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파이트 클럽 (3)
다시 한번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노인이 넉살스럽게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구만. 자신감이 넘치는 게 마음에 들어.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단 말이지. 근데 말이야, 늙은이의 손가락 같은 걸 가져다 어디에 쓰겠나? 대신 자네가 이기면 추가금을 배당금만큼이 아니라 그 2배로 하지, 어떤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애초에 노인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내 돈을 가지고 배팅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단, 결과를 맞힐 경우 배당금을 총 3배로 받는 것이기에 내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20억 실링이란 거금이 있지만, 운용 가능한 자금은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정이 빨라서 좋군. 자, 그럼 선수들을 기다려 보자고.”
자정.
시간에 맞춰 스피커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오늘의 메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이 시간만을 기다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8연승을 달리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전 경기들과 달리 그의 목소리도 어딘가 들떠 있는 게 느껴졌다.
「배신자 바이터!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어느 모 조직의 구성원이었다고 하나, 믿고 따르던 간부가 조직을 배신하며 함께 숙청당했다고 합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진짜라는 건 분명합니다. 무수한 도전자가 그의 검 아래 쓰러져 갔으니까요.」
그와 동시에 서쪽의 문이 열렸다.
회색 머리와 수염이 볼품없이 얼굴을 덮은 사내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등장했다.
「이에 맞서는 상대는, 저희가 어렵게 모셨습니다. 사막 오지에 계신 분을 간신히 찾아낸 뒤 특수한 장비로 이송해 왔으니까요.」
드르륵-
동쪽의 문이 열렸다.
이제까지 사람이 드나들던 작은 크기의 문이 아닌, 잠금장치가 다닥다닥 붙은 큰 문이었다.
무언가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안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의 실루엣이 문밖으로 드러난 순간 사회자가 외쳤다.
「다들 기다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소개합니다. 멸종한 용의 피가 흐른다는 괴수! 드레이크입니다!」
─ 쿠우우우!
그것이 포효했다.
가장 처음 연상된 것은 도마뱀이었다.
온몸을 덮은 단단한 비늘과 집채만 한 크기의 몸집.
녀석은 바닥을 킁킁거리며 사방을 살피다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상대를 발견하고는 잔뜩 흥분한 기색을 했다.
“이곳을 방문한 게 처음이라더니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오늘의 메인 경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나?”
“소문 같은 걸 들은 건 아닙니다만, 대진표를 보고 예상했습니다. 간혹 마수의 이름을 예명으로 쓰는 이들이 있다지만, 메인 경기인 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확실한 무언가를 준비해 놓았을 테니까요.”
노인은 내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크오오오!
사회자의 외침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양 드레이크가 땅을 박차고 질주했다.
거대한 몸집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쾅!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드레이크의 몸이 그대로 투사가 서 있던 쪽의 벽에 박혀 들었다.
다음 순간 내 시선은 공중으로 향했다.
어느새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투사가 드레이크의 몸을 넘어 착지해 중앙에 있는 무기 거치대로 달리고 있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과연 네가 살아 있었군.’
조금 전 들었던 투사의 이름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그것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밀시안 라인하르트.
그것이 그의 본명이었다.
몰락한 기사 가문의 수장이자.
대다수 명령을 도맡아 처리했던 카인의 충직한 부하.
단순 실력만으로는 전체 조직에서 간부를 제외하고 가장 상위에 있던 인물.
그의 정체를 깨달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 때문에 이런 곳에 갇혀 있는가.
분노, 회한, 슬픔 등,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들.
동기화가 더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인지 막심 때보다 그 강도가 더 했다.
“배팅을 하지 않을 생각인가? 뜸을 들이면 배당률이 떨어지지 않겠어?”
옆에서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밀시안은 검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마구잡이로 돌진해 오는 드레이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제 배팅할 참입니다.”
용의 피가 흐른다고 할 만큼 드레이크는 그 흉폭함과 위험성에서 악명 높은 마수이다.
웬만한 수준의 마나 유저는 날아드는 꼬리 한 방에 나가떨어지며 피부에 자잘하게 돋은 가시에 스치는 순간 중독 상태에 빠져 전투 불능이 된다.
하지만 밀시안 정도의 실력이라면 1마리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으로 보이겠지만.
그 증거로 드레이크 쪽에 압도적으로 많은 금액의 돈이 배팅 되고 있었다.
