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파이트 클럽 (2)
철컥.
간발의 차로 에닉스가 먼저 도착해 라이플을 집어 들었다.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 상대에게 난사했다.
탄창이 이미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익숙한 동작이었다.
투두두두-!
사격이 끝난 자리에 칼다이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공중 높이 뛰어 올라, 어느 새 집어 든 창의 끝을 아래로 향한 채 하강하고 있었다.
콰직!
에닉스가 몸을 구르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냈다.
거치대에서 검을 집어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에 대응했다.
스피커를 통해 쉴 새 없이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전달되어져 왔다.
삐비비빅-
경기장 중앙의 천장에서 이어져 나온 전광판에는 양 투사에게 걸린 금액이 출력되고 있었다.
“백만, 천만, 억…? 한 사람에게 걸린 금액만 2억 실링이라고요?”
양측에 걸린 금액은 비등했다.
게다가 아직 경기 초반일 뿐이니, 출력된 숫자는 실시간으로 계속 치솟고 있었다.
“내가 10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 5천만 실링인데….”
그녀는 다소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이곳에 출입하는 이들은 모두 적게는 천만 단위에서 많게는 억 단위까지는 우습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반인으로서는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단위의 금액이 움직이니, 그녀가 받는 충격도 어느 정도는 당연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 하나가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온갖 종류의 고급 주류와 안주류가 실려 있었다.
“룸서비스입니다. 무료로 제공되오니 원하시는 만큼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혹 찾으시는 식사나 음료가 있다면 따로 말씀해 주시면 주방에 전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주류 쪽을 스쳤다.
“원한다면 마셔도 좋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아뇨…. 괜찮아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그 앞에서 술을 마신다는 게 뭔가 기분이 조금 이상해요.”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손짓하자 직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경기가 끝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측 모두 마나 유저이고 실력 자체는 비등했지만, 실전 경험의 차이가 드러났다.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칼다이크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잠시 정비 시간을 가진 뒤 두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청소복으로 덮어쓴 직원들이 나와 경기장을 정리했다.
전광판에는 양측에 걸린 각각의 총금액과 인원수, 배당금이 집계되었다.
양측의 총 합산금액은 약 4억 2천만 실링. 참여 인원은 32명.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큰 금액이었지만, 장소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큰 금액이 아니었다.
아직 본격적인 경기는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또한, 한 회차에 참여하는 관람객은 보통 100여 명 안팎이었다.
이 역시 적다면 적은 인원이나 투기장이 이곳만 있는 게 아닌 점을 고려하면 그리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잠시 밖을 보고 오겠다.”
“같이 갈게요.”
“아니. 쉬고 있어라. 오늘 당장은 탐색이 목적이니 위험한 일을 벌일 생각이 없다.”
그녀가 여러 가지 면에서 받은 충격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나는 복잡한 표정의 그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탁.
복도는 고요했다.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고 직원들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돌아다녀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복도를 따라 걷고, 끝에 나타난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확실히 카인의 기억에 있는 대로. 끝은 지하 5층까지 내려가겠군.’
경비의 숫자와 동선, 실내 구조를 눈여겨보며 계속 걸었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는 사람들이 묵는 객실, 그리고 객실을 유지하기 위한 비품실이나 세탁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혹시 길을 잃으셨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하 3층.
내가 복도에서 걸음을 멈춰 서자 곁을 지나던 직원 하나가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내가 괜찮다는 손짓을 하자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당장 더 내려 가볼 수는 없겠군.’
내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복도 끝에 위치한 지하 4층과 5층으로 내려가는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경비들이 앞을 지키고 있어 관리자 외에는 탑승할 수 없었다.
몸을 돌려 다시 위층으로 향했다.
지하 4층은 각지에서 포획해 온 마물들을 가둬 두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하 5층이 투사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빚을 지거나 사로잡혀 들어온 이들은 죄수와 같은 취급을 받으나, 자원해서 들어온 몇몇 이들의 경우 꽤 후한 대접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다.
‘이제껏 돌파했던 공간들의 보안과 경비 수준으로 생각할 순 없겠지.’
머릿속으로 여러 상황과 변수를 검토하고 가능성 있는 선택지의 윤곽을 그려나갔다.
먼저 정면 돌파는 무리였다.
가장 원초적이고 간단한 선택지이긴 하나, 투기장에 배치된 직원들은 모두 정예로 이루어져 있다.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직원조차도 회로 레벨 2단계를 넘겼을 터.
문지기를 뚫고 어찌 지하 5층까지 내려간다고 하여도 무사히 지상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관리자로 위장을 하여, 혹은 다른 통로를 찾아 아래로 잠입한다면.’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다만 고려해야 할 것도 많다.
누구로 위장할 것인가.
수감실 문 개폐에 필요한 카드는 어떻게 위조할 것인가.
투사를 끌고 지상으로 나가는 명목은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만일을 대비해 투기장의 설계도를 수배해 봐야겠군. 혹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인원을 뺄 수밖에 없는 소란을 일으킨다면.’
생각에 잠겨 걷던 중 거대한 문 앞에 닿았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장소로 아직 내부는 확인해 보지 않은 상태였다.
손잡이를 잡아 밀자 문은 그 크기가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부드럽게 움직였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곳은 홀이었다.
조명 아래 곳곳에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고, 벽 쪽엔 요리사가 요리하는 모습을 직접 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과 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파티 홀과 같은 풍경이었다.
입구와 맞은편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고, 늘어선 좌석 앞에 투사들의 싸움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곳곳에 모여 웃음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홀의 내부 구조를 머리에 입력하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관람석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로 와인을 홀짝이며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밤 11시 56분.
