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노골적인 북부인과 비열한 수도 놈2021.10.15.
‘조심하오.’
‘지켜보지.’
유독 시선이 오래 머문다 싶으면, 클로이는 어김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레이얼은 황후가 된 첫날부터 아주 쥐잡듯 잡으려는 클로이를 보며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천천히.”
“글쎄 난 북부 출신이라 그런 거 모르겠어. 폐하.”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좌에 앉아 줄이어 건네는 하례를 받는 레이얼과 클로이는 아름답고 근엄하고 더없이 고아했지만, 티 없이 입술을 달싹이는 대화는 애석하게도 점잖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할 일도 아닌걸.”
“평생 끌고 갈 일도 아니지. 기회가 있을 때 잡아두어야지. 북부식. 좋다더니?”
레이얼에게만 들리게 속삭인 클로이가 제게 인사를 건네는 오겐 백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번도 손등 키스를 허락하지 않은 황후였다. 그런 그녀가 허락한 이가 다름 아닌, 오겐이라니? 술렁이는 소란을 둘러본 클로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인 오겐 백작에게 재촉이라도 하듯 손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대신이라는 말로 나를 폄하하지도, 아쉽게 스러진 영애를 위해서라는 말로 거창하게 굴지도 않겠네. 다만, 그 어떤 때보다 명예롭게 이 자리를 지켜보이겠네.”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지는 말을 따라 오겐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져 클로이가 말을 마쳤을 때 그는 거의 구겨진 종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폐하.”
눈꼬리가 벌겋게 달아오른 노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클로이의 손등에 입맞춤을 남겼다. 차례로 비운의 여섯 가문 가주에게 손등 입맞춤을 허락한 황후는 또 한 사람을 찾았다.
“키릭슨 고어.”
하얀 손등이 그에게 내밀어졌다.
“저는…….”
머뭇거리며 레이얼의 표정을 힐끔 살피는 키릭슨을 향해, 클로이가 온화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옆에서 모두 들었을 테지. 오겐 백작이 오늘부터 눈을 반짝이며 나만 바라볼 테니, 그대가 도와주오.”
여섯 가문중 굳이 오겐 백작을 언급한 건, 속사정을 다 알아서라고 믿어도 될까? 키릭슨의 추측은 레이얼의 옅은 미소에 확신이 되었다. 키릭슨은 경애와 신의를 담아 황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확인해주지 않아도 좋은데.”
굳이 오겐 백작과 비슷한 감사를 남기며 그와 한 가족임을 드러낸 키릭슨을 향해 클로이가 부드럽게 웃어주는 것으로 ‘여섯’ 가문에 대한 인사를 끝냈다. 황후는 그날 여섯 가문 외엔, 아무에게도 손등을 허락해주지 않았으며 황제는 아르네 공작과 이베트 후작 외엔 포도주를 내리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제와 황후는 은원에 대한 계산이 확실했다. 특히, 황후 쪽이. 이는 귀족사회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행보라니. 아무리 아르네라고 하나, 이건 파격적이다 못해 천박한 행태가 아닌가. 품위와 교양은 어디에 두고 예법 따윈 배우지도 못한 꼬마들이나 할법한 태도인지.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고 옛버릇 그대로 눈살을 찌푸리던 귀족들과 클로이의 시선이 맞닿았다. 여름 하늘을 닮은 채도 높은 새파란 눈동자가 차게 빛을 뿌렸다. 먹이의 목덜미를 물어 숨을 끊어버리기 직전, 짐승의 안광처럼 무자비한 빛을 본 순간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뒤늦게 기싸움에서 밀린 듯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찰나. 클로이가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난, 길롯처럼 무르지 않지.”
금기시되어있던 이름을 턱 하니 올린, 황후는 손을 들어 오늘 황제가 끼워준 결혼반지를 보여주었다. 하얀 손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커다란 핑크빛 다이아몬드가 찬란히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고작 금광 따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은 황후라 돈이 아쉽지도 않고.”
