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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황후의 맹세 (116/121)

116. 황후의 맹세2021.10.12.

같은 소식에 내쉬는 두 눈이 푹 젖어 웃었고, 캐서린은 미치광이처럼 울부짖었다. 자신의 처지가 정부로 끌어내려지다 못해, 허울뿐인 ‘공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체면도 체통도 없이 바닥을 나뒹굴며 몇 날 며칠을 엉엉 울었다. 국혼을 올리는 날이자, 공왕 일행이 즉위식을 올리러 르웰린으로 떠나는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캐서린이 저를 데리러 온 기사들을 향해 차라리 이곳에서 황후로 죽겠다며 난동을 부린 것이다. 밖으로 난 작은 창으로 몸을 욱여넣고 떨어지려 발버둥을 치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근위대 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녀가 벌인 일이야 알고 있다. 레이얼 시오도르가 그녀를 반역죄로 처벌하였다면 모를까, 나서서 일을 덮어버린 후였다. 대외적으로 캐서린은 전 황후이자, 이제는 공왕의 모친으로 공국 제일 귀한 레이디였다. 그런 이에게 기사들이 위력을 행사할 수가 있나. 결국 시녀가 동원되었다. 작은 창에 꽉 끼인 캐서린을 꺼내놓으면, 다시 창으로 달려들어 떨어지려 발악을 했다. 근력이 떨어지는 시녀들은 독을 품고 발광하는 캐서린을 제압하지 못했다. 지리멸렬한 싸움이 이어지던 그때, 캐서린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내쉬를 쏘아보며 외쳤다.

“죽어버릴 거야! 죽을 거라고! 그럼, 황후로 그 이름이 남겠지!”

“그럴 리가요. 황적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는데, 무슨 수로 이름을 남기시게요?”

경멸하는 표정으로 차게 일별한 내쉬가 근위대 소속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쉬의 시선을 받은 기사는 올리브빛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가 소리도 없이 캐서린에게 다가서 손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퍽. 목덜미를 정확히 손날에 얻어맞은 캐서린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한 시간이 넘게 울고불고 발광하던 결과가 싱거웠다. 기사는 쓰러진 캐서린을 솜씨 좋게 부축해 안아 들고는 탑을 나서는 내쉬의 뒤를 따랐다.

“치료를…….”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했던 캐서린의 살갗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거기에 얻어맞고 기절한 터라, 시녀들의 눈에 캐서린이 퍽 딱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소란죄로 처벌받지 않은 게 어디라고.”

앞서가던 내쉬의 서늘한 말에, 캐서린을 안아 든 기사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시녀들의 상냥한 말에 대신 인사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나, 이상하게 무서웠다. 어째서일까? 한참을 갸웃거리던 시녀는 깨달았다. 그는 그녀들을 보며 웃은 게 아니었다. 기사는 캐서린 전 황후를 보며 너무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소름이 쭉 끼쳤지만, 공왕 일행은 이미 황문을 넘은 후였다. * * *

“세상에, 염치도 없지. 목숨 붙여준 게 어디라고! 은혜도 모르고!”

분에 겨워 씩씩거리는 로지를 바라보던 클로이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게 원하는데, 들어주지 그랬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죠. 아가씨.”

“왜?”

“……대외적으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벌을 받은 거잖아요. 전 황후라지만 죽이면 제국민이 동요할 거예요.”

“그냥, 황후가 화병으로 죽어버렸다면 안 됐나?”

심드렁한 클로이의 말에 로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안 되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합당한 처벌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제아무리 지위가 박탈되었다 해도 사람들은 ‘황후’로 기억해요. 그런데 반란도 아니고 이 정도 수탈에 황후를 죽이면 과하다고 생각해요.”

클로이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그때였다.

“반역이라고 해버리지. 왜 감춘 거야.”

“그러게요.”

“쓸데없이 마음만 좋은 남자 같으니라고.”

“그럴 리가요.”

툴툴거리는 클로이의 말에 대꾸를 한 건 언제 들어도 손끝이 저릿해지는 미성이었다.

