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3. 나의 시오도르 (63/121)

063. 나의 시오도르2021.04.09.

“식사를 걸렀다고요?”

들고 있던 트레이를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에반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잔뜩 피폐해진 남자가 쇠공을 매단 족쇄를 차고 웅크리고 있었다. 세운 무릎을 두 팔로 감싸 안은 남자의 등은 뼈가 고스란히 드러날 만큼 말라 있었다.

“분명 어제까진 괜찮더니, 오늘은 또 왜 그랬을까?”

“…….”

“킬리언 헤논. 부르면 대답해야지.”

에반의 말에 킬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개자식.”

“개자식 같은 게 아니야, 아르네의 미친개라니까. 훨씬 위험하다고.”

저벅. 크게 걸음을 뗀 에반이 금방 킬리언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주치는 시선이 첨예하다. 길어지는 대치에 입을 뗀 건 킬리언 쪽이었다.

“약속은 어제까지였지.”

“그렇지.”

“그런데도 내가 이러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니, 정말 뻔뻔하지 않나?”

“내가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뭐지? 분명 네 형제의 구명을 약속했다.”

“그렇다면, 내 형제의 시체는 어디 있지!”

“구명이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킬리언에게 에반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목숨을 구해 살렸다니까.”

“뭐?”

나긋한 설명에 킬리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살렸어. 킬리언 헤논. 아르네의 긍지를 네 수준에 맞춰 함부로 재단하지 않길 바라.”

“사, 살렸다고? 분명 죽었다고…….”

“누가 죽었다고 했지?”

‘역시, 근성은 형 쪽이 나은 모양입니다. 블레이엄 헤논은 마지막까지 검을 휘둘렀다던데.’

죽은 게 아니었어?

“마지막까지 검을 휘둘렀다고…….”

“그래. 제 기운이 다할 때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넝마가 되어서도 말이야.”

“살아 있나?”

“살아 있지.”

“살아 있다고?”

“수도로 돌아올 순 없어. 그는 이미 죽은 자로 보고되었으니까.”

잠잠하던 킬리언의 눈에 핏발이 서더니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이 개자식!!! 그게 어떻게 산 거라고!”

귀족으로 태어나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진 형이다. 수도에 돌아올 수도 없고, 이름도 갖지 못한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만약 블레이엄 헤논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길롯이 알게 되면 어떨까?”

“……뭐?”

“살려둘까?”

에반의 질문에 킬리언의 입이 망연하게 벌어졌다.

“그, 그럴 리가.”

“순진하다고 봐주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에반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멍청한 표정을 짓는 킬리언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건, 멍청한 거지.”

“…….”

“그러니 길롯이 쓰고 버리는 패로 썼겠지만.”

“미친개 너, 이름이 뭐지?”

“왜, 그게 궁금해졌을까?”

“날, 살려줘. 헤논 자작가를 살려줘.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네까짓 게 그런 협상할 가치가 있다고 보나?”

“있지. 있어. 아르네를 위해 길롯의 소식을 물어올게.”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겠다는 말에 에반은 코웃음을 쳤다.

“잊었나? 킬리언 헤논. 너 역시 버리는 장기말인데 뭘 알아 올 수 있겠어?”

“아르네가에 붙잡혔다가 탈출한 정도면 적어도 쓸만해 보이겠지.”

“…….”

“제국민을 사랑하는 아르네 아니었나? 자애롭게 기회를 줘.”

“글쎄. 난 아르네는 아니고 그냥 집 지키는 개라서.”

“잘 생각해봐, 네 주인에게 뭐가 도움이 될지.”

전세가 역전되었다. 에반이 바라던 그대로. 그는 제게 매달리며 눈을 살벌하게 번뜩이는 킬리언 헤논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단, 좀 먹지 그래? 그 꼴을 해선 뭘 하겠어.”

