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몰이는 내가 할게2021.08.17.
클로이는 자신의 인내심이 얼마나 얕은지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다.
“아오, 씨!”
일국의 공녀라는 고귀한 영애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친 소리와 함께 뻑! 하며 나무를 걷어차는 흉흉한 소리가 울렸다.
“또, 또, 또! 길이 막혔어!”
벌써, 네 번째였다. 마음은 급한데, 자꾸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혀 길을 돌아가다 보니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서두르고 있었다. 이틀 사이에 막힌 길을 빙빙 돌면서도 벌써 반이나 주파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이상하게 조급함이 가시지 않았다. 심지어 눈이 기본으로 무릎께까지 푹푹 빠지도록 쌓여 있었다.
“진정하세요. 다행히 갈림길을 조금 전에 지나쳤으니까 돌아가면 금방이에요.”
수도의 상황을 들어서인지 로지는 조바심 내는 클로이를 나무라는 대신, 살살 달랬다.
“얼른요.”
클로이는 씩씩거리던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몸을 돌렸다. 로지의 말이 맞았다. 이러는 사이 돌아가는 게 더 이익이다.
“가자, 날이 저물고 있어. 슬슬 말이 쉴 곳도 찾아야 해.”
“네, 아가씨.”
뿌드드득. 말발굽 아래서 짓이겨지는 눈 소리가 서늘했다. 이틀 뒤. 클로이는 그 후로도 여섯 번 정도 막힌 길을 돌아가고 나서야 수도의 타운하우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숱하게 길이 막혔음에도, 반나절 밖에 지체되지 않은 건 필사적이기 때문이었다. 뒷문을 통해 은밀한 귀택이었으나 중간에 로지가 새를 날렸기에 길리언이 마중 나와 있었다.
“들어가세요.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어요.”
“응. 그래.”
클로이가 눈에 흠뻑 젖어 버린 신발을 벗어 툭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발이 반쯤 얼어 차가운 대리석을 디뎌도 시렵지 않았다. 북부령에 비하면 추위 같지도 않은 수도의 겨울이라서일까? 아니다. 클로이는 어째서 제가 발갛게 언 뺨을 하고서도 하나도 춥지 않은지 잘 알고 있었다. 수도에 돌아와서였다. 보고 싶었던 이를 드디어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어서. 혼자인 그를 혼자 두지 않아도 되어서. 기뻐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배포 좋게 잠을 잤다지?”
느물맞은 말투에 목 끝까지 꺼떡꺼떡 차오른 욕지기가 터질 뻔했다. 황명 불복종이라니. 이런 개소리가 있나. 키릭슨은 길롯 백작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지만, 이를 사리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 니다.”
“얼음물을 달라고 해 놓고 늘어지게 주무셨다지 않았나?”
길롯 백작의 눈은 희열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정말 독한 자식이었다. 사실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얼음물을 달라며 감시자를 내보내 놓곤 몇 분씩 자는 걸 몰랐을 리가 있나. 그런데, 문제는 이거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감시자가 돌아오는 발걸음에도 눈을 뜰 만큼 푹 자지 않았던 거다. 이미 한계를 넘은 눈은 핏줄이 터져 두 눈이 색을 잃고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지금도 보라지. 길롯 백작은 순간순간 정신을 놔버리는 키릭슨을 보며 입매를 심술 맞게 비틀었다. 어쩜 이렇게 독할까? 어디 변두리에 처박혀 있다가, 황태자의 보좌관이라는 자리에 올라서인지 제 자리에 대한 집착이 보통이 아니었다. 길어봐야 사흘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두세 번의 몇 분 안 되는 쪽잠으로 일주일이나 버틸 줄 알았겠나. 심지어 이번에 덜미를 잡은 것도 그가 잠을 잤다기보다는 기절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길롯 백작은 어눌하게 중얼거리는 키릭슨이 아까부터 이상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곤란하다. 빨리, 그에게 죄를 시인하게 해 사인을 받아야 한다. 내쉬의 인내심은 진작에 바닥났다. 레이얼을 끌어내려야 하는데, 그 작은 명분이 없어서 이를 갈고 있지 않았나. 진짜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제 목을 물어뜯었을지도 모른다. 길롯 백작은 어둡고 눅진하게 물들어 있던 내쉬의 녹안을 떠올리며 제 목덜미를 손으로 쥐었다.
