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매정한 속삭임과 다정한 목소리2021.10.08.
“나쁜 선례겠군요.”
긍정하는 레이얼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르네 공작의 말이었다. 제국의 검을 자청하며, 그 누구보다 제국에 헌신하는 아르네. 선황의 명에 공작과 소공작이 죽다 살아났음에도 황실에 날을 세우기는커녕, 당연하게 보좌하며 ‘제국’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아르네. 시오도르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 몰라도 아르네는 아니다. 바르벨 후작은 낭패감에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오늘 대 회의가 끝나면, 지방 별장으로 내려가 칩거라도 해야 하나 심란한 생각을 이어가던 때 끝난 것 같던 아르네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폐하.”
“음?”
“이제 막, 즉위하시었고 이미 많은 자를 쳐내셨지요.”
황제와 아르네 공작의 시선이 마치 매인 듯 한데 얽혀 떨어지지 않았다.
“단호하게 칼을 휘두르는 것도 좋지만, 이쯤에서 군주의 자비를 보여주심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하. 순간 회의실을 울리던 나직한 탄성이 누구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비를 보이라…….”
“예, 폐하.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길롯의 죄로 전 황후와 황자님까지 처벌하는 건 비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긴 대외적으로 길롯을 중용한 것은 병사한 선황이시지.”
병사했다는 대목에 유독 힘을 줘 발음한 것을 누가 알아들었을까. 레이얼은 미소짓는 표정 그대로 느릿하게 입을 때였다.
“자비를 보이라는 아르네 공작의 말에 일리가 있어 뵈는군. 이베트 후작의 생각은 어떠한가.”
“폐하의 의중에 따를 것입니다.”
완곡한 지지였다. 레이얼은 이베트 후작의 말에 고민하듯 턱을 괴곤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내쉬 황자의 복권을 바라는 이들에겐 일분일초가 억만년같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침묵을 가르고 레이얼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캐서린 전 황후는 길롯 백작의 일에서 무고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간 정황상, 길롯 백작을 통해 상당 부분을 함께 착복하였다. 그 자금이 어디로 흘렀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것으로 안다. 이런 이에게까지 자비를 보이는 것은 미련한 짓이지.”
잠깐, 숨을 고른 레이얼은 기다리던 내쉬의 거취를 밝혀주었다.
“다만, 내쉬 황자의 경우 그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거나, 동조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아량을 베풀어 그를 황실의 핏줄로는 인정하되 ‘모후’의 출신이 불분명한바 황위 계승권은 영구히 거둬들인다.”
귀를 쫑긋 세운 귀족들 사이로 희비가 썰물처럼 번졌다. 내쉬 황자가 복권된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반쪽짜리 복권이었다. 말뿐인 황족이랄까. 하지만 불만을 제기할 상황이 아니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 레이얼이 터트린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렇게까지만 하게 되면, 내쉬 황자의 처지가 무척 곤궁해지겠지.”
아량을 베푸는 듯한 레이얼의 말에 침통하던 이들 사이로 화색이 번졌다.
“이대로라면 내쉬는 대공도 되지 못할 것이니 말이야. 하지만 대공좌는 분명히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에 내려지는 것이니 그는 허락할 수 없어.”
쥐락펴락하는 것이 여간 능숙한 게 아니었다. 정직하게 목청을 높이던 청년은 혹독한 시간을 지나며 능구렁이 같은 지배자로 자라나 버린 모양이었다. 레이얼 황제의 한마디 한마디에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는 귀족을 보며, 아르네 공작과 이베트 후작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그를 외국에 보내는 것도 가혹하지. 해서, 내쉬에게 짐은 ‘공국’을 내리려 해.”
“공국이요?”
이것은 정말 생각지 못한 소리라 이베트 후작이 불쑥 되묻고 말았다.
“그렇소, 후작. 남부의 르웰린을 알고 있습니까?”
“아…….”