킬리언 헤논은 에반의 말에 냉큼 손을 뻗어 스푼을 쥐었다. 고생한 덕에 살이 좀 내리긴 했으나 무가로 이름난 헤논의 적장자가 아닌가. 금세 회복하리라.

“천천히. 허겁지겁 먹다 체하면 회복이 더디겠지.”

“걱정을 개소리같이 하는 버릇이 있군? 마셔도 좋을 만큼 푹 끓인 스튜만 가져온 주제에.”

“적당히 기어올라. 아직 마음을 정한 건 아니니까.”

“가서 더 가져와. 너도 내가 빨리 회복하는 게 좋을 거 아니야.”

“……킬리언 헤논. 부디 기개와 만용을 빨리 깨닫길 바라.”

“새겨둘 테니, 이름이나 말해. 어이, 거기 미친개라고 할 순 없잖아.”

굽혔던 무릎을 펴, 발을 탕탕 굴러 희미하게 잡힌 주름을 편 에반이 빙긋 웃었다.

“집사님이라고 불러.”

“뭐?”

“집사님.”

경악한 듯한 킬리언을 즐겁게 감상한 에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짜 집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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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릭슨은 머릿속이 하얗게 빈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이번에 똑똑히 깨달았다.

“이게, 이게 무, 무슨 말입니까.”

그는 집무실에 있다가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에게 제 주인에게 닥친 변고를 전해 들었다. 레이디 아르네를 배웅하고 온다던 분이 새벽이 되도록 오지 않아 기사를 보낸 참이었다. 그런데…….

“마차가 부서졌다고요?”

“아무래도 습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습격이라니요! 황족을, 이 수도에서!”

키릭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게 진짜 말이 되는 소린가. 황족이었다. 무려 황태자. 황태자가 수도에서 습격을 당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아니.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 자체가…….

“일단 수색 중입니다. 진정하세요.”

“일단, 수색 중?”

키릭슨은 기사의 말에 문득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근위대엔 소식을 전했습니까?”

“저, 그……. 전 일개 기사라 그런 건 제가…….”

키릭슨의 시선이 그의 검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경, 지금은 비상입니다. 직위를 따지지 말고 움직여야 할 때죠. 경은 어서 황궁 근위대로 달려가세요. 전 이대로 본궁으로 가겠습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요.”

“경, 무려 황태자님입니다. 습격당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별일이 된 거예요. 재수 없으면 황실의 위엄에 누가 된다며 목격자도 전부 처리될지 몰라요. 빨리 움직여요!”

키릭슨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기사를 툭, 떠밀곤 뛰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그는 달려야 했다. 복도에 드문드문 보이는 기사들을 곁눈으로 담으며 키릭슨을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황실에 소속된 기사들은 황실에서 지급한 무구를 착용하게 되어있다. 방금 그에게 소식을 전한 기사는 검이 사제였다. 폼멜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아이코, 키릭슨 경?”

모퉁이를 돌아 나온 기사가 들이받을 뻔한 그를 붙들어주었다. 키릭슨은 재빨리 그를 훑었다. 황실 문양이 선명한 갑옷과 검. 그는 황실사람이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키릭슨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그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찾아뵈려던 참인데, 이렇게 뵈어 다행입니다.”

기사는 그에게 서신 한 통을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방금 정문 초소에 아르네 공작가 사람이 부탁하고 갔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이게 뭘까. 아르네 누구?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으나, 물어선 안 됐다. 키릭슨은 점잖은 척 인사를 건네고, 봉투를 뜯었다. -시간이 늦어 아르네 가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 서류는 내일 처리하기로 하지. 누가 보더라도 트집거리가 없는 말끔한 서신이었다. 키릭슨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심장이 이제야 살아나 두근두근하며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나 겪어도 겪어도 이런 일은 절대 적응되지 않는다. 한 박자 늦게 긴장이 풀린 사지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푸들거린다. 꼴사납게 나동그라지기 전, 얼른 벽에 몸을 기댄 키릭슨이 고개를 돌려 방금 제가 뛰어나왔던 ‘집무실’ 앞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소식을 전하러 왔던 기사는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절대 착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바닥에 반쯤 찍힌 빨간 발자국에 탁한 숨이 터졌다.