“돈을 조금이라도 벌려면 지금이라도 저 괴물 쪽에 거는 게 낫지 않겠나? 이제까지는 같은 사람이 상대였기 때문에 연승이 가능했겠지만, 저런 괴물을 상대로는 무리지.”
“…….”
나는 조금 더 경기를 지켜보았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내는 것으로 보아 상황이 여유롭진 않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타격을 한 번도 입지 않았으며, 움직임 역시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치료받지 못한 부상이 있다거나 하진 않은 것 같군. 영양 상태 역시도 썩 나쁘지는 않다.’
나는 패널을 조작해 배팅했다.
1억 실링. 액수를 본 노인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호오? 벌써 1억씩이나? 감당할 수 있겠나? 예측에 실패하면 그 감당은 온전히 자네 몫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투는 지난하게 흘러갔다.
몇 번인가 검이 휘둘러졌지만 모두 비늘에 튕겨 나왔다.
더러 깨지는 경우가 있어 몇 번을 거치대에서 새 무기를 찾았다.
드레이크의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난폭하고 기민해져 갔으며, 밀시안은 공격을 피해 내기에 급급했다.
누구도 그의 승리를 점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1억 실링 단위로 계속 그에게 배팅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솔직히 말해 이런 내기를 제안한 건 자네에게가 처음이 아니네. 워낙 돈에 무감한 이들이 모인 장소니 겁도 없이 마구 배팅하는 이들은 많이 보았지만, 적어도 승산이 있어 보이는 곳에 배팅을 했네. 그런데 자네는 자꾸 돈을 허공에 내다 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가 없어.”
딱히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다는 투였다.
“선생님이 바라시는 건 제가 돈을 잃는 것 아닙니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네만. 궁금해서 그러네. 돌처럼 아무 감정 동요도 없이 돈을 배팅하고 있으니 말이야.”
“전 질 생각이 없습니다.”
“자네 참 재미없는 사람이구만.”
돈을 배팅하는 이유.
간단했다.
내기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내 시선은 밀시안의 움직임을 쫓으며 모든 동작을 분석하고 있었다.
전투 시의 사소한 버릇이나 행동 양식, 습관과 같은 것들.
그리고 그럴수록 결국엔 그가 마수를 제압하리라는 확신은 더해져 갔다.
계속해 상처가 늘어나고 있지만 모두 일부러 허용한 느낌이 강했다.
감내할 수 있는 범위까지 받아들이며, 마수의 특성과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전투에 관해서는 교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드레이크’라는 마수를 상대해본 경험이 없을 뿐, 파악이 끝난다면 상황이 역전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노인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유리 벽 너머에 향해 있었다.
‘만약 이 노인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면.’
노인 역시 전투의 진짜 흐름을 읽어내고 있을 것이다.
회색 머리의 투사가 무언가 한 방을 준비하고 있으며, 승부의 행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쿵!
순간 드레이크가 바로 눈앞의 유리 벽에 박혔다.
잠깐의 진동이 있었을 뿐 유리 벽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는군.”
“라티움에서 만든 특수 유리로 알고 있습니다.”
다소 심통이 난 말투였다.
지금뿐 아니라 배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나는 일체의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장난감으로 삼은 이의 다양한 감정 변화였을 테니 그의 태도 변화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 크오오오!
드레이크는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돌진했다.
방향의 끝에는 한쪽 무릎을 굽힌 밀시안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 1억 실링을 그에게 배팅했다.
“결국 10억 모두를 저 투사에게 걸었군. 나라면 분산 투자를 했을 거야. 선택에 후회하지 말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거리가 짧아 누가 보아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밀시안의 다음 동작을 그렸다.
‘허리를 숙여 돌진 궤도에서 비켜난 뒤 그대로 파고들어 턱 아래를 찌른다.’
비늘이 덮이지 않은 부위.
드레이크의 유일한 약점.
드레이크의 힘을 빼며 몇 번 같은 상황을 유도해 왔기에, 나는 그의 다음 수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가 돌진하며 거리는 삽시간에 좁혀져 갔다.
순간 나는 미세한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다.
경기장 내부가 아닌 외부, 바로 옆에서였다.
노인의 손에서 뻗어 나간 얇은 마나의 줄기가 유리 벽을 넘어 드레이크에게 빠른 속도로 향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장난질을 치는군.’
눈앞의 유리는 물리적인 충격은 물론이고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관람객의 안전에 더해 외부에서 내부로 몰래 변수를 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다.
가령 지금 노인이 사용하고 있는 가속마법과 같은.
“…….”
한데 노인은 마나를 통과시키고 있다.