섬이라고 하기엔 덩치가 크고, 영지라 하기엔 대륙과 떨어져 있어 그 가치가 미묘한 지역이다. 물자가 배로 움직여야 하기에 관리가 쉽지 않아 황실 직할령으로 묶여 있으나 토질 자체는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한 편이다. 대공좌는 줄 수 없고 그렇다고 황가의 피가 섞인 이를 귀족으로 강등하기도 모양새가 나쁘다. 공왕이라면 그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하지 않나. 내쉬에게서 보는 혈족은 대대로 황위 계승에 눈을 돌리지도 못할 테고, 귀족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 애초에 황위 찬탈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미 길롯가에 얽힌 이들이 하나같이 바닥없이 추락했음을 고려하면 넘치도록 자비로운 처사였다. 내쉬에게만. 내쉬 황자를 복권해 살길을 도모하던 이들은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정확히 자신들이 말한 그대로 파격적일 만큼 자비로운 처분이 아니었겠나. 덕분에 사람들은 끝까지 황후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다.
대회의가 마치고 사람들을 물린 레이얼이 향한 곳은 내쉬가 구금된 곳이었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려고?”
석 달 만에 만난 내쉬는 첫마디에 입매를 비틀었다. 예전처럼 신경질적인 말투를 쓰고 있음에도 잔뜩 여위어서일까. 내쉬는 어딘지 처연해 보였다. 레이얼은 또 한 번 내쉬 위로 제 모습이 덧씌워지는 착각을 일으키고 말았다.
“형을 집행하다니.”
“가둬놨다고 귀까지 먹은 건 아니라서.”
어깨를 으쓱한 내쉬는 손가락으로 제 귀를 가리켰다.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며 간수들이 쑥덕이는 것을 죄다 들었다는 의미였다.
“길롯 백작과 연루되었던 자들을 다 쳐냈다지? 이제 남은 건 나와 어머니뿐이잖나.”
“…….”
레이얼은 내쉬의 말에 대답 대신 한 발짝 다가섰다. 창살을 둔 채 마주 선 그들의 거리는 한 팔 간격도 되지 않았다. 호위 기사가 만류하듯 불렀으나 레이얼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떼 거리를 좁혔다.
“사랑했니?”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했으나, 찰나에 내쉬의 뺨이 굳었다.
“사랑해서 그랬어?”
레이얼의 질문에 내쉬는 반보쯤 물러섰다. 하지만 시선은 엉킨 그대로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굳은 듯 서 있던 내쉬는 문득 거친 숨을 터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레이얼은 그 모습을 망막에 새기기라도 하듯 집요하게 좇았다. 흔들리던 눈동자, 가늘게 떨리던 입술, 찰나에 희게 질린 작은 얼굴. 충격받은 모습이 확실했다.
“……데도 왜?”
나직하다 못해 레이얼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버렸다. 하지만 발음만은 선명했기에, 잘린 앞부분은 고의였으리라. 레이얼이 한발 다가서고, 내쉬가 한발 물러섰다. 다가간 만큼 멀어졌기에 그들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철컹. 레이얼이 창살에 가로막히며 거슬리는 쇳소리가 울리자, 내쉬는 차라리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왜?”
정황상 레이얼은 내쉬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내쉬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를 방심시키기 위해서 오랜 시간 황위에 관심이 없는 척 연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곧 아님이 드러났다. 내쉬는 그에게 이를 드러내긴 했으나, 황위를 잡기 위해서라고 보기엔 행보가 미묘했다. 마치 그의 피앙세를 탐내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와 행동에 레이얼은 이성을 잃어버렸음을 이젠 인정한다. 그로서도 난생처음인 갈망 아니었겠나. 조급하게 치미는 감정에 휩쓸려 내쉬에게 날을 세웠지만, 모든 것이 정리된 지금. 그리고 검을 겨누던 그때를 기억하는 지금엔, 그마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찾아온 길이다. 황위도, 아르네 공녀를 마음에 품어서도 아니라면.
‘주어진 게 온통 저런 거뿐이면 너무 했잖아요.’
‘나도 하나쯤은 괜찮은 것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왜?”
