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제왕에게 금기는 없다
(15/129)
15화. 제왕에게 금기는 없다
(15/129)
15화. 제왕에게 금기는 없다
2022.07.21.
원하는 걸 얻어 냈지만, 로히카의 방에서 나온 이비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상냥한 목소리로 사람을 개 취급하는 로히카의 견고한 오만 때문이었다.
이비는 느리게 움직이는 승강기 안에서, 로히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건 5년 전, 비스의 감옥 같은 보육원에서였다.
―안녕, 아가야?
그날 로히카는 이비를 보자마자 먼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런 로히카를 향한 이비의 첫인상은 달콤하다는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찔한 미모와 절제했음에도 흘러넘치는 사치스러움, 그리고 유혹하듯 짙은 눈웃음까지.
로히카 세드로의 매력은 독을 가진 것 특유의 화려함과 결이 같았다.
하지만 당시의 이비는 그걸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로히카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고 말았다.
―나를 티엔다로 데려갈 거죠?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여기서 노래를 가장 잘하니까요. 예전에 여기 온 성녀님한테 들었어요. 노래를 잘하는 여자애를 찾는다고, 그런 애들이 있어야 마냐냐가 물을 정화해 준다고요.
생글대는 로히카를 향해 이비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노래를 잘한다는 자랑이 무색하게,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럼에도 로히카는 흥미를 잃지 않고 되물었다.
―그래요, 잘 알고 있네. 이비는 티엔다에 가고 싶어요?
로히카는 이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비는 그게 보육원 원장과 대화를 끝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이렇게 되물었다.
―티엔다에 가면 나도 어려운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어려운 사람?
―바라는 걸 하나 정도는 이룰 수 있는 사람이요.
아직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이비가 이런 말을 하는 게 희한한지 로히카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혼자서는 찾을 수가 없어요. 도와주는 사람은 물론 없고요. 그러니까 내가 티엔다에서 물을 정화하게 되면, 그땐 세상도 날 위해 조금은 움직이겠죠.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텅 빈 눈으로 로히카를 바라보았고, 로히카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댔다.
―신기하네, 이 불쌍한 아이의 마음을 누가 벌써 훔쳤지?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조롱이지만, 당시의 이비는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간절한 탓이었다.
―맞아요,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굉장히 어려운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 같이 갈까?
이비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그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선사할 지옥을 까맣게 모른 채.
이비는 그 순간을 지금도 후회했다.
물론 그때 이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러니 로히카의 손을 잡든 잡지 않든, 이비의 운명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이비가 후회하는 건, 그때 로히카를 믿었던 자신의 순진함이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다.
모든 일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생긴다.
그러니 대가 없는, 분에 넘치는 행운이 찾아오면 의심해야 한다.
덫에는 반드시 미끼가 놓이는 법이니까.
그때도 이비는 이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고 말았다.
아주 가끔은 대가 없이도 다정한 일이 일어난다는 걸, 누군가가 알려 준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네.’
옛날 생각을 하던 이비는 문득 떠올렸다.
이비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린 사람. 이비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람.
티엔다에 올라온 후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완전히 잊고 지냈다.
난생처음 이비에게 친절했던, 그 점성술사를.
간만에 떠오른 존재가 이비의 마음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탑의 현관 층에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리며, 홀에서 기다리던 디에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디에스는 이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히카가 자기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까맣게 모르고, 여느 때처럼 느슨한 얼굴로.
그런 집사를 본 이비는 한숨 쉬듯 웃었다.
점성술사는 여전히 고맙고 그리운 사람이지만, 찾는 건 거의 포기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찾아 헤매기엔 탑에 묶인 본인의 처지가 급했다.
게다가 지금은 옆에 있는 사람을 챙기는 게 더 중요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어떻게…….”
“잘됐어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래요.”
디에스의 물음에 이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앞장섰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당차게 웃으며, 생과 사를 함께하는 친구에게 말했다.
“비스로 가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러.”
