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미발견 지역에서 꿀 빱니다-32화 (32/69)

강력한 한방(1)

강력한 한방(1)

김정수는 3가지 립스틱을 비교하다가, 그냥 전부 바구니에 넣었다.

“아냐. 그냥 다 사지 뭐.”

그 말에, 김민희와 김지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김정수는 두 사람이 발을 멈춘 것도 모른 채, 화장품을 고르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지수는 팔짱을 낀 채, 멀어지는 김정수를 보며 작게 읊조렸다.

“정수 오빠, 분명히 지인 피부가 나빠서 보습 크림 사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 지?”

“그런데 왜 립스틱을 찾아?”

“어? 그러게?”

김민희는 김지수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이 멍한 얼굴로 김정수를 바라보았다.

김지수는 그런 김민희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백퍼야.”

“뭐가 백퍼라는 거야?”

“정수 오빠, 썸녀 생긴 게 분명해. 고작 아는 사이인데, 저렇게 웃으면서 정성스럽게 화장품을 고를까?”

“아, 아니야! 아니라고 했어. 그럴 리가.”

김민희가 힘차게 고개를 저었으나, 김지수가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하아. 그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그럼 오빠가 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꼬치꼬치 캐물을 거 알면서 썸녀가 있다고 할까?”

“그래도······ 그래도, 거짓말까지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오빠가 나한테까지······.”

김민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럼 립스틱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별 사이 아닌데 다른 화장품도 아니고 립스틱을 선물하나? 그것도 목숨 걸고 싸우는 곳에서 만난 사이인데?”

김지수가 조목조목 의심되는 부분을 짚자, 김민희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김지수는 미간을 좁히며 김정수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물었다.

“의심되는 사람 있어?”

“아니. 등탑자라는데, 오빠가 아는 여성 등탑자가 있었나?”

“그, 왜. 한슬기 팀장님 있잖아.”

“한슬기 팀장님? 근데, 그분은 피부가 좋잖아. 저번에 보니까 피부가 하얗기도 하고, 반질반질 아주 빛이 나던데.”

“너 그 사람 쌩얼 본 적 있어? 없지? 저번에 봤을 때, 가볍게 하긴 했지만, 분명히 화장한 티가 났어.”

김민희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네가 그렇다면 틀릴 일은 없지. 화장이라면, 선생님들까지 몰래몰래 배우러 오실 정도니까. 그래서? 화장을 벗겨보면 피부가 별로일 수도 있다?”

“그치. 만약 그렇다면, 상당한 실력이야. 나조차도 간파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어.”

김지수가 식은땀을 흘렸고, 김민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둘이 같이 있으면서 쌩얼을 볼 일이······.”

“있지! 정수 오빠 스카우트하려고 했잖아. 등탑 도와준다고 오빠랑 둘이 탑에 있었다면?”

“어?”

김지수의 추측에, 김민희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두 사람이 쌩얼을 볼 일이 뭐가 있겠어. 탑 안의 극한 상황. 며칠간 이어진 전투에 지쳐 몸을 피하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는 동굴 속에서······.”

김지수가 김민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다가 김민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수 씨, 추워요······.”

“안돼!!!”

김민희가 소리를 질렀고, 한순간 화장품 가게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김지수가 다급하게 김민희의 입을 틀어막고, 검지로 코와 입을 가리며 주의했다.

“조용히 해, 이 바보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아무튼, 나는 그 사람이 수상해. 오빠랑 그 사람이 연락하고 있으면, 아마 백퍼일 거야. 나중에 몰래 확인해 봐. 알았지?”

김민희는 입이 막힌 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저기 오빠 온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김정수가 두 사람을 향해 뛰어왔다.

“얘들아!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장난을 좀 쳤더니, 민희가 기겁하는 바람에······.”

김정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머리를 긁었다.

“하아. 나는 또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대체 무슨 장난을 쳤기에 몬스터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러?”

“아하하······. 지, 지수가 좀 짓궂어! 오빠, 이제 가자. 이제 추천해줄 건 끝났어!”

“그래? 뭐, 이 정도면 되겠지. 계산하고 올게!”

김정수가 유난히 밝게 웃으며 발을 옮겼고, 김지수가 강조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상대는 강적이야. 알았지? 난 네 편이다. 응원할 게.”

“응! 알았어!”

멀어지는 김정수의 뒷모습을 보며, 김지수와 김민희가 동시에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러다가 3초쯤 지났을 때.

“······어? 근데 뭘 응원한다는 거야?”

김민희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 정수 오빠 좋아하잖아. 아니야? 아니면 나 소개해 달라니까?”

김지수가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김민희가 빽, 소리를 지르며 가게를 나가버렸다.

“아, 아니라고! 김지수 진짜 짜증나!”

