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큐어올 (4)
“자! 한 잔 드십시오!”
쨍!
어둑한 조명에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방 안.
펠릭스는 기분 좋은 얼굴로 카인과 잔을 부딪쳤다. 단번에 잔을 비우고는 ‘크’하는 감탄을 흘렸다.
“역시 수도의 황금의 땅에서 난 보리로 만든 위스키는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반 대표님?”
“교단에서 직접 관리하는 비옥한 땅에서 난 품종으로 빚어낸 술이니 그 향이 남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미려한 동작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카인을 보며 펠릭스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름 그대로 여신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하!”
고급스러운 필체로 술병 상표에 쓰인 ‘여신의 축복’이라는 이름.
한 병에 500만 실링을 호가하는 사치품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같은 ‘구원을 준비하는 자’를 만날 줄이야! 이것도 다 여신님의 큰 뜻이겠지요!”
최근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던가, 하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분명 처음에는 카인을 경계했다.
하지만 상대는 ‘구원을 준비하는 자’가 아니라면 알지 못할 여러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가령 방주에 탑승하기 위한 ‘티켓’의 가격이라거나, 방주의 건설자가 내린 ‘계시’의 내용이라거나.
“슈프림 시큐리티를 만들고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기저기서 손을 더럽히기도 했습니다. 필요에 의해 애꿎은 민간인을 죽이기도 했죠. 하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어차피 일반 대중들이야 저희 같은 진짜를 위해 희생해야 마땅한 존재들이니까요.”
더욱이 상대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먼저 공개하고, 또한 치부 역시 털어놓고 있었다.
얼굴색은 멀쩡하지만, 간혹 동작을 멈칫거리는 것으로 보아 적잖이 술에 취한 것으로 보았다.
‘하긴 벌써 세 병째이니.’
펠릭스는 카인의 스스럼없는 행동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극소수일 ‘구원을 준비하는 자’끼리의 연대감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저는 티켓을 두 장 구매했습니다. 하나는 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 연인을 위한 것이지요. 후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앞으로 티켓을 더 모아야 하겠지만요.”
그리고 카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신약의 판매가 개시되면 자신은 돈방석에 앉을 테고, 티켓을 한두 장이 아닌 십수 장을 구매할 계획이라고.
또한, 일반 대중은 상류층을 위한 밑거름에 불과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노라고.
어쨌든 둘 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이나, 자신이 훨씬 더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고 싶은 심리였다.
‘아직 제대로 상장도 못 한 기업이라고 했지.’
다만 상대가 풍기는 아우라에 자연스럽게 눌려, 함부로 하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중들이야 개나 돼지 같은 짐승들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 보겠다고 치료제를 기다리는 꼴이라니.”
결국, 뱉은 말은 자기 과시와 공감 둘 모두가 섞인 말이었다.
대놓고는 아니나 은근한 방식으로.
그는 혀를 ‘쯧’차고는 말을 이었다.
“비루한 삶은 목숨이 늘어나도 여전히 비루할 뿐인데, 참 우습지 않습니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치료제가 가짜라는 사실은 극비 중에서도 극비이기에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사실이었다.
그때 쯤이면 멸망의 때가 이미 임박해 있을 것이고 말이다.
“맞습니다. 말씀을 참 잘하시는군요.”
“멍청하고 힘없는 자들은 똑똑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카인이 동의를 표하자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잔을 채웠다.
“이런, 술이 다 떨어졌군요.”
병이 비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벨을 눌러 종업원을 호출했다.
“여기 같은 걸로 한 병, 아니. 오늘은 마음껏 취할 생각이니 세 병 가져다 주게. 에반 님, 오늘 이 자리의 비용은 제가 지불할 테니 걱정 말고 드십시오.”
일종의 과시였다.
재력에 있어서는 자신이 위라는 은근한 과시.
“배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걱정 없이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방을 나갔던 종업원이 곧 새로운 술과 얼음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종업원이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던 그때,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펠릭스가 무심코 손동작을 크게 했다.
팔에 부딪힌 술병 하나와 얼음 그릇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쨍!
병이 깨지고 그릇이 엎어졌다.
사방으로 술과 얼음이 비산했고, 개중 일부는 카인의 옷과 얼굴에도 튀었다.
“이게 지금 얼마짜리 술인 줄 알고!”
펠릭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업원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본인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으나, 술에 취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혹은, 알면서도 감정에 휘둘려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실수를.”
종업원 역시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높아 보이는 상대의 신분에 어찌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천한 것이! 네까짓 것이 1년을 일해도 사지 못하는 술이란 말이다!”
펠릭스가 빈 병을 들고 종업원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그때마다 테이블이 밀려 카인의 복부를 눌러댔으나 잔뜩 흥분한 펠릭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상황을 잠시 지켜보던 카인은 근처의 술병용 천으로 얼굴과 몸을 닦고 말했다.
“진정하시지요. 종업원이 일부러 그런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비싼 술을―!”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그리 부담이 되는 금액은 아니지 않습니까? 뭣하시다면 이 자리의 비용은 제가 내도 상관 없습니다.”
카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펠릭스가 멈칫했다.
부담이 되는 금액.
뜨끔했다.
하기야, 앞으로 500만 실링 정도야 푼돈이 될 예정이 아니던가.
“큼큼, 아닙니다. 비용은 제가 내지요. 하지만 에반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당장 꺼지게!”
쩔쩔매고 있던 종업원은 허리를 푹 숙여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제가 조금 흥분했었군요. 자, 그럼 다시 잔을 들지요.”
쨍!
잔이 부딪치고 술이 넘어갔다.
‘어쨌든 관계를 유지해 나쁠 건 없겠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사업 수완이나 강단이 꽤 있어 보이니.’
