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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날 두고? (101/121)

101. 날 두고?2021.08.20.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잠도 오지 않는다더니, 클로이가 지금 그랬다. 두 다리가 무거운 쇠공을 달고 하염없이 땅 아래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아, 좀 무리하긴 했지?”

평지로 달려서 열흘 거리의 북부령이었다. 그 거리를, 심지어 눈이 쌓인 채로 나흘 만에 주파하지 않았겠나? 말도 클로이도 정말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참이었다. 긴장감과 이유 모를 조급함에 달려올 땐 몰랐다. 그런데 수도에 도착해 레이얼을 지척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자 안심이 되었던 걸까?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후…….”

간사한 몸뚱이. 정말 누울 자리 봐가며 발도 아주 잘 뻗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이던 그때. 뒤척거리던 클로이는 작은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콕콕. 콕. 콕콕.

“뭐지?”

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은 고요한 밤이 아니었으면, 들리지 않았을 작고 작은 소리. 클로이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숄을 두른 채 창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창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클로이는 새가 날아가지 않길 바라며, 조심히 문을 열곤 고개를 밖으로 쑥 내밀었다. 건너 건너 창틀에 앉은 새가 보인다.

‘잠깐, 저기는 아빠의 침실인데?’

쿵쿵. 가슴이 무겁게 뛰었다. 무슨 일이지? 클로이는 그대로 날 듯이 달려 공작 침실문을 열고 들어섰다. 새는 그때까지도 부리로 열심히 창을 쪼고 있었다.

“착하지.”

헐떡거리는 숨을 해선, 클로이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새는 검고 늘씬했다. 어느 가문에서 쓰는 전서조인지 낯설기만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클로이는 새가 물어온 편지를 차분히 펼쳤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아르네 공작을 찾을 정도면, 묵혀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

편지를 펼쳐 든 클로이는 비틀거렸다. ‘황태자궁이 봉쇄됐습니다. 그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급했던 듯 찢은 종이에 마구 갈겨쓴 글씨는 엉망이었다. 펜촉에 들어가는 힘 조절도 못 할 만큼 다급했나. 매끄러운 종이는 펜촉에 긁혀 중간중간 잉크가 번져 있었다.

“…….”

쿵쿵쿵. 자신을 바라보는 새카만 새를 손끝으로 쓸어주며 클로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답장을…… 받아오라고 했니?”

편지를 풀어 줬는 데도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에, 클로이가 새에게 되물었다.

“보내도 돼?”

고개를 숙여 묻던 클로이는 감전이라도 된 듯 황급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새를 스치며 몹시 비리게 변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클로이는 이를 아득 물었다. 새를 쓸었던 그녀의 손끝은 벌겋게 젖어 있었다. 제방으로 향한 클로이는 설렁줄을 집어 당기는 것과 동시에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조금 전까지 전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피로감은 이미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아가씨?”

그녀의 부름에 달려온 로지가 희게 굳은 클로이를 보고,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가자.”

“어디로요.”

“황궁.”

“…….”

말없이 서 있는 로지를 향해 클로이가 속삭였다.

“나 가야 해. 같이 다니겠다며.”

“공작님께서 그림자 기사단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럼, 막겠다?”

로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주먹을 단단히 움켜쥔 모습에, 클로이 역시 얼굴을 살벌하게 굳혔다.

“같이 가기 싫으면 남게 해주고.”

“갑자기 왜 이렇게 급하게 구세요? 오늘 막 도착했어요. 하루 정도는 쉰 다음에 이야기하세요.”

“황태자궁이 봉쇄되었대.”

클로이의 말에 로지도 찰나에 놀란 기색이었다.

“그걸 어떻게…….”

“소식을 물어온 새가 있었어.”

“새요?”

“까만 새야. 알아? 아버지 침실로 찾아왔더라고.”

클로이의 말에 로지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남을 거면 빨리 말해. 나, 마음이 급해.”

클로이는 한발을 뒤로 무르며 손을 까딱였다. 상냥한 목소리와 달리 클로이는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 뒤였다.