김지수가 킥킥거리다가 김민희의 뒤를 따랐다.

“아, 알았어! 모르는 척해줄게! 김민희! 야!”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보며, 김정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저번에도 이런 장면을 본 것 같은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희끼리만 다니면 위험하다니까! 얘들아, 같이 가!”

*

화장품을 구매하고 돌아온 뒤, 나는 뒷산의 임야를 매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부와 약초 납품 계약을 맺기도 했고, 98층의 마력토와 샘물을 통해 약초를 성공적으로 기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즉, 사업을 시작할 모든 조건이 마련되었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고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대형 길드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일 기회가 날아가는 셈이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로 땅 주인과 미팅을 잡았다.

다행스럽게도, 금액만 맞춰준다면 이 구석진 땅을 팔 의사가 있다고 했다.

땅 주인이 제시한 금액은 3억.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은 계약금을 주기에 조금 부족한 양.

그래서 미팅은 보름 뒤로 잡아놓았다.

“탑에 올라갔다 오면 땅을 매입할 돈은 충분하겠지.”

물론, 이런 임야에서 농사를 짓고 수익을 창출하려면 용도를 변경하고, 허가받을 때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한다고 하던데······ 과연 얼마나 나올지······.

“끄으응. 정 힘들면 대출이나 한수 형에게 빌릴 수도 있으니까.”

머리가 아프지만, 기왕 하기로 한 거 눈 딱 감고 해보기로 했다.

이제 대출이나 빚은 지긋지긋하지만, 돈이 보이는 데 투자를 안 할 수는 없는 데다 이제는 금방금방 벌리기도 하니까.

투자해야 더 큰 돈이 들어오는 법이지.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돈 벌러 가봅시다.”

나는 곧바로 짐을 챙겨, 탑을 올랐다.

98층에 도착한 뒤, 나는 이번에도 윌리엄을 찾았다.

가장 급한 건 역시 균열의 대비.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 확실하게 대비해야지.

윌리엄이라면 혹시 식충식물을 이용할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나는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윌리엄! 윌리엄 계세요?”

“오, 정수. 아침 일찍 왔군. 무슨 일인가?”

“아, 식충식물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일단 앉지. 그래, 뭐가 궁금한 건가?”

“저번에 식충식물이 곤충을 유인해서 잡아먹는다고 했죠? 어떤 방식으로 벌레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자네 요즘 약초에 관심이 많더니, 혹시 이쪽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라도 하는 건가?”

윌리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근래, 블루문 이후로 생물의 진화 현상을 연구하는 데 매진하고 있던 것 같은데······ 저 눈동자는 마치 대학원생 후보를 발견한 교수의 눈빛이라고 하면 과한 걸까?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고향에서 쓸모가 있을까 해서요.”

“그렇군. 식충식물은 곤충들만 맡을 수 있는 달콤한 향을 내뿜지. 곤충은 그 향에 홀린 듯 다가가는데, 그때 데스 마우스의 이빨이 벌레를 콱! 물면 마취액이 나와 기절해버리네. 그렇게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삼켜지는 게야.”

식충식물에서 나는 냄새와 액이라······.

“특별한 성분이 있다는 건데······.”

나는 원래 식충식물에게 로커스트를 먹여 성장시킨 뒤, 균열 근처로 옮겨 심어 크레이지 호넷을 잡을 때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성분을 뽑아서 곤충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식충식물이 크레이지 호넷을 먹게 할 수 없는 만큼 직접 싸워야 하는 수고가 생긴다.

하지만, 도시에 식충식물을 심는다거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는 등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뭔가, 해답이 보이는 기분인데?

“그럼 혹시 식충식물로부터 그 향을 뽑아낼 방법은 없나요?”

“그건 잘 모르겠네. 마법사가 아니라 연금술의 영역이라서 말이야. 그건 일종의 포션을 만드는 일과도 같아. 성분만을 뽑아내는 거지.”

연금술사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연금술사는 없다.

특히, 성능까지 확인해 봐야 하니 최대한 빨리 성분을 뽑아낼 능력이 있는 연금술사가 필요하다.

그런 연금술사라면, 98층에서 찾아봐야 하나?

나는 윌리엄에게 물었다.

“그럼 윌리엄, 혹시 아는 연금술사는 있나요? 실력 있는 분으로요.”

기대를 걸어보았으나, 윌리엄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수도에서 마법을 배울 때 잠시 알던 연금술사들이 있긴 하네만, 내가 톨른 마을로 옮겨오며 연락이 끊겼지. 필요로 하는 성분만 뽑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연금술사라면, 대부분 수도에 있을 거야.”

이곳에서 수도까지의 거리는 편도로 잡아도 한 달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라고 한다.

연금술사를 찾아 성분을 뽑아달라고 부탁해도 그걸 양산하려면······ 힘들겠지.