***
계곡 너머의 하늘이 굉음과 함께 수천 갈래로 찢겼다.
눈과 귀가 멀 것 같은 충격이 퍼붓듯 쏟아졌지만, 경계의 감시자들은 대열을 지키며 견뎌냈다.
그러길 수십여 분,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끝났군.”
그 익숙한 감각에, 감시자들의 부사령관인 모렌 아르코 소백작이 회중시계를 힐끗대며 중얼댔다.
“총사령관의 단독 교전으로 한 시간 사십칠 분만에 아마네세르 침묵.”
그의 말처럼 모든 게 끝났는지 세상을 내리치던 낙뢰와 굉음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이곳은 밑대륙 비스의 동쪽 끝, 미친 용 아마네세르가 갇혀 있는 동녘의 경계.
한 달 만에 어김없이 깨어난 아마네세르를 잠재우기 위해 감시자들은 방금 막 한바탕 전투를 치른 터였다.
물론 감시자들이 전투를 치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전투에 임한 건 오직 총사령관인 시온 라우렐뿐.
그는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가장 전방에서 싸우며, 또한 그 이름에 걸맞게 반드시 승리했다.
‘불만이 싹 가신 모양이군.’
모렌이 대열을 갖춘 감시자들의 표정을 힐끗대며 중얼댔다.
얼마 전 총사령관이 티엔다에 다녀온 후, 감시자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유는 경계 감시 임무를 가볍게 다룬 총사령관의 독단 때문이었다.
사실 인간인지 유령인지조차 헷갈리는 총사령관이 대뜸 티엔다에 간다고 했을 땐 다들 웬일인가 했다.
공허하고 무감한 건 역대 라우렐 백작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시온 라우렐은 그중에서도 특히 텅 빈, 마치 종이 인형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수년 동안 경계를 함께 지켜 온 감시자들에게도 그는 상관이나 전우가 아니라 멀리서 흔들리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더군다나 아마네세르를 격퇴하고도 강박적으로 전장에 머무는 저 폐쇄적인 성향 탓에 ‘부사령관보다 아마네세르가 총사령관하고 더 친할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총사령관이 얼마 전 티엔다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왔다.
마냐냐 탑의 성녀 후보와 시비가 붙어, 그 애 하나 매장하겠다고 자기 임무와 사명을 걸고 티엔다의 귀족들을 협박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감시자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그들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 이 산지옥에서 아마네세르를 감시하는 긍지 높은 군인.
그런데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그들의 긍지와 사명을 값싸게 휘둘렀다.
이 때문에 아까까지만 해도 숨길 수 없는 불만이 대대에 가득했었다.
그러나 그 냉랭한 분위기는 총사령관과 아마네세르의 교전이 시작되며 불타듯 사라졌다.
저들이 일으킨 충돌의 여파가 모든 것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마치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격렬한 전투는 지켜보는 것 자체로 하나의 징벌이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충격과 초월적인 존재가 부여하는 공포는 인간을 미물로 전락시키고, 나아가 죽음을 바라게 할 정도로 잔혹했다.
만약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지 않고 저들의 격전을 직접 마주했다면 감시자들 역시 진즉에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감시자들은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느라 잠시 잊었던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시온 라우렐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간단하지만 절대적인 진리를 말이다.
그는 동녘의 감시자이며 용의 정복자, 홀로 재앙을 막는 전쟁의 신.
티엔다비스의 모든 것은 시온 라우렐에게 생명을 빚졌다.
그런데 어떻게 저 제왕에게 금기가 있단 말인가.
결국 감시자들은 총사령관의 독단과 오만을 그의 권리로 인정했고, 모렌 아르코도 알아서 정돈된 군기에 동의했다.
‘이참에 안일한 귀족들이 정신을 차리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게다가 모렌은 티엔다 귀족들의 원성도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저 감시자들처럼 티엔다의 게으른 귀족들도 라우렐이 왜 라우렐인지 새삼 깨닫게 될 테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낙관적인 마음에도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비 아리아테라고 했지.’
