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74화 (74/227)

#074. 파이트 클럽 (1)

“그런데 어제 왜 더 세게 조건을 걸지 않았던 거예요? 맹약을 거는 상황이었는데, 더한 제약을 걸어 완전히 노예처럼 부릴 수도 있었잖아요.”

과일이 든 접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에스텔이 말했다.

그녀는 어떤 도전 욕구가 생기기라도 한 것인지 기회가 될 때마다 종류를 바꾸어 가며 과일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지상 과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

나는 오렌지 하나를 집어 손에 움켜쥐었다. 생각을 하다 이내 접시에 돌려놓았다.

“힘 조절을 했을 뿐이다. 세게 쥐었다 터져 버릴 수가 있으니까.”

목숨을 내 손아귀에 쥐고 있었기에 상황을 원하는 대로 이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쪽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겠다. 그쪽은 내가 원하는 카드를 확실히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폭력이 늘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

「…….」

「지휘권을 넘겨라,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 대가로 블루서펜트를 몰아낸 후 토지를 모두 퍼틸랜드가 인수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적어도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는 그리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조건은….」

「어차피 내가 전열에서 이탈하는 순간 퍼틸랜드는 절대 블루서펜트를 이기지 못한다. 동원할 수 있는 용병에도 한계가 있겠지.」

「서, 설사 그렇다 쳐도 약속을 지킬 거라 장담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맹약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겠지.」

처음 제시했던 것 이상의 조건을 걸진 않았다.

맹약.

계약자의 내적 의지에 감응하기에, 진심이 아니라면 마법 자체가 발현되지 않는다.

때문에 상대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혹할 만한 조건과 상황을 내걸어 스스로 계약에 응하게끔 만들 필요가 있었다.

‘죽이겠다는 협박만으로 원하는 조건을 받아낼 수도 있지만, 맹약이 없다면 후에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일이니.’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나는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인다. 잘 생각해 봐라.」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말은 그렇게 뱉었다.

「그리고 이 계약금은 필요 없으니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 아무도 모르는 그쪽 계좌로 넣는다거나, 그런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자기 입으로 꽤 직위가 높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적절한 보상 역시 함께 제시했다.

그가 떨리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맹약을 맺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적어도 아까보다는 훨씬. 다만 지휘권을 넘기기 전에 시간을 조금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중책을 맡고 있긴 하지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몇 가지 걸림돌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1주일. 늦어도 그때까지는 모든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통신 코드를 알려 주면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지. 그리고 정보 길드의 지부장에 관해서는….」

벨포트는 행여나 내가 총을 쏠까 봐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은 여전히 기절한 채였다.

직원들, 아니 잭의 부하들은 문 쪽에 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방안에 편히 앉아 있는 이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정보 길드의 지부장이 다른 의뢰인과 결탁해 또 다른 의뢰인을 암살하려 했다. 이 일이 상부에 알려지면 상황이 재미있어지겠군. 지부가 폐쇄되고 관련된 인원이 모두 숙청될 정도의 사안이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말이야.」

숙청.

그 단어에 부하들의 몸이 움찔했다.

「제안 하나 하지. 이 모든 일을 사고로 처리하는 걸로. 관리 소홀로 인한 가스 폭발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 마법으로 폭발을 일으키고 조사가 나왔을 때 그렇게밖에 해석을 할 수 없도록 모든 상황을 꾸며 주겠다.」

부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녀석이 나서서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목숨이 달아나진 않겠지. 현장이 수습되면 다시 복귀할 수도 있을 테고.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번 일에 대해 영원히 함구하고 내가 45번 구역에 후에 다시 방문했을 때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

다시 한번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피스톨의 손잡이를 부하들 쪽으로 향했다.

「너희 손으로 지부장을 직접 죽여라. 굳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니까.」

「…….」

정적이 흘렀지만, 이번에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업무에 대한 인센티브는 전혀 없으며 종종 부하의 공적까지 가로채 왔던 것이 잭이다.

잭에 대한 충성심이 존재할 리 없다.

더 나아가 계산이 빠른 녀석이라면 그의 죽음으로 차기 지부장 후보에 오를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맨 처음 질문을 던졌던 녀석이 다가와 총을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잭에게 향했다.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방아쇠는 당겨졌다.

탕!