“속임수라는 생각은 안 드시고요?”

“내가 온 줄 누가 어떻게 알 것이며, 아버지의 침실로 새를 보내는 건 말이 되나?”

“……꼭 가시겠다는 거죠?”

“맞아.”

목숨을 걸지는 않을 테니, 무기는 들지 않았으나 다부지게 움켜쥔 주먹이며 독이 바짝 오른 새파란 눈동자가 불을 피운 듯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반드시.”

빨리 와. 클로이의 속삭임 같은 뒷말에 로지가 갑자기 크게 걸음을 떼어 움직였다. 그 모습에 클로이의 근육이 일순, 움찔하며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로지는 달려들어 그녀에게 주먹을 날리지도, 발길질하지도 않았다. 곧장 뛰듯이 옷방으로 향해, 헐벗은 클로이에게 사냥복을 꺼내주었다.

“내외 구분 좀 하세요. 제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안 갈 것처럼 굴었잖아.”

“안 보내고 싶으니까요.”

투덕거리는 사이 클로이는 옷을 죄다 걸쳤고, 로지는 입고 있던 시녀복을 벗어던졌다.

“왜 시녀복 안에 경갑옷 차림인 거야?”

어이없어하는 클로이를 향해 로지가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로지의 허리띠에는 단검이 무려 열다섯 개나 꽂혀 있었다.

“누가 보낸 새야?”

클로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새 이야기를 했을 때, 로지가 보인 반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일만 한 게 아니었다. 그림자 밑으로 소리 없이 달리며, 침묵하기를 한참. 로지는 황성이 보일 무렵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급습을 지시한 건 근위대 부단장인 블레이엄 헤논이었어요. 그자의 신병을 에반님이 확보했고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복수를 하겠다며 덤벼든 멍청한 둘째가 제 형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는 에반의 편에 붙었더라는 다소 김빠지는 이야기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거였다.

“박쥐 노릇을 한다고?”

“그쪽에게나 박쥐이고, 이쪽엔 그냥 충견이죠.”

“오우…… 에반이 의외로 충심을 끌어내는 타입이었구나.”

긴장감에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와중에도 클로이는 농담을 쉬지 않았다. 말끝이 힘없이 풀어지고, 입안은 바짝 말라 발음이 뭉개졌다. 아마 로지는 이것을 알고 있었겠으나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공작님은 아르네의 새 말고는 받지 않으시니, 그건 에반을 찾아온 충견의 새일 거예요.”

“하긴 한동안 에반이 아빠 침실에서 살았지.”

“고작 새를 받자고 공작님 곁을 비울 사람은 아니잖아요.”

“하긴.”

다소 덤덤한 듯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황궁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클로이는 그대로 빠르게 황궁 담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아서였다. 로지는 미간을 와락 구긴 클로이에게 물었다.

“혹시, 뭐 찾으세요?”

“……빈틈이 없어.”

“예?”

“보통 경계가 이렇게까지 살벌하지 않았는데.”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클로이를 바라보는 로지의 얼굴이 경악에 질려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비밀 통로 같은 거 없었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아가씨 뒷배가 그분이라면서요.”

“들킨 지 얼마 안 됐어. 그전엔 그냥 뭐 오다가다 일로 엮였달까.”

클로이의 성의 없는 설명에 로지의 표정이 몹시 더럽게 구겨졌다.

“……여길 맨몸으로 넘나들었다고요? 안전한 통로 하나 없이?”

뿌드득. 흡사 이가 부서지는 것같은 소리도 울린다.

“진짜 정신이 있으세요?”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 받았잖아!”

“써먹지도 못하는 광산이 뭐라고요! 저희가 아니었으면 그건 그냥 쓰레기예요!”

로지의 눈이 달빛 아래 무섭게 번뜩였다.

“그래서 받아온 거야. ‘우리’는 당연히 쓸 수 있는 거니까.”

순간 복면 아래로 보이던 로지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우리.”