곳곳을 돌아다니는 사이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세 번째 경기가 끝나고 시체가 된 이름 모를 투사가 수레에 실려 치워지고 있었다.
‘메인 경기는 변동 없이 정시에 시작하겠군.’
오늘 경기에 출전하는 투사들의 이름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확인했다.
하지만 내 부하가 출전한다고 알려진 자정 경기에 쓰인 이름은, 내가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나 가짜 이름을 쓰게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은 바마가 전달한 정보 자체가 가짜이거나.
천천히 소파에 몸을 뉘었다.
어쨌든 어느 쪽이건 몇 분 뒤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혼자 왔나?”
그때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웃고 있는 얼굴의, 현실의 한국에 있는 전통 탈과 비슷한 형태의 가면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색과 걸걸한 목소리로 미루어 나이가 꽤 있는 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이렇게 젊은 친구가 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 말이야.”
내가 아무 대답이 없음에도 노인은 클클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보통은 산전수전 다 겪고 더 이상 경험해 볼 것이 없는 이들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서 오는 곳이거든, 이곳은.”
“…….”
내가 직접 설정하거나 카인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일 수 있었다.
하지만 드러난 것은 목소리와 나이뿐으로 추측할만한 단서가 적었다.
“…경기를 즐기는 데 나이는 상관이 없지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좌석을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혼자 경기를 관람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라 말입니다.”
“젊구만! 그래, 그래. 나도 젊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지. 세상은 어차피 나 혼자 사는 것이고 무슨 일이든 다 혼자 해낼 수 있다고 말이지. 그게 그대로 성향이 되었었어. 자신에 대한 확신이 굉장히 강한 편이 아닌가? 무슨 일이든 평균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 생각하고 말이야.”
계속 무시하려 했지만, 노인은 쉬이 떨어질 기색이 아니었다.
더 험하게 쫓아낼 수도 있지만, 노인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그의 기분을 상하는 것은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웬만한 부나 권력으론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장소이니만큼 노인 역시 상당한 거물일 가능성이 컸다.
‘직원의 시선을 끄는 것도 좋지 않으니.’
일단 대화에 응해 주고자 했다.
“자기 확신이 강한 건 맞습니다만, 뒤의 것은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말인가?”
“전 어떤 일이든 최고에 가까운 수준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과시나 허세가 따위가 아닌,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카인은 그러했고, 그의 능력을 이어받은 나 역시 그리해오고 있었으니까.
노인은 잠시 멍해 있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패기가 넘치는구만. 내 젊은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을 멈추고 그가 호흡을 골랐다.
“후하, 흐. 그래. 자네 나랑 내기 하나 하지 않겠나?”
“내기 말입니까?”
“그래 내기 말일세. 사람과 사람이 돈을 걸고 하는 내기.”
“내기라면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불특정다수의 사람들과 하실 수 있을 텐데요.”
“많이 해봤지. 갈수록 질리게 되더구만. 홀로그램 너머로 삭막하게 돈을 주고받기만 하는 게 무슨 재미겠나? 무슨 일이든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이 인간미 있는 일이지.”
“…일단 내기 내용은 들어 보겠습니다.”
“간단하네. 자네는 다음 경기에 돈을 걸고, 승자를 맞추면 되네.”
“투기장에서 제공하는 배팅과 다를 게 없는 것 같군요. 그리고 전 지금 충전해 놓은 돈이 없습니다만.”
“걱정하지 말게. 내 걸 쓰면 되니.”
노인이 좌석 앞쪽의 패널을 조작하자 홀로그램이 출력되었다.
C: 1,000,000,000
10억 실링.
일반인들은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는 숫자였다.
내가 돈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자 노인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하룻밤 유흥치고는 과한 금액을 들고 다니시는군요.”
“나이가 들면 하고 싶은 일도 줄고 돈은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더구만. 자네는 내 돈으로 배팅을 하면 되네. 예측에 성공해 돈을 딴다면 그건 자네 몫일세. 거기에 추가로 딴 금액만큼의 돈을 주지.”
“이상한 제안이군요. 잃는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잃은 만큼만 돈을 메꿔 주면 되네. 이런 곳에 드나들면 그 정도의 돈은 있겠지? 혹 잃는 게 무섭다면 적당한 만큼만 돈을 걸면 되고 말이야.”
실로 이상한 제안이었다.
노인으로서는 이 내기로 이득 볼 것이 없다.
내가 배팅에 실패해도 본전이며, 성공하는 경우는 오히려 배당금만큼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된다.
그렇다는 말은 이 내기의 필승법을 알고 있거나 돈 외에 얻을 수 있는 다른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뭐, 갚을 돈이 없다면 다른 물건으로 갚아도 되고.”
노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자네의 손가락이라던가.”
“…….”
농담인 투였지만 그 안에 뼈가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로 손가락을 수집하는 것 같은 취미가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돈을 두고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자 하는 건가.’
간혹 그런 이들이 있었다.
감당하지 못할 상황을 설정해 상대가 망가지는 모습을 즐기는 이들.
10억 실링은 투기장을 드나드는 어느 부자라도 만만하게 볼 금액이 아니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라면 이성이 마비되기에 충분하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내기를 제안해온 것을 봤을 때 이제까지 한두 번 이런 상황을 유도해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악취미군.’
나는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신 저도 이기면 추가금 대신 다른 것을 받겠습니다.”
“돈을 마다하고? 무엇 말인가?”
“선생님의 손가락 같은 것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