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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얼마나 비밀일까요? (18/129)


18화. 얼마나 비밀일까요?
2022.08.01.


저건 분명 시온 라우렐이다.


‘나를 모르는 척했어.’

그건 지금 자기 꼴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의미.


‘백작이 이 변두리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니…….’

이비는 이 뜻밖의 비밀에 희열을 삼키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곤 집 밖에서 기다리던 디에스에게 속삭였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요.”

이비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는데, 돌연 디에스가 이비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돌아선 이비는 이층집의 뒤뜰에 있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중년과 노년 사이로 보이는 그 여인은 막 빨래를 널고 돌아온 참인지 빈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그 여인이 이비를 향해 놀란 얼굴로 중얼댔다.


“혹시 이비니?”

이비는 귀마개 때문에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줌마…….”

“세상에, 너 맞구나!”

여인이 바구니를 던지며 이비에게 달려왔다. 그러곤 주름진 손으로 이비를 덥석 붙잡았다.

이 여인은 이층집의 주인인 마르소 부인. 점성술사가 이비를 데리고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이비를 조카처럼 살뜰히 챙겨 준 사람이었다.

마르소 부인이 이비의 손을 잡고 여태 어디서 뭘 했냐며 질문을 퍼부었다.

그래서 이비는 난감해하다가 휘청 쓰러지는 편을 택했다.


“아앗…….”

거의 동시에 디에스가 이비를 잡아 주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많이 지쳤나 봅니다. 지금은 안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잠시 후 다시 찾아봬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쉬어요. 내가 레몬이라도 짜 올 테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짐이 마차에 있어서요.”

디에스의 완곡한 거부에 마르소 부인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시군요. 아, 혹시 오늘 저녁 식사는 어디서 할지 정하셨나요? 모처럼이니 내가 대접하고 싶은데…….”

부인이 이비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 표정만으로도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아, 이비는 디에스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저녁 시간에 맞춰 오겠습니다.”

디에스는 정중히 끄덕이고는 이비와 함께 돌아섰다.

이비는 여전히 어지러운 듯 디에스에게 몸을 기댄 채 걸었다.

그 상태로 이비가 디에스만 들리게 말했다.


“훌륭했어요.”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은 파렴치하게 속닥이며 유유히 걸어갔다.

하지만 순박한 마르소 부인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위, 2층 창가에도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그 남자는 집사에게 부축받는 이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무언가 불만인 듯,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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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지는 2년 정도 됐어요. 고마운 분이에요. 선생님 덕분에 그믐밤 피해가 많이 줄었거든요. 그런데 성격은 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한 달 중 보름은 딴 데 가는데, 돌아올 때마다 너덜너덜해요. 그리고 성격이 좀…….

―아무래도 용병이 아닌가 싶어. 여기서 조금만 가면 엄청나게 큰 투기장이 있거든. 그래서인지 성격이 좀…….

―애들한테는 글을 가르쳐 줘요. 애들이 따르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성격은 좀…….

디에스가 수집해 온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이비는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안심했어요. 라우렐 백작이 나한테만 나쁜 성격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이비는 백작의 성격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 밖의 이야기들도 하나같이 흥미로웠다.


“종합해 보면 이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2년 전 마을에 정착했고, 한 달 중 보름은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면 늘 상처투성이. 게다가 그믐밤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데 마을에 머무는 동안에는 애들한테 글을 가르친다는 거죠?”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에 돌아온 건 이틀 전이고, 평소보다 자리를 오래 비웠다고 합니다. 한 달 보름 동안이요.”

“그럴 수밖에요. 티엔다에 왔었으니까.”

잘도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에 이비의 미소가 짙어졌다.


“경계에 계셔야 할 분이 이런 곳에서 전원생활이라니. 대귀족들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하필이면 그 집이 나와 아저씨가 살던 곳이라니.

온갖 추측이 이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이비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하나에 집중했다.


“지금 이 상황이 백작에게 얼마나 비밀일까요?”

“협박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필요하다면요.”

이비는 부정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된 타인의 비밀을 약점으로 잡아 협박하다니, 분명 비열한 짓이다.

하지만 이비는 백작에 한해서는 비열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협박이 뭐 대수겠어요?”

이비는 해사하게 웃으며 백작의 만행을 곱씹었다.

좀이 아니라 대단히 성격 나쁜 그 남자는 돌봐주겠다는 말로 접근해 놓고 이비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잔혹하게 패대기쳤다.

백작이 귀족들을 종용해서 이비를 비난하게 만들었을 때, 이비는 정말 길거리로 끌려 나온 기분이었다.

그 비참함이 지금도 생생한데, 설마 여기서 백작을 만나다니.

이비는 마냥 거만하던 백작이 안경을 쓰고 부스스한 꼴로 서 있던 모습을 떠올리고 웃었다.

이건 분명 하늘이 이비에게 준 기회였다.

***

저녁이 되어, 이비는 약속대로 디에스와 함께 마르소 부인을 찾아갔다.

부인 역시 약속대로 식탁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숙녀가 다 됐구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서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마르소 부인이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은 이비를 정말 반가워했고, 그건 이비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소 부인은 이비의 기억에 몇 없는 친절한 어른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점성술사가 있어서 성립된 호의이지만, 어쨌든 그는 집주인으로서 어린 이비를 잘 챙겨 주었다.

그래서 이비도 부인과는 꽤 즐겁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이비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요즘도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 식사를 챙겨 주세요?”

