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큐어올 (3)
헥사메디컬을 집어삼킨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나일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큐어올이 실패작이란 사실이 입증되면 분명 주가가 하락하긴 할거요. 바닥을 치겠지.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시설을 인수하는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
나는 감시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각도로 이그니스의 통장을 슬며시 꺼내 펼쳤다.
[ C: 5,000,000,000 ]
50억 실링.
피에타의 투자를 받아 맞춘 금액이었다.
그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통장을 품에 넣은 뒤 이번에는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그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뒤 회수했다.
“믿음을 주려면 내 정체부터 밝혀야겠지.”
“슈프림 시큐리티…. 경비 업체의 대표요?”
“그런 셈이지. 자금은 충분하다. 바닥을 찍은 주식을 사들이기엔 충분하지. 이미 매집해 놓은 주식의 수도 적지 않고 말이야.”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포크로 샐러드가 담긴 그릇을 휘적거리다 조용히 말했다.
“아직 당신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껏 찾아왔던 이들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는 자라는 건 알겠소. 자료의 위치를 알려 주겠소.”
“아니, 함께 가서 직접 찾도록 하지.”
“나를 못 믿는 거요? 거짓 위치를 말할까 봐?”
내가 입꼬리를 피식 올리자 그가 이마를 굳혔다.
통유리 너머 거리, 골목 어귀에도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감시자가 보였다.
조금 전 명함을 미는 모습을 보였을 테지만,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나는 식사를 계속하며 말했다.
“헥사메디컬을 인수 후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제약 회사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그리고 그쪽을 연구소장으로 앉힐 생각이지.”
“…….”
“나약했던 과거를 벗어던지고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해지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료를 찾아 세상에 발표하는 게 낫지 않겠나?”
“연구소장이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일단 일이 제대로 성사될지도 모를뿐더러,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소.”
“아니, 결국 받아들이게 될 거다. 그쪽은.”
그를 중역으로 쓰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앞으로 많은 일을 해 줘야 했기에, 그가 과거를 떨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당장 움직인다면 헥사메디컬에게 뒤를 밟히겠지. 자료를 찾는 건 사업 발표회 당일이다. 그들이 대처할 틈이 없도록.”
“…….”
고민하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꿈.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자 인간을 끊임없이 달리게 만드는 원동력.
꿈이 없는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육체적 의미에서든.
정신적 의미에서든.
욕망이 없는 인간은 영혼이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나일스는, 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영혼에 불이 붙을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다.
떨리는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내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처럼 들렸다.
“…부딪쳐 보겠소. 내가 부서지든 헥사메디컬이 부서지든, 끝까지 가봅시다.”
나는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현명한 선택이다. 발표회 당일 자택에서 대기하지. 내가 데리러 갈 테니.”
등을 돌려 카페의 카운터로 향하는 중, 실수인 척 명함 하나를 흘렸다.
슈프림 시큐리티의 것이 아닌, 다른 제약 회사 인물의 명함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오후.
벨포트는 다급한 얼굴로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았다.
“아직 떠나지 않으셨군요. 다행입니다.”
나는 그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이곳의 기업 몇 곳과 협약을 맺었으며, 경비의 파견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어 남아 있노라고.
호텔 방 안의 옷걸이에 외투를 걸치던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아, 경비라, 경비. 마침 제가 드리려는 말씀도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는 창문을 내다보고 한 차례 벽 쪽을 서성이며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왔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극비 사항입니다. 뭐, 사실 그리 놀라울 건 없는 얘기지만, 아는 사람이 많아 좋을 건 없을 얘기죠.”
“비밀을 지키지.”
그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힐링스타즈. 영업실장 루펠.」
“어제 저희 연구소 담장 근처의 숲 입구에서 발견된 명함입니다.”
“제약 회사군. 사업 확장으로 최근 주가가 오르고 있는.”
“맞습니다. 저희의 경쟁 업체라고도 할 수 있죠.”
어제 내가 카페에서 떨어트리고 간 것으로,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경쟁사에서 저희 쪽 정보를 빼내려는 시도가 이제까지 꽤 잦았습니다. 스파이를 심는 건 물론 몇 번인가 연구소에 침입하려고 든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힐링스타즈에서도 염탐을 하고 있다는 말이군.”
“예. 사업 발표회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어떻게든 흠잡을 구석을 찾으려 드는 것 같습니다.”
공감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반 님, 조금 전 이곳에 경비를 파견할 것이라 하셨지요?”
“그렇지. 구체적인 일정은 상대 기업과 만나 이야기해 보긴 해야겠지만.”
“그럼 혹시 저희 쪽 시설의 경비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가 의뢰한 것은 농장뿐 아니라 연구소나 사옥, 공장과 같은 모든 시설에 대한 경비였다.
“원래 계약한 업체가 있긴 합니다만 조금 불만해서 말입니다. 특히 사업 발표회 당일이 가장 중요한데, 에반 님이 경비를 맡아 주신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척하자 그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덜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쉽게 의도대로 움직여 줬기에, 안배해 두었던 다른 수는 사용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다음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 바깥 거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확인한 벨포트가 전보다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쪽 대표님이 기자분들과 거리를 지나고 계시는군요. 같이 나가서 인사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어차피 앞으로 얼굴을 자주 보아야 할 테니까.”
