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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나를 그대의 아르네로 삼아줘 (102/121)

102. 나를 그대의 아르네로 삼아줘2021.08.24.

“로이?”

레이얼은 제가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미친 게 분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클로이, 북부에 안전하게 계셔야 할 자신의 피앙새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의 입은 의지를 배신하고 단박에 현실을 외쳤다.

“어째서!”

조금 전까지 싸늘하게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무너졌다. 그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황급히 다가와 클로이를 붙들었다.

“내가 분명히 새를 보냈잖아!”

늘 단정하던 말투는 엉망이되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챙! 그 순간, 그의 고함과 맞물리듯 지척에서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귀가 얼얼해지는 새된 소리 사이에서 클로이는 웃었다.

“안녕, 전하. 보고 싶었어.”

“아…….”

그를 향해 벌어진 두 팔. 레이얼이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곧장 클로이를 끌어 당겨 품에 깊고 깊게 안았다. 여윈 듯 단단한 몸이 그의 품 안에 들어오자, 레이얼은 비로소 제대로 숨이 터지는 것 같았다.

“왜, 왔어 왜 왔어! 왜, 왜!”

그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바르르 떨리는 숨이 클로이의 정수리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클로이는 불안하게 울리는 그의 심박이 맞닿은 뺨을 통해 고스란히 머리로 고여 드는 것을 느꼈다. 황궁 담을 따라 떠나기 전보다 더 극악해진 경계에 이미 마음의 준비는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이 나 타오르는 황태자 궁을 보는 순간 눈이 돌아버리는 것을 느꼈다.

“길롯 이 미친 새끼가.”

“제발. 그런 말은.”

조금 전까지 죽음을 말하며, 그녀를 나무라던 남자가 고작 별스럽지 않은 욕 한마디에 당황하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귀여웠다.

“대체 언제 온 거야? 내가 분명히 새를 보냈잖아. 사흘 뒤에 다시 새를 보내지 않으면…….”

“첫 번째 새를 받고 바로 온 거야.”

“토벌은?”

되묻는 레이얼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안전히 돌아와 다행이라는 것과 동시에 위험에 처한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지극히 혼란한 표정. 가면 같은 웃음으로 능숙하게 속내를 가리는 귀족적인 표정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기에, 클로이는 레이얼의 속내를 훤하게 읽어버리고 말았다.

“끝냈어. 승전 연회도 즐기고 온 걸.”

“뭐? 한 달이 걸린 댔잖나?”

“빨리 오라며.”

“내가 언제.”

“분명 그날 눈빛이 그랬는 걸.”

클로이는 말하다 말고 레이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애교가 있게 비볐다. 레이얼의 갑옷에 볼이 쓸리며 화끈했지만, 클로이는 개의치 않고 문질러댔다.

“다쳐.”

보다 못한 레이얼이 나서서 그녀를 떼어놓을 정도였다.

“……왜 말려?”

“왜냐니.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니까……나도 당연한 거잖아. 전하. 화내지 마.”

클로이는 쓸려서 붉어진 뺨을 해선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그의 품을 벗나 입에 뭔가를 물고 힘껏 불었다.

“뭐 하는 거야?”

“응. 지원군을 부르는 거야.”

“지원군?”

“마음이 급해서 상황을 살피려고 로지랑 둘이 와본 거였거든.”

“…….”

“결전의 날인지 꿈에도 몰랐지 뭐야.”

“부르지 않은 편이 좋아. 상대는 ‘황제’에게 위해를 끼쳤다며 내 보좌관을 엮었어. 날 도왔다가는 아르네라도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야.”

클로이는 레이얼의 나직한 말에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 전하. 아르네가 지키기로 한 건 시오도르가 아니야.”

“……그럼?”

“아르네는 ‘레이얼 시오도르’를 지키기로 했어. 우리의 마지막 시오도르를 말이야. 길롯에게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을 거야. 아빠는 그림자 기사단을 내주었어.”