“하긴, 죄인이 어디 제 죄를 인정하는 꼴을 봤어야 말이지.”
괜히 겁먹은 꼴을 감추려 길롯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듯 목청을 높여 철장 밖의 감시자를 불렀다.
“뭐 해! 어서 가서, 서류를 가지고 와! 가뜩이나 궐내 분위기도 이런데 내가 언제까지 이런 일에 매달려 있어야겠어!”
“예, 백작님.”
그 모습을 흔들거리는 고개를 해서 바라보던 키릭슨이 문득 입을 열었다.
“무슨 서류?”
“네 죄를 시인하는 서류 말이다. 처벌하려면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하…… 으악!”
키릭슨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길롯 백작이, 떠벌거리며 설명을 하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쿨럭.”
“이, 이 미친놈이! 궁의를 불러와!”
키릭슨이 혀를 깨물고 피를 한 움큼 토했던 것이다.
“빠, 빠, 빨리! 궁의를 불러!”
잔뜩 놀라 길롯 백작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지만, 키릭슨은 피를 뿜어내는 와중에 작게 웃었다. 저런, 머저리. 누가 죽을 만큼 깨물었을까 봐. 키릭슨은 제가 죽어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선 몸은 이제 통제를 벗어났고, 이제 얄팍한 수로는 더는 약발이 듣지 않았다. 몸은 이제 몇 분짜리 잠으로는 부족해 했다. 이미 수시로 정신이 흩어지지 않나. 혀를 깨물어 잠깐 정신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기울었다. 키릭슨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길롯 백작이 난리를 부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어도 제가 레이얼의 ‘짐’이 되는 건 막을 참이었다.
“이 독한 새끼가 손가락도 다 망가뜨려 놨잖아!”
내내 뒷짐 지고 있던 손이 쓰러지며 풀어져 버렸다. 그 결에 망가뜨린 손끝이 드러난 모양이다. 도저히 못 버티겠을 때마다 하나씩, 제가 그랬다. 지장도, 사인도, 그리고 저를 죽여 함부로 죄를 뒤집어 씌우지도 못하게. 이건 키릭슨의 발버둥이었으며, 아주 오래전 허망하게 보내야 했던 고운 사촌 누이를 향한 혈육의 맹세이기도 했다. 반드시 복수해주마. 키릭슨은 눈을 깜빡이며 길롯 백작을 바라보았다. 길롯 백작은 매일 조금씩 더 조바심 내는 얼굴을 하고 찾아왔었다. 저치가 눈치를 보는 건 황후 따위가 아닐 테다. 그는 저를 을러대던 내쉬 황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내내 움츠려 있던 어린 뱀. 그것이 깨어났다. 무리지어 살지 않는 뱀에겐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니 길롯 백작은 제가 살기 위해 이리도 발악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키릭슨은 뻑뻑한 눈을 껌뻑이며 웃었다. 난 그거보다 훨씬, 절박해서. 본래 복수란 게 그런 거니까. 어차피 내쉬 황자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자신의 이 발악도 고집도 끝내 아무 소용 없어질 테지만……. 그래도 일주일을 벌지 않았나. 제 현명한 주인은 하루를 천금처럼 썼을 테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더 벌어주고 싶었다. 눈앞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과 고함소리 같은 것이 웅웅 거리다 기어이 뭉개졌다. 키릭슨은 쿨럭거리던 그대로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아쉽게도.
“이제 더는 못 기다려요. 그 보좌관인지 뭔지는 이쯤하고, 레이얼을 쳐야겠어요.”