외투를 걸치고 호텔 문을 나서자 이쪽을 향해 가까워져 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어느 정도 살집이 있는 정장 차림의 장년을 중심으로 수첩과 펜,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달라붙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상점가의 주인이나 손님, 행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큐어올의 개발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 어릴 때 꿈이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치료로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마병 환자들을 보며 꿈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죠. 큐어올의 개발 중 분명 어려운 순간도 있었지만….”
쉴새 없이 번쩍이는 카메라 셔터와 쏟아지는 질문에도 그는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히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굳이 소개가 없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헥사메디컬의 대표이자.
셰비어 연구소의 전 연구소장.
루드 펠릭스.
펠릭스를 둘러싼 무리는 호텔 앞을 지나쳐 거리 반대편으로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보며 벨포트가 말했다.
“지금은 바쁘신 것 같군요. 중간에 쉬는 타이밍이 있을 테니 그때 인사를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우리는 펠릭스와 기자 무리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가는 곳마다 행인들이 걸음을 멈춰 세운 뒤 시선을 보냈으며, 개중에는 펠릭스를 향해 기도를 올리듯 양 손바닥을 모은 뒤 고개를 숙이는 이도 있었다.
“성자라도 대하는 것 같은 모습이군.”
“마병 환자가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요. 실제로 펠릭스 대표님은 독실한 신자이시기도 하고 말입니다.”
펠릭스의 목에 걸린 팔각별 목걸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는 공원에 닿았다.
기자 중 하나가 벤치가 여럿 놓인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잠시 쉬었다가 인터뷰를 마저 진행하시지요.”
“예. 그렇게 합시다.”
“대표님 먼저 앉으시지요.”
펠릭스가 가운데 벤치에 앉고, 기자들이 주위 벤치에 따라 앉았다.
그 뒤 인터뷰 내용과 사진을 정리하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펠릭스를 향해 다가가려 할 때, 먼저 나타난 이가 있었다.
“저, 저기….”
남루한 행색의 20대 여성이었다.
더듬더듬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게 펠릭스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히 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듯 조금 밝아진 얼굴로 여성이 말했다.
“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치료제를 개발해 주셔서. 사실 제가 마병 환자라…. 다시 살아갈 희망이 생겨서….”
여성은 말을 채 다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펠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그녀의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제까지 죽지 않고 버텨주셔서. 곧 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사라진 세상이 올 겁니다.”
펠릭스가 온화한 얼굴로 기자들 쪽을 바라보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기자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빛은 오기 마련입니다.”
펠릭스는 여성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고 희망적인 말을 몇 개 더 꺼내 그녀를 격려했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간 뒤,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치료제의 가격이 그리 낮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들어가는 약재의 양이 만만치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터뷰는 다시 시작되었다.
“최대한 비용을 절감하고 저희 쪽의 이득은 배제하려 노력했습니다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울 수 있는 가격으로 책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그게 아쉽고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기자들은 펠릭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개중에는 깊은 감명을 받은 얼굴을 한 이도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들은 펠릭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흩어졌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향하는 그에게, 우리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역시 언변은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좀 본받아야 할 텐데요.”
펠릭스는 이쪽을 돌아보고는 예의 미소를 지었다.
“자네였구만. 근처에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런데 이쪽 분은…?”
“전에 말씀드렸던 슈프림 시큐리티의 에반 대표님입니다.”
“아아, 얘기를 많이 들었소. 반갑습니다. 헥사메디컬의 대표를 맡고 있는 루드 펠릭스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반이라고 합니다.”
“올렸던 안건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에반 님이 사업 발표회 당일 경비를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오오. 그렇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 선한 의도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좋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는 것 같더군요. 중요한 자리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온화한 미소에 나 역시 미소로 답했다.
“선의가 항상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꿋꿋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려 노력하는 것이 곧 여신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이런, 형제님이셨군요.”
펠릭스의 시선은 내 목에 걸린 팔각별 목걸이에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벨포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 님도 교단의 신자셨습니까?”
교도소에서 에스텔에게 얻었던, 마나 운용 시 회로를 은폐시키는 유물이었다.
평소 필요할 때만 착용하는 물건으로, 펠릭스에게 대화를 걸기 전 품에서 꺼내 착용한 참이었다.
“교리를 설파 받은 지는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신앙은 누구보다 두텁다고 자부합니다.”
“여신님의 뜻인 것 같군요. 이렇게 또 형제님과 큰일을 함께 하게 되다니 말입니다.”
펠릭스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사업과 교단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던 중 벨포트가 말했다.
“이제 슬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스케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맞네. 요즘은 할 일이 많다 보니 시간이 부쩍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기사에게 시동을 걸어놓으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맙네.”
벨포트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검은 리무진 쪽으로 사라졌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눠야 할 것 같군요. 중요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짧지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펠릭스가 몸을 돌려 리무진으로 향하려던 때, 나는 말 한마디를 더 던져 그를 멈춰 세웠다.
“혹시 대표님도 방주의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사업을 하시는지요?”
그는 놀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 감정은 경계와 의심, 납득과 안정을 걸쳐 끝에는 공모자 내지는 동료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에반 대표님도 그쪽 분이셨군요. 하기야, 큰 사업을 벌이는 독실한 신자라면 가능성이 크기야 합니다.”
“역시 제 추측이 맞았나 보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슈프림 시큐리티 대표 직함이 적힌 명함을 건넸다.
“더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은밀한 장소에서, 단둘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