아르네의 비밀기사단이며, 북부 기사중 가장 뛰어난 이들이야. 작게 덧붙인 클로이는 몸을 돌려 레이얼의 침대맡으로 향했다. 그녀가 손을 뻗은 것은 벽에 걸린 숏보우였다.

“화살은?”

“…….”

“화살은? 설마, 검을 들라는 거야? 나 정직한 대인전은 좀 약한데.”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레이얼은 시종일관 클로이에게서 시선을 꽂아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화난 듯 슬퍼 보였고 기쁜 듯 울적해 보였다.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돌아가달라 빌면 어때? 들어줄래, 로이? 나는 그대와 아르네가 승산이 불투명한 싸움에서 피를 흘리길 원치 않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로이가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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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그럼 난 애원할게.”

“로이!”

레이얼은 답싹 무릎을 꿇고 저를 올려다보는 클로이를 향해 비명처럼 낮게 부르짖었다.

“돕게 해줘.”

“로이. 제발.”

“날 아르네라고 생각한다면, 그 언젠가의 시오도르처럼 내게 등을 맡겨줘. 비겁하게 도망가라 등을 떠밀지 말아줘.”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레이얼은 클로이의 모든 말이 너무도 선명하고, 너무도 크게 울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함께하게 해줘. 전하.”

나를 그대의 아르네로 삼아줘. 클로이의 말에 레이얼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울컥 치받는 것이 가슴을 데우고 목구멍을 틀어막다 못해 이제 눈으로 쏟아지려고 했다. 눈꺼풀을 따라 불이라도 질러졌는지 눈알이 홧홧하고 자꾸 질척하게 젖어 든다. 레이얼은 필사적으로 참았으나 쉽지 않았다. 기어이 속눈썹이 젖었다.

“나를 아르네로 살게 해줘. 버리지 마.”

애처로운 듯 그를 강렬히 틀어쥐는 속삭임. 레이얼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누가 그대를 버린다고!”

쉰 듯한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함께하게 해줘.”

레이얼은 깜빡했다. 그의 피앙세는 거짓말은 못 하지만, 사람을 홀리는 말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절대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손을 내린 레이얼은 벌겋게 젖은 눈을 해선, 속삭였다.

“레이디께서 원하시는 대로.”

  * * *

“레이디가 나타났다!”

쨍쨍거리는 날 선 소리 사이로도 경비병의 외침은 선명하게 고막에 틀어박혔다. 내쉬는 그대로 몸을 틀었다.

“레이디가 나타났다고?”

“예, 전하.”

“어쩌면 이렇게 정직한 걸까? 짜증나게.”

착실하게 길롯에 연을 댄 작자들을 찾아다니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얼을 치는 날 황궁에 나타났다라?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지 않나?

“지금 제가 나타나서 뭘 할 수 있다고?”

해봐야 황태자가 ‘도둑’을 부렸다는 오명이나 남기겠지. 생각도 없는 멍청한 것. 제 주인에게 죄를 덧씌우는 줄도 모르고 날뛰는 꼴이라니. 내쉬는 입꼬리를 비틀어 사납게 웃었다.

“생포하라.”

“지금요?”

“반드시 생포해와. 당장!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아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 한 일일지도 모른다. 기사는 똑똑히 봤었다. 화살이 폭우처럼 쏟아지던 그 밤,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던 레이디의 솜씨를. 근위대를 투입했을 때도 잡아 오지 못했던 레이디를 ‘기사’만으로 생포가 가능하겠나. 회의감이 들지만, 기사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복종뿐이니까. 후방에 있던 기사 오십을 차출해 레이디가 있다는 방향으로 달리는 그의 얼굴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레이디를 외치는 소리는 레이얼과 클로이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레이얼은 손을 내밀어 바닥에 무릎을 꿇은 클로이를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저 레이디는 누구지?”

“누구긴 로지지.”

“아아…….”

“나를 제1 사냥꾼으로 길러준 스승님이야.”

“…….”