말끝을 길게 늘인 클로이가 아랫단을 차지하고 있는 아르네 공작과 소 공작에게 시선을 맞대며 작게 웃었다.
“사병 따위를 끌어모아야 할 만큼 비루하지 않은 출신이라, 참고 웃음을 흘릴 이유도 없고 눈치를 봐야 할 연유도 없소.”
아르네 공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귀족들을 바라보는 클로이의 얼굴엔 다시 미소가 싹 걷혀 싸늘해져 있었다.
“그리고, 난 타고나길 북부의 아르네로 그대들보다 신체 능력도 좋아.”
말끝에 손가락을 곧게 뻗어 오랑그리 후작 부인을 지목한 클로이는 입꼬리를 비틀어 속삭였다.
“북부 출신이라 수도 사교계를 잘 모르나 봐요. 교양 없이 턱턱 말을 내뱉는 것 좀 보세요. 수준하고는.”
흉내내는 말에 화려한 부채 뒤에 숨어 있던 오랑그리 후작 부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짐이 그대를 품을 이유는 없겠지. 그러니 그대는 앞으로 내가 참석하는 모든 연회에서 빠져주시오.”
나 역시, 그대의 연회에는 발걸음하지 않을 테니. 말은 그럴싸했으나, 사실상의 사교계 사형선고였다. 제국 내 가장 화려하고 가장 유명한 연회는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였다. 그곳에서 배제된 귀족 부인을 누가 불러줄까?
“폐하. 폐하. 제가 그만……!”
“……방금 듣지 못했소? 내, 연회서 빠져주시오.”
클로이는 제 앞에 달려와 엎드려 비는 후작 부인을 내리깐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공을 휘적이는 가는 손가락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모멸적인 축객령.
“폐하. 폐하.”
캐서린 황후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수도 사교계의 주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오랑그리 후작 부인이 아니겠는가. 후작 부인은 눈앞이 캄캄해져 체면이니 뭐니 하는 건 다 버리고 애걸하듯 클로이를 불렀다. 캐서린 황후에게 그러했듯, 수도 출신이 아닌 젊은 황후를 좀 길들이려던 건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르네가 내준 황후는 ‘귀족식’ 화법에 짓눌리는 게 아니라 아예 부숴버렸다.
“뭐 하는가?”
어떻게든 매달려 위기를 넘겨야 한다.
“폐하, 제가 잘……!”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올리던 후작 부인은 자신을 부축하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맙소사.”
그래 정말 맙소사다. 다가온 손길은 부축하는 게 아니었고, 손길의 주인은 남편인 후작이 아니라 근위 기사대였다. 그녀는 지금 끌려 나가고 있다! 남편인 후작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그는 자신을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불똥이 제게도 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아…….”
‘제깟 게 설쳐봤자지.’
황성을 들어서며 후작이 읊조렸던 소리가 이렇게 선명히 떠오르는데. 가소로워서가 아니라, 겁먹어 내지른 허세였나? 근위 기사들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맥이 풀린 다리가 걷기는커녕 제대로 몸을 지탱하지도 못해 후작 부인은 기어이 끌려 나가고 말았다. 후작 부인이 연회장을 나서고 나서도 사방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대.”
“네, 폐하.”
그때 황후를 부른 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황제였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그때. 황제는 황후를 향해 더없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북부식.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도 황후는 얼마든지 이럴 수 있다는 황제의 간접 허락이 떨어지던 순간 극명한 희비가 연회장에 깔렸다.
“당연하죠.”
물론 웃는 건 황후, 클로이였다.
“오…… 우리 귀염둥이가.”