전문장비가 아니면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마나를.
‘4단계 이상의 정제를 거쳤거나, 혹은 유리 벽의 기능을 무효로 하는 방법을 알고 있거나.’
가능성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재력을 자랑하며 라티움에서 제작된 특수 물품에 기능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 노인은.
“마공학과 전격마법의 대가 라이티노 교수님을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군요.”
순간 노인의 손에서 뻗어 나가던 마나가 흐트러졌다.
곧이어 밀시안의 검이 드레이크의 턱을 관통했고, 쩌렁쩌렁한 괴성이 스피커를 통해 홀에 울려 퍼졌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웃는 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이티노 교수님.”
“일단 목소리부터 낮추게. 교수님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전부터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라.이.티.노 교수님.”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가면의 입 부분을 틀어막았다.
“맞네. 내가 그 라이티노가 맞으니 그 입부터 닥치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참 뒤에야 흥분한 기색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네 누군가? 나를 아나?”
“그동안 이런 장난을 많이 쳐오셨을 텐데요. 언젠가 정체를 유추 당할 거라 생각 안 하셨습니까?”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정체부터 밝히게.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인가?”
“학생은 아닙니다만 교수님의 저서를 감명 깊게 읽긴 했습니다. 「마공학의 미래」. 마탑의 장로이자 라티움의 수장으로서 겪은 고충과 고뇌를 토로하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지요.”
“어, 흠, 고맙네. 아주 오래전에 쓴 책이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아니, 이게 아니라, 신분을 명확히 밝히란 말일세!”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마탑의 교수이자 라티움의 수장이 불법 투기장에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뭐, 피차 잃을 게 많은 인간들이니 소문은 내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라이티노가 주변을 살피더니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자네 신분을….”
“제게 신분을 밝힐 의무는 없습니다. 정체를 드러내고 싶다면 굳이 가면을 쓰고 이곳에 입장했겠습니까?”
라이티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하고 싶으나 달리 할 말은 없는 기색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아까 장난이라고 했지. 그건 무슨 말인가?”
“드레이크에게 강화마법을 걸려고 하시더군요. 어떻게 유리벽 너머로 마나를 통과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마나라고? 자네도 마나 유저, 아니 그걸 알아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느껴졌습니다. 움직임을 강화하는 가속 계열인 것 같더군요.”
“그냥 느껴졌다니…! 그것도 마법의 종류까지. 자네도 마법사인가? 마탑의 학부생? 적어도 내가 아는 목소리는 아닌데. 아니, 대학원을 통틀어도 이 정도 두각을 드러낸 학생은 없었지. 한 녀석을 제외하면. 하지만 체형이 다르고. 그 녀석이 여기에 있을 리도….”
라이티노의 말은 끝에 가서는 혼잣말에 가깝게 변했다.
그가 지칭한 ‘녀석’이 누구인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크센.
마탑에 재학 중이며 현재는 답사를 위해 곳곳을 이동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
주인공을 발굴한 마탑의 또 다른 장로 아이타르와 지금 내 눈앞의 라이티노는 오랜 친우 사이다.
둘은 과할 정도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라이티노는 아이타르가 데려온 라크센을 보고 몹시 탐을 냈다.
둘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할 후계자를 찾아다녔으며, 라크센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한 기재란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으니까.
설득과 회유로 라크센을 빼앗아 자신의 제자로 삼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본래 괴팍한 성격에 분노와 경쟁심이 더해져, 이야기 내내 온갖 장소에서 사건의 불씨를 놓는 인물이었다.
“느껴지나? 이게? 정말로?”
라이티노는 마나를 일으켰다.
정제 3단계의 극소량의 마나.
장로급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감지조차 불가능한 양이었다.
“예. 왼쪽 두 번째 손가락에 몰려 있군요.”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으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스피커에서 거대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쓰러진 드레이크가 보였다.
턱에 십 수 개의 검이 꽂혀 있어 머리 아래의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는 투사 바이터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홀 내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라이티노 역시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밀시안은 지쳐 보이는 몸짓으로 드레이크의 시체에 다가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어떤 동작을 취했다.
던지는 것이었다. 검을.
쐐액!
마나가 실린 검은 그대로 날아가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유리 벽을 때렸다.
쨍그랑!
벽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었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유리가 깨지고, 불투명도가 옅어지며 안쪽 인물의 실루엣이 조금 더 명확히 드러났다.
파르테르.
위스키 잔을 든 채 그가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