등 돌린 내쉬를 향해 묻는 레이얼의 목소리가 옅게 흔들렸다. 캐서린 황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길롯이 얼마나 조악한 성품을 가졌던지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안다. 겪어보았으니까. 그래서 되묻는 지금 알아버리고 말았다. 제국 제일가는 권세를 부릴 수 있는 내쉬가, 그날 밤 제게 쏟아냈던 ‘이기적인 어리광’이 무슨 의미인지. 눈에 씌었던 조급함이 가시자마자 이렇게나 선명하게.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로 일평생을 방탕하게 살았던 길롯 백작과 그에 치여 결핍된 채로 성장한 캐서린 황후. 그리고 제 권좌에 눈이 먼 편협한 황제. 그 누구도 양육자론 적합하지 않다. 레이얼은 오래전의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내쉬가 아직은 세상을 향해 가시를 두르기 전의 일이었다. 캐서린 황후가 해준 커다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하고 와서 제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때요? 5캐럿에 브릴리언트 컷이래요.’
그날 내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쩍여,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제대로 눈에 들오지도 않았다. 마치, 캐서린 황후 옆의 내쉬, 본인처럼. 공작새처럼 꾸며놓은 아이는 온갖 호화로운 것을 두르고도 슬퍼 보여, 그날 레이얼은 자신답지 않게 다정히 대답해주었다.
‘황후께서 굉장히 고심해 고르신 티가 역력한걸? 네 눈 색과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찰나에 스치던 수줍고도 기쁜 기색에 레이얼의 마음이 한층 측은해졌다면 그는 믿으려나. 그래서 레이얼은 캐서린 황후에게 그렇게 시달리고 길롯에게 내몰리면서도 내쉬만은 미워할 수 없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에 당연한 경계는 했을지도 모르나 정말 미워하지는 못했다. 고귀하지만 더없이 외로운 것이, 제 모습과도 닮고. 어떤 날은 저보다도 괴로워 보여서. 격전의 날 내쉬를 베어버리자고 마음먹었다면 수백 번 수천 번도 넘게 베었을 테지만 끝까지 그러지 못한 건, 그래서였을까. 모든 것이 끝난 지금 후환을 남겨두지 말라는 간언에도 기어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그를 구명하려는 건 그래서였을까.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훗날 자신의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얼은 알고 있었다. 지금 내쉬를 외면한다면, 평생 후회하고 말 거라는 걸. 그러니까 이건 당연하고도 지극히 이기적인 결론이다. 절대 내쉬를 안타까워하거나 때아닌 측은함 때문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자고 벌이는 일뿐이다.
“이유가 어쨌건, 죄를 묻지 않을 순 없어.”
“……형님의 자비는 제게 닿지 않을 거라고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셨잖아요.”
“맞아. 그래서 난 네게 대공 자리를 주지 않을 거야. 남부의 르웰린으로 가. 말뿐인 공국을 내릴 거야.”
“……공국?”
“이 제국엔 네 자리를 주지 않을 거야. 내쉬. ”
“…….”
“네게서 시오도르의 성을 거둬드리고, 르웰린을 내리지.”
“내쉬 르웰린?”
“가. 네게 내릴 자비 따윈 없으니. 내 제국에서 나가.”
레이얼의 말에, 내쉬의 얼굴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붉어진 눈꼬리며 가늘게 떠는 입술이 마치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자비가 아니면……뭔데?”
“난 널 추방하는 거야 내쉬. 네게서 왕위계승권도 빼앗고, 고귀한 태생도 박탈했어. 그리고 이제 내쫓는 거야.”
“날?”
“그러니 모두 두고 가렴.”
날벼락 같은 소식인데, 내쉬는 눈이 벌건 채로 웃었다. 오만한 미소와 매정한 속삭임과 달리 레이얼의 눈빛이 슬퍼 보여서인지. 그도 아니면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고마워 형님.”
그러나 제 입술 새로 흘러버린 이 눈물과, 이 말은 진심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