“폐하?”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클로이가 화들짝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클로이의 단장을 돕던 로지는 허둥지둥 베일을 내려 클로이를 감추려 애썼다. 부산한 소리에, 레이얼이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짧게 덧붙였다.

“로지 양. 등을 돌리고 있답니다.”

“예예. 아주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은 말투였으나 레이얼은 못 들은 척하며 웃었다.

“전해줄 게 있어서 왔어요.”

“굳이 지금 말씀이시죠?”

웃음기 어린 클로이의 타박에, 레이얼도 같이 웃었다.

“응. 르웰린 공왕이 건넨 거라. 나도 방금 받았거든요.”

“뭐?”

르웰린 공왕이면 내쉬가 아닌가? 클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여과 없이 내비치긴 했으나 인물이 인물이다 보니 로지도 클로이를 말리진 않았다.

“받아요.”

레이얼은 제 등 뒤로 바짝 다가선 클로이를 향해 뒤로 뻗은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편지가 한 통 끼워져 있었다.

“이걸, 내게……?”

“전해달래요. 공왕은 아직 즉위 전이라, 신분이 없어서 국혼에 참석할 수 없으니 황성에서 나가야 했거든.”

수도에 내걸린 근조기가 걷히는 것과 동시에, 내쉬는 공국을 꾸릴 이들을 데리고 황성을 나섰다. 애도 기간에 공국의 탄생과 같은 경사가 생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공국을 꾸리는 데 필요한 관료들을 선발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건 나중에 레이얼이 내려주어도 상관없었다. 일단 르웰린은 황실직할령으로 관료가 배정되어 있으니까. 내쉬가 참석을 바라고, 레이얼이 그의 참석을 원했다면 약식으로 즉위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쉬가 원치 않았고 레이얼 역시 강권하지 않았다. 내쉬는 무리한 참석 대신, 레이디 아르네에게 전해달라며 편지 한 통을 남겼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단호했기에 레이얼은 내쉬가 자의로는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손끝에 걸린 편지가 살갗을 스치고 빠져나가고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작은 한숨 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이내 손가락 사이로 편지가 돌아왔다.

“읽어봐요.”

“내가?”

“응. 폐하도 보는 게 좋겠어.”

레이얼은 클로이가 쥐여준 편지를 펴들고 소리 내 읽었다.

“도둑질뿐만 아니라 취조에도 상당히 소질이 있던데? 정보부에 자리가 나면 잊지 않고 지원하도록 해. 물론, 고맙다고는 하지 않을 작정이야. 하지만, 2대 공왕의 임명식날 날이 좋다면, 조카의 탄신년에 주조한 빈티지는 한 병 보내어주지.”

편지를 다 읽은 레이얼은 작게 신음했다.

“이게 대체…….”

“……그렇지?”

행간과 자간 사이에 빼곡히 들어찬 거리감이 아득하다.

“불경죄로 잡아들일 거야?”

“불경죄?”

“응. 폐하의 속을 상하게 했으니 불경죄지.”

“내가 그럴 리…….”

“그럼 내가 기분 나쁜 거로 하자.”

클로이는 부정하는 레이얼의 말을 뚝 잘라버렸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다음번 시찰을 공국으로 잡는 것도 좋지.”

“…….”

분한 듯 씩씩거리는 말에도 레이얼은 아무 소리도 내주지 않았다. 클로이는 아직 레이얼과 내쉬의 사이를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했다. 그들은 캐서린이나 선황제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밖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감정의 골이 깊은 게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 관계를 억지로 뜯어내 레이얼에게 상처를 내는 건 싫었다. 반쪽이긴 하나 이 하늘 아래, 레이얼의 오직 유일한 혈육은 내쉬 르웰린뿐이니까. 작고 귀여운 꼬마 시오도르가 생긴다고 해도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완벽히 홀로된 레이얼에게 내쉬는 동시대를, 그리고 유년을 나누는 유일한 가족이 될 터였다. 이건 그래서 부리는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로이.”

“응.”

“난 캐서린의 목을 자르고 싶지 않아.”

“알아.”