젠장, 이 방법은 틀렸나?

연금술사. 연금술사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아! 그 사람!”

생각해보니, 아는 연금술사가 있었다.

그것도, 가족이 납치당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연금술사가 말이지.

“오, 혹시 아는 연금술사라도 있나?”

“뭐, 아는 사이라면 아는 사이겠죠. 저한테 빚을 진 적이 있어서요. 설득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구린내가 나는 일에 엮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방법이야 많다.

그 사람을 대신할 실력 있고 입 무거운 연금술사를 소개해달라고 한다거나.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데?

내 반응에 윌리엄이 웃었다.

“허허. 다행일세. 연금술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잘 풀리길 바라네.”

“고마워요, 윌리엄! 나중에 수업할 때 봬요!”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웬 패거리가 윌리엄의 오두막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험상궂게 생긴 대머리들.

전부 무장하고 있는 놈들은 한눈에 봐도 좋은 의도를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들이 저들끼리 중얼거렸다.

“뭐야. 저놈이 아닌데? 여기가 맞아?”

“예. 맞습니다. 분명, 토니가 이곳으로 가는 걸 봤답니다.”

토니? 토니라면······ 윌리엄의 조카?

그러고 보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토니가 빚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놈들은······.

나는 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윌리엄을 불렀다.

“어······ 윌리엄?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윌리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두막 밖의 덩치들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토니! 토니 이 자식,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다! 나와!”

“이런 구석진 곳에 처박힌다고, 우리가 찾지 못할 줄 알았나?”

“감히 우리 돈을 떼먹고 무사할 줄 알아?”

우당탕!

그 외침에, 위층에 있던 토니가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을 한 토니는 슬쩍 밖을 내다보더니 윌리엄에게 말했다.

“삼촌, 그 사람들이에요. 제가 나가서 얘기해 볼게요.”

그렇게 말한 토니가 오두막을 뛰쳐나가자, 윌리엄이 얼굴을 굳혔다.

나는 지팡이를 챙기는 윌리엄을 보며 물었다.

“위험한 상황인 거죠?”

“아무래도······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군. 나도 잠시 나가보겠네.”

“저도 같이 갈게요.”

우리는 토니의 뒤를 따라 나갔다.

덩치들이 토니를 둘러싼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토니는 겁에 질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윌리엄이 천천히 토니의 앞으로 나아가며 물었다.

“빚을 받으러 오신 분들인가?”

덩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뒤에 있는 놈을 내놓으시지.”

“어이, 토니. 감히 우리 ‘문어 대부’의 돈을 떼먹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문어 대부?

빚쟁이들이니까 대부업체인 건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문어지?

녀석들이 전부 대머리라서 그런 건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토니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빚쟁이 중 레벨이 가장 높은 대머리에게 말했다.

“이보게, 꼴뚜기. 떠나기 전에 편지를 남기지 않았나? 이곳에 머물면서 돈은 제대로 갚을 테니 이만 돌아가 주게.”

저놈이 우두머리인가?

아니 근데, 우두머리 별명이 꼴뚜기야?

이거 장난치는 거 아니겠지?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별명에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꼴뚜기라는 대머리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으르렁거렸다.

“그걸 어떻게 믿지? 우리는 당장 그 돈을 받아야겠어. 아니면, 네 모가지를 가져가도 괜찮고 말이지.”

분위기가 한층 험악해지며, 놈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이거, 웃긴 이름과는 별개로 상황이 좋지 않은데?

빚쟁이들의 레벨은 60에 가깝거나, 60이 넘어간다.

물론 경비대원들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나보다는 강하다.

하지만, 나도 당장 탑을 올라오기 전에 골드 몽키 놈들에게 시달렸기에, 이 일을 모른척하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토니는 앞으로 내 사업을 확장해줄 예비 동업자이기도 하고.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어도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이 있었을 텐데······.

지금 내 레벨로는 나서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빚쟁이들이 무기를 뽑으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한 때.

윌리엄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했다.

쿵!

“아무리 그래도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니, 그래서야 쓰나. 내가 보증할 테니, 조용히 돌아가게.”

“호오. 기억나는군. 친척 중에 마법사가 있었다지? 하지만, 마법사라고 한들, 우리가 두려워할 것 같나?”

빚쟁이들이 패기롭게 무기를 꼬나쥔 채 천천히 윌리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윌리엄은 지팡이를 하늘 높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지.”

쿠르릉······.

윌리엄이 지팡이를 높게 올리는 것과 동시에, 노을 진 하늘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놈들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젠장, 마법이다! 막아!”

“쳐라!”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할 셈인가?

그렇게 둘 순 없지.

나는 녀석들의 무기를 빼앗기 위해 ‘아카식 건틀렛’의 스킬, 자기력을 사용했다.

