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나쁜 선례를 만들지 마십시오2021.10.05.
오래는 있을 수가 없었다. 클로이는 예비 황후이며, 수도를 뒤집었던 ‘레이디’로 그 명성이 쟁쟁했다. 그녀를 주시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말은 까딱하면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길롯의 일파로 쓸려나가지는 않았으나, 아직도 건재한 이들이 한참 남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 클로이는 레이얼보다는 덜 위협적이지만, 그들의 앙심을 쏟아붓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상대였다. 레이얼을 치면 반역이지만, 아르네 공녀를 망가뜨리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직까진. 그 사실을 레이얼이나 아르네 공작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들은 그 위험성에 대해 클로이에게 충분히 주의시켰고, 또한 방비책도 마련해두었다. 혼인무효가 된 캐서린 전황후와 내쉬 전황자의 처벌을 계속 미뤄둔 것도 그래서였다. 분노한 이들을 온건히 다루려면 ‘희망’이라는 이름의 ‘목줄’이 필요했으니까. 덕분에 그들이 클로이에겐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으나, 앙심은 여전했다. 눈이 벌게져서 클로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는 이들에게 굳이 먹이를 줄 필요는 없었다. 클로이는 빠르게 움직였다. 황성의 담을 넘기 전, 내쉬가 구금되어 있다는 별궁이 눈에 들어오긴 했으나 구태여 고개를 돌려 보진 않았다. 사정은 어쨌건 간에 그들의 길은 갈렸고, 클로이는 레이얼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국혼을 올리게 되면 클로이는 더 이상 아르네가 아닌, 시오도르. 즉 황족이 된다. 그렇게 되면 더는…….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별궁 쪽으로 돌아가려던 고개를 힘줘 바로 잡은 후, 발을 힘껏 굴렀다. 혹독한 겨울은 어느새 봄에 차근히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담을 뛰어넘던 순간, 폐부를 가득 채우던 숨이 이상하게 시려 가슴이 울렸다. 찡하게 울리는 명치가 기분 나빠 손으로 쓱쓱 문지르고 나서야 클로이는 다시 달릴 수 있었다.
클로이가 황궁담을 넘자마자 레이얼은 곧장 키릭슨을 불러 다이아몬드를 넘겼다. 결혼반지로 쓸 거니 서두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벽에 불려 나온 키릭슨은 황망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정신이 나지 않는 게, 잠이 덜 깨서인지 아니면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 때문인지, 며칠 만에 성혼반지를 완성해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
“성혼 축하 선물이야.”
레이얼은 오랜만에 보는 키릭슨의 바보 같은 표정이 마음에 쏙 들어서 전에 없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콰이펄른을 앗아가며, 선황께서 광산을 내렸던 것을 기억하나? 그때 받은 게 바로 세크레스다.”
이거로는 부족하다.
“세크레스는 모두가 알다시피 괴수의 둥지라 첫 두 점을 채굴한 이후 버려진 거나 다름없었지. 그런 쓰레기를 마침, ‘레이디’가 달라니 거절할 이유가 있었겠나.”
“아아…….”
키릭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이라면, 아니 아르네를 제외한 제국민 모두에게 세크레스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조롱하려 내린 광산임을 그라고 해서 모를 것인가? 그런 것이니 달라면, 줄 수 있었을 테다. 마침 받아 간 것이 레이디 아르네였을 뿐이고.
“아르네가가 세크레스에서 채굴한 건가요?”
“첫 채굴품이지.”
“……아름답습니다.”
백번을 더 말해도 부족하다 싶은 광채였다. 다이아몬드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은 이미, 깨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태 탐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키릭슨은 그 명제를 수정하기로 했다. 제가 탐낼만한 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레이얼이 건넨 핑크 다이아몬드는 눈이 멀 만큼 화려하고도 화사했으며 더없이 매혹적인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제대로 잘,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건조한 말이나 레이얼은 키릭슨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어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장에 날이 밝으면 내로라하는 보석 세공사는 죄다 잡혀 오다시피 하겠지. 눈에 선한 풍경에 살짝 미소 짓던 레이얼이 넌지시 물었다.
“성혼예복은?”
“이미 제작 중입니다.”
이것 봐.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는 대답에 기어이 젊은 황제에게서 매혹적인 웃음소리가 새 나왔다.
길롯 일파를 도려내고, 세율을 손보고 국혼까지 마무리 지었다. 제국민들은 황궁 담벼락에 국혼 일이 적힌 것을 보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제야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봐서 황실은 큰일은 죄다 끝낸 모양새라, 이제야 한숨 돌리겠거니 생각할 만큼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속사정을 모르는 제국민이나 할 소리였다. 아직 황궁 내엔 끝나지 않은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전 황족의 처분’
레이얼이 의도적으로 유예했던 의제가 국혼일이 정해진 이후 대 회의장에 거론되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폭탄 같은 일을 벌일 줄 몰랐던 귀족들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좋겠느냐 물었소.”
그나마 사람다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미리 언질 받았던 아르네 공작과 이베트 후작, 그리고 중립파 귀족 소수였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도 그다지 밝진 못했다. 국혼을 치르기 전 아닌가. 겨우 며칠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쥐도 궁지에 몰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아르네 공작은 클로이 생각에 굳은 얼굴이 도통 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의제에 관해 귀띔만 들었지 어찌 결론을 내리겠다는 것까진 듣지 못한 터라 입을 떼기도 어렵다. 아르네 공작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레이얼에게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황좌에 앉은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옅게 미소 지은 얼굴은 오늘도 조각상 같이 아름답기만 하고 도통 생각이 읽히지 않는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는 사이, 침묵에 짓눌린 누군가가 말문을 열었다.