펠릭스는 모든 것이 잘 풀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같은 배를 탄 이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무엇보다 골칫거리이던 나일스가 최근 몇 달 아무 소란 없이 쥐죽은 듯 지내고 있으니.
결국 언젠가 현실과 타협해 자료의 위치를 불고 말 것이다.
다른 구역에 있는 가족의 목숨 역시, 이쪽 손에 달려 있으니.
“자! 마십시다! 마셔!”
술자리는 기분 좋게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 술에 잔뜩 취한 펠릭스가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잠시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멀었어!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 만나는군요!”
탁.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이제껏 미소를 띠고 있던 카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술에 취해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던 몸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
옷에 남은 술 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보던 카인은, 품에서 녹음기를 꺼내 확인했다.
* * *
사업 발표회 당일.
나는 차에 탑승한 채 66번 거리에 위치한 한 집을 주시하고 있었다.
담장 너머 집안, 긴장된 얼굴로 창가를 서성이는 나일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20분.
사업 발표회까진 40분이 남았으며, 슈프림 시큐리티의 대원들은 아침에 헥사메디컬 사옥에 도착해 빈틈없는 경비를 서고 있을 터였다.
「저는 오전 중 일정이 있어 발표회 시작에 맞춰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미리 와 주시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벨포트와의 대화였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곳곳에 잠복해 있는 감시자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모조리 제거한 후 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겠지만.’
내 목표는 나일스의 호의를 얻어 그를 중역으로 쓰는 것.
생명을 구하는 일을 목표로 하는 그 앞에서 괜히 피를 보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동 중 어느 정도 긴장감을 유지해, 내면에 잠들어 있는 그 본연의 모습을 일깨울 필요도 있었다.
상황에 굴복해 움츠러든 겁쟁이 나일스가 아닌, 성취욕과 모험심 가득한 나일스로 말이다.
드드드-
내가 탄 차량은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디자인의, 조금 사용감이 있는 것으로, 시동을 걸자 엔진의 거친 진동이 몸으로 전해져왔다.
결국 내가 연출할 것은 연극이었다.
나와 나일스를 주연으로 한,
한 편의 잘 짜여진 연극.
부아앙-!
거칠게 액셀을 밟아, 거리의 사람들을 피해 나일스의 집을 향해 돌진했다.
당황하여 곧바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감시자들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스쳤다.
쿵!
벽돌로 쌓아 만든 담장을 무너트리며 마당에 진입했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집의 나무 벽을 들이받았다.
콰직!
차량의 앞부분은 집 내부에 있게 되었다.
창문을 내리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나일스에게 말했다.
“타지. 데리러 왔다.”
“뭐, 뭣?”
옆자리의 문을 열고,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그의 등을 이쪽으로 떠밀었다.
엉거주춤 넘어지려는 그를 향해 팔을 뻗은 뒤, 그대로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다시 바람을 일으켜 문을 닫았다.
탁!
“벨트를 매지. 운전이 거칠 예정이니까.”
나는 다시 액셀을 밟아 집안에서 차를 크게 돌렸다.
그 거친 움직임에 벨트를 매던 나일스의 몸이 밀려 차 문에 부딪쳤다.
“잠깐! 지, 집이! 내 집이!”
어깨에 느껴질 통증보다도, 부서지고 넘어지는 물건들을 보며 나일스는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귀중품은 없지 않나. 일이 끝나면 47번 구역에 훨씬 좋은 거처를 구해 줄 테니 안심해도 좋다. 가족들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넓은 집을 구해 주지.”
“아, 아니!”
몸을 돌린 차는 들어왔던 구멍을 통해 다시 바깥으로 질주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감시자들이 무기를 꼬나 쥐고 마당에 모여 진로를 막고 있었다.
“사람! 사람을 치겠소!”
“죽기 싫으면 저들이 알아서 피할 거다.”
나는 아랑곳 않고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피, 피해!”
“씨발, 이 미친 새끼가! 멈춰!”
적들은 기겁하며 양옆으로 몸을 날렸고, 차량은 거리를 지나 급하게 방향을 꺾은 뒤 도로에 진입했다.
백미러로 어딘가 무전을 보내고 있는 적의 모습이 보였지만, 상정해 두었던 상황이기에 개의치 않았다.
“자료의 위치는 어디지?”
“24번, 24번 거리의 대도서관이오.”
천장 손잡이를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백미러를 바라보다 조금 진정이 된 투로 말했다.
“그, 그래. 인생에는 이런 도박도 필요한 것 아니겠소?”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말려 올라가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도박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확정적으로 일어날 테니.
“최상층 D번 열람실의 21번 책장 3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논문 페이지 사이!”
백미러에는 몇 대의 차량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일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로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소. 규모만 크지 방문객이 거의 없는 도서관이오. 이 도시의 기업인들은 수익 올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책을 읽어 인문학적 지식을 쌓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니 말이오!”
“기억력이 좋군.”
“위치를 잊어서야 되겠소? 그게 어떤 자료인데!”
2차선 도로 위엔 일반 시민들의 차가 적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거침없이 나아가자, 흔들리는 차체에 따라 나일스의 몸이 이리저리 기우뚱거렸다.
다른 차량, 혹은 가드레일과의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주행했다.
“우, 운전과 관련된 일을 했었소? 경비 업체의 대표라더니 솜씨가 아주….”
적 역시 운전 솜씨가 썩 나쁘지는 않았으나, 속력을 거의 줄이지 않고 달리고 있는 이쪽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백미러에 비친 적의 차량은 점차 이쪽과 거리가 멀어져 작아져 갔다.
오래지 않아 교통량이 줄어 도로가 훤히 뚫린 구간이 나타났고, 나는 액셀을 끝까지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