웃는 듯 애잔한 듯 기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지는 클로이가 생각해볼 시간은 주지 않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공작님께 일러버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세요.”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래요 급한 건 따로 있으니까, 이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내일이에요. 내일.”

로지는 그 말을 끝으로 붙잡을 새도 없이 담을 넘었다. 황궁 담을 차고, 단번에 높게 도약해 나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침입자다!”

“레, 레이디!”

“레이디다!”

담 안에서 터지는 고함이 단번에 쭉 멀어진다.

“이 바보가.”

‘돌아가면 반드시 공작님께 일러버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세요.’

‘그래요 급한 건 따로 있으니까, 이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내일이에요. 내일.’

내일 만나자. 살아 돌아올 테니까. 둘러둘러 전한 로지의 말을 이제야 깨닫는다. 클로이는 문득 코를 감싸 쥐었다. 꼭 얻어맞기라도 한 듯 코끝이 시큰거려 참을 수 없었다. 눈은 맵고 시야는 멋대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클로이는 로지가 벌어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게 어떤 기횐데 울면서 놓쳐! 눈물이 그렁한 눈을 해선 클로이 역시, 로지가 그랬던 것처럼 담을 훌쩍 넘었다. * * * 챙! 맞붙은 검날이 움푹 패며 불티가 날렸다. 챙챙! 황태자궁은 아비규환이었다. 근위대가 황태자 궁을 봉쇄하듯 둘러싸는 것과 동시에 내쉬를 선두로 한 길롯의 사병이 마구 들이닥쳤다.

“일개 보좌관이 혼자 반역을 도모하진 않았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 잡아들여라!”

길롯 백작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질렀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 벌겋게 비치는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번뜩였다. 길롯 백작의 말에 그를 따르던 기사들이 한결 흉흉해진 모습으로 마구 칼을 휘둘렀다. 분명, 말은 잡으라고 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칼부터 휘둘렀다. 레이얼은 길롯 백작의 고함을 들으며 코웃음을 쳤다. 저건 밖에 있는 근위대에게 들으라고 질러주는 고함이었다. 훗날, 내쉬가 황좌에 오르게 되면 내세울 명분을 위해 ‘목격자’를 만드는 작업 중인 것이다.

“반항하지 마라! 반항하는 자는 반역자와 내통한 무리라고 여기고 처결하겠다!”

이것 보라지. 그 어떤 증거도 재판도 없이 무조건 칼을 휘두르며, 일단 반역자라는 말부터 입에 올리는 심사가 어찌나 더러운지.

“상황은?”

레이얼은 자신에게 부복한 기사에게 물었다. 가벼운 경갑옷차림을 한 그는 여차하면 곧장 나갈 생각이었다.

“아직까지는 비등합니다.”

“열세군?”

아직까진이라는 단어에 물린 뜻을 날카롭게 캐낸 레이얼이 되물었다. 기사는 대답 대신 묵례를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한사람이 부족한 때였기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혼자 남은 레이얼은 고요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고작 이백의 수로 오백이 넘는 수를 상대는 건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황후는 정말 교활했다. 그녀는 기사를 선발하는 척하며, 일부만 남기고 나머진 죄 콰이펄른으로 보냈는데 이게 속임수였다. 사람들은 때마침 길롯 백작이 마구잡이로 용병을 들였기에, 착각했다. 기사들은 애초에 수도를 떠난 적이 없었고, 떠난 것은 길롯이 모았던 용병이었다. 그녀는 황성을 닫아걸기 직전 길롯 백작에게 보내놨던 기사들을 죄다 불러왔다. 그 수가 무려 오백이라는 소식을 듣던 순간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이 떠올랐다.

‘금광을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미인은 무슨 황금을 씹어먹고 사나.’

모두가 당연히 황후의 사치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예리하게 찾아낸 영리한 분.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것을 여상한 표정으로 삼키며 레이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다 목이 잘리느니, 차라리 난전에 뛰어들어 명예롭게 죽는 편이 낫겠지.”

바로 그때였다. 테라스 문이 활짝 열리며 찬공기와 함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날 두고?”

너무도 그립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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