“사생자 아닙니까? 황족의 면책특권에도 해당 없으니 사형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생자라니요! 말조심하세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대회의장은 벼랑 끝에 내몰린 쥐 떼들과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삽시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오가는 말이 비수보다 날카롭고, 매서웠다. 이건 양쪽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죽여야 합니다! 어디 자비를 베풀 데가 없어서!”
“자비? 자비라니요! 마땅한 권리를 누가 뺏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은 원래 황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던 분입니다! 그런 말장난으로 감히 누굴!”
과열된 분위기에 그만 터져선 안 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쩡. 공기를 반으로 갈라버릴 듯 힘껏 내지른 고함에 일순 대회의장에 서늘한 적막이 찾아왔다.
“말장난.”
이베트 후작의 나직한 소리에, 아르네 공작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감히.”
목에 핏대를 세우던 이가 이베트 후작과 아르네 공작의 혼잣말에 삽시간에 희게 질려버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평생을 ‘말장난’에 놀아나야 했던 황제 앞에서 ‘감히’ 말이다.
“바르벨 후작이었던가?”
운이 좋게 빠져나간 작자였다. 뻔뻔하게 다이아몬드 광산을 갈취해놓고선 겨우 두 주먹 정도 집어온 ‘레이디’를 향해 날강도니 온갖 소리를 했다고 했던 양심도 없는 작자. 길롯 백작에게 다이아몬드를 가져다 바치고 슬쩍 얽혀 보려 했으나, 레이디가 털어버리는 바람에 눈총만 가득 받았었다지. 결국의 길롯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이번 숙청을 피해간 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가 길롯의 패거리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나? 저자가 내쉬 황자의 복권에 목을 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운이 좋아 피해갔으나 곧, 어떻게든 쓸려나가리라는 것을. 길롯가가 감히 황제의 제국을 수탈하였음을 명명함으로써, 그 일가와 연루된 이들이 죄다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받았다. 제국을 주름잡던 길롯과 황후의 말로가 저런데, 한갓 후작 따위의 끝은 안 봐도 뻔한 게 아니겠나. 불안한 후작의 속내가 투명하게 읽혀 레이얼은 내리깐 눈을 부드럽게 접어 웃었다. 바르벨 후작은 레이얼의 미소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해서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폐하.”
“황가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독보적이군.”
부드러운 말씨였으나, 그것이 호된 질책보다 매섭게 울렸다.
“그래서 후작의 의견은 뭔가? 사방에서 왁왁거리니 골라 듣기 쉽지 않아.”
느른한 목소리에는 여유와 웃음이 물려있었다. 주제 모르는 것들이 감히 희망을 꿈꿔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주눅 들었던 후작 역시 그 목소리에 담긴 온기를 느낀 듯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길롯 백작의 일은 마땅히, 단죄됨이 맞습니다. 하지만, 폐하 다른 분은 모르겠으나 내쉬 황자님은 사실 길롯가와는 소원한 편이 아니었습니까.”
말을 맺으며 눈치를 살피는 후작을 향해 레이얼이 더 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실제로 내쉬 황자님께서는 길롯뿐만이 아니라 황후, 흠. 그분과도 꽤 거리를 두고 지내셨지요. 물론 사치를 하거나 세를 불리는 정치적인 활동도 전혀 없으셨고요.”
“그렇군요.”
마치 동조하듯 짧게 따라붙는 말에 후작은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 분이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말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황후 혼자 벌였다?”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당황한 기색 없이 매끄럽게 발을 빼는 모습에, 레이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
레이얼의 시선이 차례로 아르네 공작과 이베트 후작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이들 눈엔 레이얼은 지금 웃고 있지 않았다. 특히나 아르네 공작은,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표정이었으니까.
‘공작, 무탈하게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제국을 위해 쓰일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민란지로 차출되었던 날 떠나기 직전 레이얼은 딱, 저 얼굴로 자신에게 웃어주었다. 아르네 공작은 그제야 레이얼이 오늘 일에 결론을 알려주지 않은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말장난’에 몰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손에서 놔야만 했던 시절을 겪었던 젊은 황제는 내쉬 황자에게서 제 모습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아르네 공작은 옅게 한숨을 쉬며, 맞은 편의 이베트 후작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에 이베트 후작이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으쓱 해 보이는 것이, 그 역시도 레이얼 황제의 속내를 눈치챈 듯싶었다. 클로이를 생각하면, 길롯의 피가 흐르는 것들은 죄다 싹 치워버리고 싶다. 그 순간 아르네 공작에게 와닿는 이베트 후작의 시선이 조금 더 부드럽게 깔린다. 길롯에게 시달린 아르네에게 향하는 그의 온유한 시선은, 지금 시오도르가 누구의 눈치를 살펴 말을 아끼는지를 알아달라는 채근일 것이다. 이것 참. 옅게 한숨을 내쉰 아르네 공작은, 작게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 정황상 길롯을 죄 쓸어내어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처분이 아니겠는지요? 자칫 나쁜 선례를 만들게 될까 두렵습니다.”
회의장에 아르네다운 강직하고도 비정한 말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