“얼마 전에 들켰어. 혼자는 안 보내준대서 같이 왔거든.”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하는 클로이를 바라보던 레이얼이 문득 손을 들어 하늘로 솟은 그녀의 입꼬리를 꾹, 눌렀다.

“웃지 마.”

“……어?”

“억지로 웃지 마.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야?”

“울 이유가 없으니까.”

클로이는 레이얼이 끌어내린 입꼬리를 다시 예쁘게 끌어올렸다. 울 이유가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더더욱.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감금은 일주일 정도 되었나? 키릭슨이 끌려간 후니까. 본격적인 공격은 오늘이었지.”

“아…….”

그러고 보니 보좌관이 보이지 않는다.

“죽었어?”

“설마. 키릭슨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웃지 말라더니 이번엔 레이얼이 웃었다. 그 웃음이 꼭 우는 것 같아서 클로이는 레이얼이 어째서 웃지 말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클로이는 하나 더 깨달았다. 며칠전부터 어째서 자신이 그렇게나 조급했던 건지. 자신은 레이얼에게 닥친 이 불행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클로이는 손을 뻗어 레이얼의 뺨을 손으로 감싸쥐었다.

“전하. 나 궁금한 게 있어.”

“뭐지?”

뺨에 닿은 손을 끌어내린 레이얼이 클로이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쩜 이렇게 순순히 당하고 있는 거야?”

이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아르네의 기사도, 이베트 후작가의 기사도 그리고 전하를 지지하는 기사들도 전부 부르면 안 되는 거야?”

“……황후는 누군가가 황제를 해쳤다고 했지. 지금 바로 그 사람을 색출하고 있어. 거부하면…….”

“범인으로 지목 당하겠구나.”

“맞아. 내가 여태 버틸 수 있었던 건 황제를 해칠 이유가 없어서야.”

“그런데 부관을 잡아갔다고?”

“그럴듯한 이유가 다급해졌으니까.”

“황제가 위독해?”

“아마 그럴 거야. 키릭슨이 끌려간 후 황후는 그 누구의 출입도 불허했어.”

그의 말에 클로이는 미간을 한껏 접었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눈에 뻔히 보이는데 말장난 같은 명분에 휘둘려야 한다는 게 웃기지도 않는다. 제국을 농단하고 제멋대로 휘두르던 악녀가 지금 누굴 단죄하겠다고 설치는 걸까.

“……차라리 이럴 때 국상이라도 치르면 좋겠는 걸.”

황제가 서거하면 레이얼은 더는 황태자가 아니게 된다. 그는 적통 후계자. 황제가 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어진다. 길게 이어지던 클로이의 생각이 뚝, 잘려버린 건 바로 그때였다.

“전하.”

“응?”

“폐하. 살아계시긴 한 거지?”

“……뭐?”

움찔. 클로이를 싸 안은 남자의 커다란 손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떨렸다.

“살아계신 거 맞지?”

“…….”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야?”

일주일도 더 전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뵀을 때 황제는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후가 피로 젖은 손수건을 들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나. 그게 마치……. 레이얼은 눈을 가늘게 늘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날 자신은 부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황후가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는 통에 소란해 자리를 비켜야 했었다. 흠뻑 젖었던 붉은 손수건. 그것에 정신이 빠져서.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레이얼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인장.”

“응?”

“인장이 필요해.”

황제가 서거했다면, 그가 더는 황태자가 아니라면. 황위를 이었다는 증표인 ‘황제의 인장’이 있어야 한다.

“인장이라고?”

황제의 인장, 황금에 아로새겨진 황가의 문장이며 황제를 의미하는 도장. 그것을 떠올리자 한층 더 머리가 선명해진다. 그날 만약 황제가 죽었다면. 그런데도 황후가 그것을 감추고 있는 이유라면. 인장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이다. 제 아들의 손에 인장을 쥐여주지 못했기에 지금 그를 죽여 ‘하나뿐인’ 후계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인장이 없어도 황위를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맞아. 인장. 그게 필요해.”

그의 말과 함께, 빡! 문이 쪼개지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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