우우웅.

빚쟁이들이 들고 있던 무기들이 놈들의 손을 떠나 허공을 유영했다.

“이, 이게 왜 이래!”

“뭐야!”

무기를 놓친 놈들이 한순간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꼴뚜기라는 놈은 힘으로 자기력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지만, 딱 거기까지.

윌리엄에게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녀석들이 무기를 되찾으려 하는 사이, 순식간에 마법을 완성한 윌리엄의 입이 움직였다.

“저지먼트 오브 썬더.”

번쩍!

한순간, 눈이 멀 정도의 강렬한 빛이 번쩍이며, 뒤이어 귀가 찢어질 것처럼 강한 천둥이 울렸다.

됐다! 이 정도로 강한 번개라면 녀석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겠지.

콰르릉!

벼락은 심판이라는 말에 걸맞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르르릉!

한순간에 몇 번이고 벼락이 내리친다.

섬광이 줄기줄기 허공을 찢어 가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파지지직!

떨어지던 뇌전이 바닥에 고여있던 물웅덩이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철퍽.

······내가 밟고 있는 물웅덩이가 있었다.

하하, 젠장.

등을 타고 오르는 소름과 나를 집어삼킬 듯 빠르게 다가오며 혀를 날름거리는 새파란 섬광.

사나이 김정수, 향년 22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나?

아니! 이제야 인생 피기 시작했는데,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떠올리며 ‘요정의 축복’으로 방어막을 사용했다.

우우웅.

그러나, 방어막은 순식간에 깨져나갔다.

쨍그랑!

생각하자. 살아남을 방법을.

그때, 머릿속으로 윌리엄의 가르침이 스쳐 지나갔다.

‘정수. 기억하게. 해체는 조립의 역순이야. 마법의 조립법을 알고 있다면, 해체할 수도 있네.’

처음 보는 마법이지만, 나를 가르친 윌리엄이 사용한 전격 마법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움직여, 벼락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한순간, 어마어마한 마나가 빠져나가며 누가 심장을 콱, 쥐어 챈 것처럼 마나 하트에 충격이 가해진다.

“커헉!”

허공에 핏방울이 비산한다.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화끈함에 전신이 덜덜 떨린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마법을 해체했다.

우우웅!

서로 다른 마나가 반발하며 강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마침내, 윌리엄의 마법을 일부 해체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나가 텅 비어버렸다.

끝내 강한 전격이 전신을 덮치고,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파지지직!

눈과 귀가 먹먹하다.

온몸에 감각이 사라진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며 따스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 이건······ 윌리엄의 치유 마법인가?

감각이 돌아오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고, 눈을 계속 깜빡이자,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부둥켜안은 윌리엄이 소리치고 있었다.

“정수, 정수! 괜찮은가! 미안하네, 그곳에 물웅덩이가 있는지 몰랐네!”

슬쩍 눈을 돌리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빚쟁이들이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씨, 씨발! 숯덩이가 됐잖아!”

“저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안 죽었어, 이 새끼들아!”

몸에서 연기가 좀 피어오르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장면이 어지간히 그로테스크했는지, 빚쟁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흑마법사가 시체를 되살렸다!”

“잡히면 언데드 꼴이 되고 말 거다! 동료까지 죽여 언데드를 만들어 버리다니, 저런 잔혹한 마법사를 봤나!”

빚쟁이들은 허겁지겁 무기를 주워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니, 누굴 언데드로 만드는 거야?

반박하고 싶었지만, 약한 현기증이 일어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정수! 움직이지 말게! 아직 회복이 끝나지 않았어!”

“끄으, 윌리엄······.”

그 말대로, 이제야 고통이 밀려왔기에 나는 윌리엄을 불렀다.

“그래! 정수! 할 말이라도 있나?”

“끄······ 고마워요.”

윌리엄은 잠시 멍하니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수가 맛이 가버렸구만······ 걱정하지 말게. 내가 고쳐줄 테니.”

윌리엄이 안쓰럽게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윌리엄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두근, 두근.

처음에는 고통에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윌리엄의 마법을 맞은 이후로, 내 마나 하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 마치 처음으로 블루문을 보고, 강대한 마나를 흡수해서 성장했을 때처럼 말이지.

“아뇨, 윌리엄. 진짜 고마워요.”

나는 씩 웃으면서 내 눈앞을 수놓은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강력한 마법을 파훼하였습니다】

【스킬 ‘마법 파훼’를 획득합니다】

【파훼한 마법에 사용된 마나를 일부 흡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카식 아머리’의 28등급 아이템 해방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어이 없게도, 윌리엄의 번개를 파훼하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얻어 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카식 아머리.

이 미스터리하고 강력한 무기고의 2번째 무기가 해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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