴 태워 주시려나 봅니다.”

쿠키에 대한 보답인지, 그 따님은 순순히 등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챙겨온 안장을 그 위에 조심히 얹었다.

고삐까지 물리고서 이비와 디에스는 함께 따님의 등에 올라탔다.

그 붉은 용은 곧장 언덕을 내달려 벼랑 끝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덩달아 추락하게 된 이비는 심장이 위로 쏠리는 기분을 느꼈다.

참다못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용이 날개를 치며 비상했다.

그로써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된 이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한참이나 멀어진 티엔다가 한눈에 보였다.

그 크고도 작은 대륙은 비스로 떨어트리는 큰 물줄기와 물보라 때문에 군데군데 무지개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비는 티엔다를 한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끝없이 펼쳐진 대륙이 눈에 들어왔다. 비스였다.

이 얼마만의 비스인지.

저 밉고도 그리운 세계와 재회한 이비는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겨를은 없었다.

이비와 디에스를 태우고 순조롭게 하강하던 타르데스의 따님이 돌연 허공에서 우뚝 멈췄기 때문이다.

그 따님은 느긋하게 날갯짓하며 허공에 머물렀고, 그 바람에 덩달아 공중에 묶인 디에스가 영문을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원래는 이대로 쭉 낙하해서 티엔다 바로 아래에 있는 바람 계곡에 이비와 디에스를 내려 줘야 정상이다.

그러나 따님은 아찔한 높이에 멈춘 채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비는 놀라서 안장을 붙잡았고, 디에스도 놀라서 앞에 앉은 이비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삐를 당겨도 따님은 고개를 저을 뿐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동에 거친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디에스가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혹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시려는 겁니까?”

디에스의 말이 맞는지 따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타르데스의 따님께서 친히 데려다주시겠다니,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래서 디에스는 쟬 필요 없이 곧장 목적지를 말했다.


“저희는 남동부로 가는 길입니다. 경계와 남부도시의 분기점까지 부탁드립니다.”

타르데스의 따님이 잘 알아들었다는 듯 날개를 크게 내리쳤다. 그러곤 쏜살처럼 빠르게 남동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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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데스의 따님은 마차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를 단 한 시간 만에 주파했다.

따님들이 바람 언덕과 바람 계곡 사이를 벗어나는 건 드문 일인데, 이비와 디에스는 쿠키 하나로 상당한 횡재를 한 셈이었다.


“덕분에 이동시간을 꽤 아꼈네요.”

디에스가 순식간에 도착한 남동부의 분기점에서 중얼댔다.

편하고 빠르게 온 건 좋지만, 어차피 조력자와 만나기로 한 날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일정 변동 없이 이 근방에서 묵으며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렇게 되면 이틀 정도 시간이 남는 거죠?”

“네, 사흘 후 아침까진 시간이 빕니다.”

“그럼 다른 도시에 다녀와도 돼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이비의 표정은 숨길 수 없이 간절했다.

사실 이비는 디에스의 조력자가 동남부로 오라고 했을 때부터 마음이 계속 술렁였다.

왜냐하면 동남부는, 이비가 점성술사를 만나고 그와 함께 지낸 지역이기 때문이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남동부 내에 있는 도시라면요.”

이비의 표정을 본 디에스는 이견 없이 따랐다.

그래서 이비는 기대를 억누르고 실망을 각오하며, 아픈 기억과 따뜻한 추억으로 뒤섞인 자신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상도 못 한 인물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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