손톱을 질근질근 씹는 캐서린 황후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쉬는 그런 캐서린 황후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늘였다. 오랜만에 제정신이 드나 했더니,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찌 된 게 오히려 예전보다 기복이 더 심해진 것도 같았다. 대범했다가 징징거렸다가 한없이 비관했다가 또 어떤 날은 세상이 제 손에 들어온 양 느긋하기도 했다. 정말, 왜 저러는 걸까.
“진정하세요. 여태도 잘 준비하시고선 왜 그러세요?”
이건 진심이었다. 그들이 ‘시오도르’와 ‘아르네’처럼 위력으로 제국 전부를 쓸어 낼 수 있다면야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병력은 제국을 쓸어 낼 만큼 어마어마하지도 않았고, 제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명분도 없었다. 말 그대로 찬탈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겐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는 그럴싸한 명분이 절실했다. 키릭슨이 여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황위 찬탈후, 귀족들과 제국민에 내보일 수 있는 명분. 그런데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분이 그새를 못 참고 또 발광이었다. 대체 저런 성질머리로 무슨 대업을 이루어주겠다고.
“미적거리다가, 일을 그르치겠어요. 어떻게든 뒷수습할 테니 이 어미 말을 들어요.”
“어머니.”
“질질 끌 것 없어요. 어차피 보좌관은 망가져서 눈도 뜨지 못한다면서요. 일단 레이얼을 없애고 나면 일이 더 쉬워요.”
캐서린은 이로 뜯어놓아 엉망이 된 손을 뻗어 내쉬를 움켜쥐었다. 그를 움켜쥔 손톱 끝이 온통 찢어져 핏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황가에 남은 후계자가 하나뿐인데 누가 무얼 어쩌겠어요?”
말이야 좀 나오긴 하겠지만 틀린 소리도 아니다.
“뒷일은 이 어미가 다 책임질 거예요. 돌이킬 수도 없는 걸요.”
뭐, 이렇게까지 나온다면야. 설핏 광기가 느껴지는 캐서린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본 내쉬가 마치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허락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비로소 캐서린 황후가 웃었다.
“그래요. 그래요. 이 어미가 다 해줄게요.”
결연하게 속삭인 캐서린 황후는 이내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불러들였다.
“근위대장을 불러라.”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날래게 달려온 근위대장을 향해 황후가 나긋하게 명령했다.
“황태자궁을 봉쇄하세요.”
“예?”
“반역자가 황태자 궁에서 나왔습니다. 단독으로 그랬을 리 없으니, 이 시간부로 황태자 궁을 봉쇄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근위대는 황제 폐하의 명에만 움직이는 기사단입니다.”
“황제를 위한 일이잖습니까!”
황후는 제 말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근위대장의 모습에 기분이 상한 듯 나긋하던 어조에 날이 섰다. 그 모습에 내쉬는 손을 들어 입매를 가렸다. 한껏 비장하게 굴기에 무슨 수라도 있나 했더니 바보같이 소리나 빽, 질러버리는 황후의 모습에 짜증이 돋아 순간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근위대의 대다수를 길롯의 사람으로 갈아치웠다. 심지어 부단장까지.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근위대장만큼은 치워버리지 못했다. 아르네 만큼이나 선망을 쌓아 놓은 귀찮은 작자였다. 이런 자에게 소리를 지른다고 되겠나. 바보 같긴. 내쉬는 손을 들어 비틀린 입매를 바로 잡듯 쓸곤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근위대장을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황제만을 따르는 기사 아닙니까? 그도 명예를 아는 기사이니 당연한 것이지요.”
내쉬는 화가 나 새큰거리는 캐서린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그리곤, 뻣뻣하기 짝이 없는 기사를 향해 역시 빙긋 웃어 주었다.
“이해합니다. 다만, 황태자궁을 지켜 줄 수는 있겠지요? 드나드는 이 없게.”
“…….”
“황제 폐하를 해한 자를 잡는 일입니다. 나서서 황태자를 압박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대는 그저 쥐새끼가 도망가지 않게 일단 막아만 달라는 겁니다.”
몰이는 내가 할 테니까. 그에게만 들릴 면죄부를 속삭이며 내쉬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