엘리오는 웃는 얼굴을 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아르네 공작에게 징징거렸다. 유랑악단이 선보인다던 복화술이 이런 건가 싶을 만큼 신기한 모습이었다. 아르네 공작 역시 단상 위 황좌에 앉아 거침없이 귀족들을 다루는 클로이의 모습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했기에 엘리오를 탓하지 않았다. 솔직히는 그도 울고 싶었으니까.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걸까. 언제나 그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르네가 아니었나. 황위 찬탈과 맞물리는 바람에, ‘어어’ 하다가 그만 클로이를 내어주고 말았다. 그런 급박한 사정만 아니었어도 아르네 공작은 클로이를 이렇게 빨리 결혼시킬 생각이 없었다. 정말 요만큼도. 왜냐하면 황실의 권력 싸움이나 제국의 어머니라는 큰 중책을 맡기기에 클로이는 작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여리기 때문에, 일찍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라고 해야 하나. 길롯과 캐서린 전 황후가 미친 짓을 벌이는 바람에 ‘아버지’의 마음은 깔끔하게 접고 아르네 공작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랬기에 대회의장에서 레이얼 시오도르가 상의도 없이 국혼일을 이야기 했을 때도 동조했었다. 제국의 귀족 중 절반에 가까운 자가 쓸려나가고, 황제의 승하 후 후계싸움 끝에 황실이 텅 비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르네 공작은 도저히 사적인 감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우리 아기. 앙칼지게 말하는 거 봐.”
근위대 기사를 시켜 오랑그리 후작 부인을 끌어내는 모습을 보며 엘리오는 또 한 번 감탄도 탄식도 아닌 묘한 것을 중얼거렸다. 아르네 공작은 무심결에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기 위해 무척 애썼다. 그런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해서인지, 자꾸 아르네 공작이 아니라 클로이 아빠가 불쑥 불쑥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냥 내버려 둬도, 이 오빠가 알아서 다 해결해줄 텐데.”
“……적당히.”
“아버지 서운하지 않으세요?”
“…….”
“지금 기분 같아선 날파리 핑계라도 대고 한 방 먹이고 싶어요.”
엘리오의 시선은 정면에서 절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주어도 없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지금 엘리오가 말하는 게 누군지 모를쏘냐.
“대신 맞아드리면 낫겠습니까.”
그러나 옆에 서 있던 이베트 후작이 슬그머니 끼어든 건 의외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르네만큼은 아니나 이베트도 예전엔 문무를 겸한 가문이었습니다.”
요는 다 들렸다는 거다. 뭘 말하는지도 다 알아들었고. 그리고 엘리오는 아직 연륜이 쌓인 노후작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그의 목덜미는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죄…….”
“아이의 투정에 정색하시다니요. 짓궂으십니다.”
엘리오의 사과를 뚝 자르고 끼어든 건 아르네 공작이었다.
“뭐래도 좋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도움만 될 수 있다면.”
“아르네의 충심은 언제나 제국을 향해 있지요. 그릇된 길만 아니라면 언제든 아르네는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
아르네 공작은 자신을 바라보는 노후작에게 빙긋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탰다.
“이번처럼.”
“……하면, 이 늙은이는 황후의 절대 지지자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어떻겠습니까?”
후작이 뭉그러뜨린 건 황제를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현명하고 어진 군주라던 줄리아나 황후를 키워내고, 그녀의 행보를 기꺼이 받쳐주었던 가문이 아니었나. 그런 이베트 후작의 황후 지지 선언은 굉장한 것이었다. 클로이는 수도 태생이 아닌 것도, 레이디로 활동했던 것도 모두 이베트가의 비호 아래 묻힐 것이다. 이것만큼은 아르네가 해 줄 수 없는 것. 아르네 공작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이베트 후작과 시선을 맞추었다.
“평소 교활하다는 소리를 좀 들으시지요?”
“고집쟁이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보통 북부에선, 이러지 않지요.”
“아아, 압니다. 황제께서도 좋아하는 북부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베트 후작은 주저 없이 아르네 공작에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도와주시지요.”
아르네 공작은 쏠리는 사람들의 이목에 문득 얼굴을 굳혔다. 북부인들은 단둘이 있을 때 무릎을 꿇을지언정 시선을 이용해 압박하지 않는다. 이, 비열한 수도 놈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못해 건네는 공작의 인사엔, 이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