“공작저를 둘러보고 싶다고?”

피곤한 밤이었다. 북부의 산맥에 비할 바는 아니나, 무려 코르셋과 드레스만 걸치고 산을 뛰어다니지 않았겠나. 심지어 구두를 신고. 감각이 없어 그렇지 자꾸 축축 처지는 거로 봐서 이미 온몸에 피로가 두껍게 쌓여있을 테다. 그런데…….

“오늘이 아니면 보기 힘들 테니까.”

“왜?”

“왜냐니. 이제 곧 문을 걸어 닫을 거라며.”

아참. 늦은 저녁 후 차를 마시며 그런 말을 했지. 클로이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대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또 해줄 것이다. 담담한 듯 보였으나, 레이얼은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경험이 쌓여 득이 된다고는 하지만 오늘 일은 ‘겁’만 날뿐이다. 레이얼은 여섯 번이나 당했고, 일곱 번째인 오늘 그는 직접 겪기까지 하지 않았나. 불안해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래서 클로이는 중간중간 그를 안심시키려 많은 말을 해주었다. 심지어 이번엔 그녀를 노리는 것이 암살자뿐만이 아니라, 내쉬도 포함되어 있으니 난도가 배가 되었다. 습격과 암살에 근심할 때는 ‘아르네’의 이름이 먹혔으나 ‘내쉬’는 아르네의 이름으로 물리칠만하게 아니었다. 그는 길롯을 업은 황자였다. 만에 하나라도 변덕을 부려 다시 클로이에게 접근한다면, 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레이얼의 근심은 타당했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를 불안하게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피앙세. 곧 가족이 될 남자였다. 그래서 로지와 에반밖에 모르던 그 일을 입에 올렸다.

‘곧, 문을 닫아 걸 작정이야. 원래 아버지가 오시면 닫으려고 했는데 그보다 황실 연회 초대가 빨랐어.’

‘아…….’

‘하루면 될 줄 알았던 게 이렇게 길어졌고. 원래라면 내쉬는 만날 수 없었지.’

문을 닫아건다는 의미를 아는 레이얼의 표정이 확실히 밝아졌다.

‘상태가 좋아졌다며?’

‘좋아지긴 했지만, 완쾌는 아니잖아. 파리떼까지 상대하긴 영 귀찮아. 사서 고생을 뭐하러 해.’

‘……좋은 생각이야.’

레이얼이 몹시 만족스러워하며 웃었기에 클로이도 그냥 웃어넘겼다.

“길면, 앞으로 몇 달간 문을 닫을 텐데 마지막 기회 아닌가?”

어쩐지 긴 이별을 말하는 듯한 말에, 괜히 가슴이 철렁인다. 클로이는 들으란 듯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며 앞서 걸었다.

“전하, 같은 말을 아련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레이디 아르네는 몰라도 로이는 건재한걸.”

“……그러지 않으면 좋겠어.”

저, 저, 저 시오도르! 풀죽은 듯, 어쩐지 처연한 목소리에 클로이는 혀를 질끈 깨물었다. 가뜩이나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 처연미까지 더해지니 파급력이 보통이 아니다. 가슴이 찡하게 울리고 당장에라도 그래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약았어. 약은 남자야. 클로이는 자신이 아르네 공작대리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흐물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잊었어, 레이얼 전하?”

“뭘?”

“난 내 걸 남과 나누지 않아. 그러니 나의 시오도르와 내 머리에 쓸 황관 역시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폭력적인데 너무 달콤한 소리였다. 시린 듯 흰 레이얼의 피부가 클로이의 말에 단박에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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