“글쎄, 이걸 챙긴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구나. 지금 한 명이 사는데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서.”

“아, 그럼 다른 방은 비어 있는 거예요?”

“아니, 지금 사는 사람이 2층을 혼자 다 쓰고 있단다. 좀 유별난 것 같아.”

마르소 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면서 위층을 눈짓하는 걸로 보아, 그 유별난 세입자가 지금 위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별나다는 거야. 처음엔 방에 틀어박혀서 종일 책만 읽더니, 어느 날부터 애들한테 글을 가르치더라니까?”

부인의 말에 이비는 조용히 웃었다.

백작님께 독서 취미가 있으신 줄은 또 처음 알았다.


“아이들 때문에 활기차겠어요. 혹시 내일도 수업이 있나요?”

“아니, 내일은 없지. 그믐이잖니. 아이들도 각자 집에서 준비해야지.”

그럼 백작도 한가하겠다.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비가 넌지시 말했다.


“아줌마, 혹시 사흘 정도 방을 빌려도 될까요? 저희가 아직 묵을 곳을 못 정했거든요.”

“저런, 어떡하지? 지금 빈방이 1층에 하나뿐이란다. 2층은 그 사람이 다 쓰고 있어서 내가 막 내줄 수가 없어.”

부인이 난감한 듯 말했다. 그래서 이비는 옆에 앉은 디에스의 어깨에 냉큼 머리를 기댔다.


“소개를 아직 안 드렸네요. 제 남편이에요.”

“아내가 고향을 그리워해서 함께 왔습니다.”

“아아, 어쩐지! 그럼 방은 하나여도 되겠네!”

디에스도 자상한 척 이비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마르소 부인은 그들의 뻔뻔함을 간파하지 못했다.

거짓말쟁이들은 그렇게 잠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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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부부인 척했던 거짓말쟁이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히 싸웠다.

어떻게 날 바닥에 재울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집사 실격이잖아!

어떻게 침대가 당연히 자기 거라고 생각을 할 수 있죠? 집사도 사람입니다.

야, 씨 이거 안 놔?

물지 마……!

소리 없는 전투 끝에 두 사람은 결국 지쳐서 널브러졌다.


“백작이 바로 위에 있는데 이런 걸로 싸워야겠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이비는 한마디도 지지 않는 디에스를 향해 눈을 곱게 흘겼다.

그러곤 라우렐 백작의 기척을 느끼려는 듯, 천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협상이든 협박이든 하려면 백작을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까요?”

아까 라우렐 백작을 본 후, 이비가 가장 걱정한 건 그가 이 마을을 훌쩍 떠나버리는 일이었다.

엄한 모습을 들켰으면 자취를 감추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여기서 백작이 사라지면 이비에겐 목격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상태로 ‘라우렐 백작님이 비스에서 평민인 척하는 걸 봤어요’라고 이야기해 본들 허언증 취급만 받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비는 백작이 사라지지 않게 근처에서 이 집을 계속 지켜봤다.

굳이 이 집에 머물기로 한 것도 그가 밤중에 훌쩍 떠날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선을 지키면서 접근해야겠죠. 협상이든 협박이든.”

“선이요?”

“라우렐 백작이 노여워하지 않을 선이요.”

백작의 비위를 너무 거스르지 말라는 소리여서, 이비는 불만스레 미간을 좁혔다.


“지금 상황은 백작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곤란하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정도죠. 그러니 일선을 넘어서 백작의 심기를 거스르면 결국 우리 쪽 손해가 될 겁니다.”

“억울하네요, 먼저 선을 넘은 건 저쪽인데 몸을 사리는 건 이쪽이라니.”

이비는 투덜대면서도 디에스의 말을 이해했다.

신분의 고저가 분명한 티엔다에서 오만은 권리이며 비굴은 의무.

그러니 대귀족과 평민 출신 성녀 후보의 대립은 애당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한쪽의 자비로 다른 한쪽이 살아남을 뿐.

그러니 백작의 비밀을 알아냈다 해도, 지금 이비가 할 수 있는 것은 ‘입을 잘 다물 테니 좀 봐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뿐이었다.


‘좋겠다, 너는 날 때부터 어려운 사람이라서.’

이비가 가벼운 푸념으로 제 처지를 인정할 때였다.

천장 쪽에서 삐거덕대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이비와 디에스는 놀라서 대화를 멈췄다.

삐거덕, 삐거덕, 오래된 나무판자가 아우성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그건 위층에 있던 사람이 오래된 목조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였다.

***

그 계단 소리가 울릴 때 이비는 이미 잠옷 차림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 위에 숄 하나를 걸친 채 방에서 나와 이미 지나간 발자취를 조심히 따라갔다.

부엌 쪽에서 등불의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이비는 발소리를 죽인 채 그쪽으로 다가갔고, 곧 거기서 한 남자를 마주했다.

종일 방에 있느라 물이 다 떨어졌는지, 그는 빈 물병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비는 여전히 안경을 쓴 남자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또 뵙네요, 선생님.”

그러곤 예쁘게 웃었지만, 그 남자는 작은 미소조차 지어 주지 않았다.


“본인에게 맞는 호칭을 쓰시죠.”

대신 여느 때처럼 차갑게 말했다. 그러곤 조금 놀란 이비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집사를 남편으로 만들어서 방을 빌릴 정도면 이미 결론이 난 걸 텐데.”

그렇게 단정 짓는 시온의 표정 역시, 여느 때처럼 참 거만했다.

그래서 이비는 정말 정떨어지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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