“왜냐하면, 내가 그간 당해온 고통은 죽음보다 더 지독했거든. 그녀에게 완벽히 돌려주진 못하더라도…… 그 괴로움을 맛보길 바라. 평생에 걸쳐, 천천히 뼈저리게.”

“응.”

“하지만…….”

“레이얼 시오도르. 당신은 황제잖아.”

늘어뜨린 레이얼의 손가락 사이로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아귀를 파고든 클로이의 손은 희고 가늘지만, 단단하고 살짝 거칠었다. 손끝을 스치는 버석한 감촉에 레이얼은 술렁이던 마음이 다독여지는 것을 느꼈다.

“원하는 대로 해도 돼.”

“…….”

“누구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한 번쯤은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마치 레이얼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 줄 안다는 듯, 클로이는 한 번쯤이라고 살짝 덧붙이며 손톱으로 그의 손바닥을 긁었다.

“만약 폐하가 엇나간다면, 내가 놓치지 않고…….”

“붙잡아 줄 거야?”

“아니? 정신 나게 때려줄 건데? 뭘 말로 해.”

번번이 그런 걸 잊어버리는 이유가 뭐야? 짓궂은 말에 강직되어있던 반듯한 어깨가 한결 부드럽게 처졌다. 클로이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툭, 레이얼의 어깨를 쳐주었다.

“이제 그만 가 봐. 늦었어.”

어느덧 해가 정수리를 비출 만큼 높게 떠 있었다. 캐서린의 발악에 다들 깜빡했지만, 오늘은 그들의 성혼일이었다.

  수도의 거리거리마다 달렸던 검은 근조기는 흰 바탕에 황금빛 실로 황가의 문양을 수 놓은 국기로 바뀌어 달렸다. 햇살도 바람도, 그리고 기분도 너무 좋았던 날. 젊은 황제는 애도 기간이 끝나자마자 궐문을 활짝 열어 하객을 맞이했다. 오늘은 황제와 황후의 성혼날이었다. 제국민들은 황궁 앞에 빼곡히 모여 발끝을 잔뜩 세워 보이지도 않는 궁 안 사정에 환호했다. 그도 그럴게, 시오도르와 아르네의 결합이었다. 무너져내리던 엘피디오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두 가문은 기어이 제국을 새로이 다지지 않았던가.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기에 시오도르 황조를 열고서도 제국의 이름은 그대로 엘피디오를 따랐다. 그래서 엘피디오는 같고도 다른 제국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는 중이다. 비록 길롯과 선황의 실책으로 한때 흔들리긴 했으나, 사람들은 이 제국의 시조인 시오도르와 아르네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둘이 하나가 된다니 다들 설렐 수밖에. 원래라면 황궁 담에 기어오르거나 문을 기웃거리는 일이 가능할 리 없건만 오늘은 근위대도 그 마음을 알아 슬그머니 눈감아주었다. 밖에서 흐릿하게도 보이지 않는 본궁 안 역시도 소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머나……. 지금 저게 무슨 일이죠?”

“세상에나!”

파닥파닥파닥. 귀부인들의 눈이 한껏 부릅뜨여 연회장 입구에 박혔다. 국혼은 황좌에 앉은 황제가 연회장을 걸어들어온 황후에게 황후의 관을 내리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황제는 황좌에 앉아 황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무려 에스코트하고 있지 않았나! 당연하게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은 아르네 공녀는 심지어 단상에 놓은 황후의 관을 제 손으로 썼다. 황제가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저것에 아무 의미가 없을 리가 있나! 모두의 턱이 경악에 툭 떨어져 하나같이 바보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황후’가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을 가로질러 단상에 오른 후 입을 열었다.

“나, 클로이 디 레나나 아르네는, 엘피디오의 황후가 되어 이 한 몸 바쳐 제국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 바이오.”

황후가 되면 모두 남기는 맹세였다. 아르네가 내준 황후의 맹세는 다소 짧고 평범했으며, 목소리에 웃음기가 한껏 물려 다정하게 울렸다.

“아르네로 살던 그때처럼.”

그런데 어째서일까. 빙긋 웃는 황후의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등골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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