나름대로 업계에 이름을 알렸던 이로서는 다소 싱거운 최후였다.

실력과 관계없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였다.

그리고 잭이 죽은 이유는 내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이다.

정보를 취합해 나름대로의 분석은 했겠지만 말이다.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슬슬 일어나지.”

“41번 구역이라고 했죠.”

보고자 하는 경기는 자정이었다.

45번 구역의 저택에서 41번 구역까지는 1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으나, 거리의 분위기를 파악할 겸 미리 도착해 있을 생각이었다.

차고로 나가 차에 탑승했다.

물론 기존의 스포츠카가 아닌, 소모품으로 구매한 일반 차량이었다.

“확실히 거리의 공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긴 하네요.”

창밖을 보며 에스텔이 말했다.

중심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지점을 지날 때마다 무리 지어 다니고 있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품 안에는 무기를 숨기고, 험악한 표정으로 걸으며,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화약통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저러다 부딪히면 터지겠죠. 펑 하고.”

블루서펜트 조직원들은 거리를 수색하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머리카락 색의 남녀를 발견하면 끈질긴 시선으로 쳐다본다거나.

우리가 타고 나타난 적 있는 차량과 같은 차종을 발견하면 창문 내부를 유심히 들여다본다거나.

반대로 퍼틸랜드는 블루서펜트의 공격을 대비해 돌아다닐 뿐 더 이상 누군가를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45번 구역의 외곽을 빠져나왔다.

1시간 반을 달려 41번 구역에 도착했다.

전쟁에서 벗어나 있는 구역이었고,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를 타고 거리를 돌며 카인의 기억 속에 있는 블루서펜트의 건물과 업장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숙소를 잡고 시간을 보내다 투기장이 문을 여는 때인 밤 10시에 맞춰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해 마법으로 머리 색을 바꾸었다.

“이런 도심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분명 이 근처를 여러 번 지났던 기억이 있는데….”

호화스러운 고층 건물이었다.

지상은 모두 사업과 관련된 사무실로, 지하는 투기장으로 운영되는 구조였다.

나는 차를 멈추지 않고 건물 뒤에 위치한 투기장의 입구로 향했다.

지하로 향하는 내리막, 그 앞에는 바리케이드와 함께 카드를 감지하는 센서가 설치되어 있었다.

「B1 파이트 클럽 로비/주차장」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안내판을 지나 바리케이드 앞에 멈췄다.

창문을 내리고 회원권 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삑. 확인되었습니다.

“죽은 사람 덕을 이렇게 보기도 하네요.”

“극소수만 가질 수 있는 회원권은 부자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

주드로의 것이었다.

네드비체 가문의 셋째.

지금은 망자가 되어버린.

아래로 조금 내려가자 정장을 입은 직원이 나타났다.

그의 안내에 따라 차량용 승강기 위로 올라갔다.

곧 문이 닫히고, 바닥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위잉-

다시 문이 열렸을 때, 눈앞에는 쨍한 조명 아래 광활한 크기의 주차장이 펼쳐져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주차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로비 입구는 저쪽입니다.”

키를 건넨 후 차에서 내리자 다른 직원이 우리 앞에 커다란 가방 하나를 펼쳐 보였다.

안에는 여러 종류의 가면이 열을 맞추어 담겨 있었다.

에스텔이 속삭였다.

“이건 제로플로랑 비슷하네요.”

경매장이든, 투기장이든 주 고객은 돈이 넘쳐나는 상류층이다.

대다수 사회적 계급이 높아 추문이 퍼질 경우 잃을 것이 많다.

때문에 공간에 머무는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배려는 이런 업장에서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었다.

“…….”

나는 천천히 가면을 살폈다.

한창 민감한 사안의 주인공들이 썼었기 때문인지, 유령과 여우 모양의 가면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얼굴을 가리는 면적이 가장 큰 가면을 골라 쓰고 로비로 향했다.

“세상에. 저건 레퀴엠 시리즈 6번이잖아요. 한정판으로 10대밖에 생산되지 않았는데. 저기 랑드 사에서 나온 MX-1도 있어요.”

에스텔은 사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을 터트렸다.

많은 시간을 차를 타고 보내는 나날의 연속이기 때문인지, 그녀는 최근 부쩍 차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있었다.

“31번 방입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를.”