총사령관과 대차게 얽힌 마냐냐의 정화자.
모렌은 다 좋다고 생각하지만, 총사령관이 그 소녀에게 내린 처분만은 신경 쓰였다.
총사령관은 그 갸륵한 소녀에게 가혹한 짓을 했다.
이래선 곤경에 처한 그 아이가 총사령관을 원망할 것이 뻔했다.
물론 원망 따위는 제왕에게 아무런 흠집도 낼 수 없다.
다만 경력 있는 기혼자인 모렌 아르코 소백작이 염려하는 건, 저 무심한 시온 라우렐이 이비 아리아테와 연관된 순간마다 드러낸 의외의 모습이었다.
모렌은 티엔다에서 총사령관을 보필하며 보았다.
라우렐 성의 연회 때 이비 아리아테에게 못 박혀 떨어지지 않던 그의 시선을.
다음날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옷차림에 신경 쓰던 낯선 모습도.
게다가 정화식이 끝나고, 탑의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기어이 찾아 나서던 성급한 뒷모습까지.
참으로 외람되지만, 모렌의 눈에 그때의 총사령관은 여느 스물넷 청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닌 척 거드럭대지만 조금 들떠 있는, 그런.
그래서 정화식 때만 해도 혹시 저 정화자와 좋은 분위기인 건가, 버르장머리 없다는 말로 사랑에 빠지다니 이 무슨 괴이한 취향인가 싶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 총사령관은 무자비한 선언으로 그 소녀의 팔목을 비틀어 꺾었고, 덕분에 모렌은 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내 젊은 상관은 과연 이 일로 자신이 지게 될 뒷감당을 충분히 고려했을까?
모렌은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비 아리아테와 연관될 때마다, 자신의 냉랭함과 권태로움이 거짓말처럼 잦아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괜한 소릴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모렌은 자기가 본 것을 전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 총사령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두렵기도 하고, 무엇보다 총사령관과 그 귀엽게 생긴 정화자는 이미 확실한 파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일은 덮고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어차피 그 정화자하고는 더 엮일 일도 없을 듯하니 말이다.
경계의 부사령관으로서 총사령관의 모든 것을 살피고 도와야 하는 모렌은 자신의 결론에 만족했다.
그러곤 아직 대기 중인 감시자들에게 복귀를 명했다.
아마네세르는 이미 추락했지만, 그럼에도 총사령관은 앞으로 보름은 더 저 경계에 머물 것이다. 지난 7년간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서 모렌은 혼자 있기를 지독히도 좋아하는 총사령관을 남겨 두고 감시자들의 거점인 타르데스 전당으로 회군했다.
.
.
.
같은 시각, 만신창이가 된 시온은 검게 타들어 가는 땅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끝났다.
하지만 끝내지는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아마네세르의 숨통을 끊으려 했는데, 또 경계의 괴수들이 아마네세르를 숨겨 버렸다.
그로써 오늘도 결착을 내지 못한 시온은 두 손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푸념하듯 중얼댔다.
“눈부셔.”
아마네세르와 주고받은 낙뢰 때문에 아직도 눈앞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온은 눈을 감고 있다가, 잔상이 사라질 즈음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명예로운 총사령관의 제복을 그 자리에서 툭툭 벗었다.
아마 저 계곡 너머에 있는 부사령관과 감시자들은 시온이 앞으로 보름은 더 이 경계에 머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혼자 있기를 지독히도 좋아해서, 부하들과 함께 있길 거부하고 경계 임무를 계속하는 줄 알겠지.
시온이 혼자 있길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지독한 곳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거창한 훈장까지 다 떨구고 가벼운 셔츠 차림이 된 시온은 손가락을 물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낙뢰를 피해 달아났던 작은 용이 그의 곁으로 날아왔다.
시온은 제복을 그렇게 버려 둔 채 용의 안장에 올랐다.
‘일단 집에 가서 좀 쉬자.’
그러곤 감시자들의 거점인 타르데스 전당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