로비에서 카드 키를 받고 다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어느 방에 도착했다.

최고급 호텔의 특실과 같은 방이었다.

평균적인 서민들의 집 크기라 해도 좋을 정도로 방은 넓었으며, 곳곳에 유명 화백의 그림이나 공예품 같은 것이 장식되어 있었다.

다만 벽 한쪽이 거대한 통유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너머로는 돌바닥으로 이루어진 원형 경기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주위의 벽은 모두 반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이곳과 같은 방이 격자형으로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안에서는 밖을 훤히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쪽 사람들의 실루엣 정도만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네요.”

“불법이니만큼 좀 더 허름하고 폐쇄적인 공간일 거라 생각했나?”

“그렇죠, 아무래도. 허름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음침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이 붙어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투사에게 쓰레기를 던지고.”

그런 식의 투기장도 존재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철저히 상류층만을 위해 운영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상류층 중에도, 그녀가 말한 분위기를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저런 걸 말하나?”

나는 손가락을 들어 건너편을 가리켰다.

다수의 좌석이 붙어 있는 공간이 유리 너머로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아. 맞아요. 저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경기를 함께 보기도 하나 보네요.”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관객이 실시간으로 배팅을 하는 그 현장감이 느끼고 싶어 저곳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이들이 많지.”

나는 몸을 돌려 유리 옆에 단 형태로 솟아 있는 패널을 조작했다.

그 위로 홀로그램이 출력되었다.

크게 세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경기 중인 투사들의 프로필.

내가 현재 충전한 금액.

배팅에서 승리 시 받을 수 있는 배당금.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아 칸은 모두 비어 있었다.

“돈을 충전할 거면 제가 다녀올까요?”

“오늘은 되었다. 분위기를 살피러 왔을 뿐이니까.”

요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장소인 만큼 투기장 내부에는 다른 시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조직원이 배치되어 있다.

투기장을 돌며 카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조를 재확인하고 부하를 빼내기 위한 동선을 설계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앉지.”

유리 벽 앞에 비치되어 있는 팔걸이 의자에 몸을 뉘었다.

기다린 지 오래되지 않아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켰다.

그에 맞춰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칼같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저희 파이트 클럽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금일 밤의 첫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 경기장 양쪽에 나 있는 문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웅-

철문이 올라가며 내는 육중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소리뿐 아니라, 경기장 곳곳을 다각도로 찍은 화면 역시 마법 장치와 연결된 방 안의 모니터로 전송되고 있었다.

「오늘의 첫 번째 경기에 출전하는 투사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경기장의 동쪽 출입구를 주목해 주시기 바립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렸다.

넝마에 가까운 옷을 입은 30대 중반의 남자가 퀭한 눈으로 반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살인마 칼다이크. 60번대 구역 일대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및 강도로 나름 고액의 현상금이 걸린 인물이었습니다. 몇 주 전 경찰을 살해한 뒤 도주해 종적을 감추었었죠. 그런 그가 저희 파이트 클럽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투기장에 오게 되었는지는 언급은 없었지만, 예측이 가능했다.

애초의 경우의 수가 많지 않다.

싸움에 미쳐 자원하거나, 빚을 지거나, 전쟁, 혹은 전투에서 패배해 포획되거나.

실제로 파르테르는 중소규모 조직을 흡수합병하며 가장 반항이 거셌던 녀석들을 투기장에 집어넣어 왔다.

블루서펜트에 피해를 준 만큼의 금액을 빚으로 지운 뒤, 수조의 물고기처럼 관상하는.

물론 빚을 다 갚는다고 풀어 주진 않으니, 상대의 희망을 짓밟는 악취미라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서쪽 출입구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폴 에닉스. 70번대 구역에서 마물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용병입니다. 그의 사냥 실력이 같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이제까지 몇 번이나 증명했습니다. 현재 4연승 중으로 떠오르는 신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편에도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상반신은 아예 옷을 걸치지 않아 흉터투성이의 근육질 몸매가 드러나 있었다.

몇 가지 설명이 더 이어지고, 경기장 중앙의 바닥이 꺼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위에는 검, 창, 철퇴, 총 등, 온 온갖 무기가 걸려 있는 거치대가 나타나 있었다.

「그럼 오늘의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신호와 동시에 두 명의 투사가 중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파이트 클럽의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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