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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 드러낸 발톱 (64/121)

064. 드러낸 발톱2021.04.13.

“아니 전 애가 타서 밤새 한숨도 못 잤는데, 전하는 얼굴에서 광이 납니다. 아주? 예?”

키릭슨은 멀쩡한 얼굴로 돌아오는 레이얼을 보자 반쯤 진심이 되어 왁왁 소리를 질러댔다. 서신을 받긴 했으나 핏물로 찍힌 발자국을 볼 때마다 불안에 심장이 타버리는 기분이었다.

“키릭슨.”

레이얼은 자리에 앉아 밤새 키릭슨이 쌓아둔 서류를 보며 짧게 웃었다.

“진정하게.”

“지, 지, 진정하라니요!”

커튼을 닫아둘걸! 키릭슨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두른 레이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잘생긴 분이, 햇빛까지 두르니 감당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말로 간밤 잠을 잘 잔 건지, 안색이 전에 없이 좋아 가히 파괴적이라 할 미모가 되지 않았나!

“자네 말처럼 아르네잖아. 아르네 공녀와 아르네 가신이 있던 마차를 타고 아르네 공작저로 갔었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얼굴이 얄미울 정도로 반짝반짝하다. 하지만 찰나에, 내려가는 어깨를 따라 쳐진 목깃 사이로 붕대가 보였다.

“전하!”

깜짝 놀란 키릭슨이 달려가 대뜸 고개를 들이밀었다. 약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번진 핏물이 붕대 아래로 비친다.

“다치셨습니까? 얼마나 다치셨습니까? 제가 당장 의사를 불러올-.”

“진정해. 목덜미를 살짝 긁혔어.”

긁혔는데 붕대를 두르냐! 키릭슨은 제 몸은 늘 건성으로 돌보는 레이얼의 모습에 불을 뿜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간밤, 보나마나 사고인 척 위장해 아르네 공녀를 치우려고 하던 길롯 일당에게 휘말렸을 것이다. 표적이 된 아르네 공녀가 아니니 그의 주인이야 상대적으로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태평하게 구는 거겠지만, 키릭슨은 눈에서 불이 뿜어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내가 그렇게 쉽게 죽어줄 리 없잖아.”

“예?”

종종거리던 키릭슨의 얼굴이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허옇게 떠버렸다.

“그, 그,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키릭슨 너무 놀라 자신이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목청을 돋웠다.

“제 아무리 미쳤다지만 황태자를! 아니, 어제 그건 공녀님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나였어.”

“왜, 전하를요?”

“레이디 아르네가 탐이 나니까?”

“이, 이, 이……!”

뭔가 반박하고 싶은 듯 키릭슨은 연신 입을 벙긋거렸으나, 울화가 터진 남자의 입에서는 씩씩거리는 소리 말곤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 * * 그날 오후 내쉬가 레이얼을 찾아왔다. 레이얼은 키릭슨이 재경부에 다니러 간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설렁줄을 당겼다.

“차?”

“네. 저는 로열크라운을 주세요.”

“글쎄다. 난, 그런 건 안 마셔서 있을는지.”

내쉬의 말에 레이얼은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종장은 레이얼의 말에 난색을 표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구해보겠습니다.”

“궁색하군.”

시종장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방금 그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옹색하다고 말할 것을 그랬던가? 주인을 모시는 일에 금전을 아끼지 말게. 손님께 변변히 내놓을 차조차 갖추고 있지 않아서야.”

“너무 그러지 말렴. 사치를 경계하라는 말에 충실할 뿐이었단다.”

“그러신가요? 하지만 자칫 박대한다고 오해 사기 좋으니 주의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아……. 레이얼은 무해하게 미소를 짓는 내쉬를 보며, 큰 소리로 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대놓고 이를 드러내면, 간밤 암살자를 누가 보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않나.

“내쉬, 너의 다정한 성품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감히 황태자의 시종장을 나무라는 걸로 비치면 빈축을 살 테니 조심하렴. 응? 펠릭스 나가보게. 차는 마시던 걸로.”

“예. 전하.”

굳은 듯하던 시종장을 내보낸 레이얼이 다리를 꼬아 몸을 느긋하게 늘어뜨리며 물었다.

“잘 잤니?”

“형님께선요?”

“오랜만에 달게 잤단다. 아르네 공작저는 뒤로 산을 두르고 있어서 공기가 상쾌하더구나.”

“……공작저에서 주무셨습니까?”

“음. 에스코트해드리고 나니 밤이 늦어서 말이야.”

우득. 소리가 나게 단단하게 말린 하얀 주먹. 레이얼은 그런 것은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쉬, 정말로 제대로 잔 건 확실하니? 피부가 말이 아니구나. 무슨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건 아니고?”

“고민은 끝냈지요.”

“그래?”

“이젠, 제대로 해보려고요.”

“응원이 필요한 거니?”

“설마요.”

“그럼 이만 돌아가 자렴. 그런 얼굴로 이야기해 봐야 도무지 흥이 나질 않는구나.”

“흥?”

“적어도 비슷한 상대라야 나도 해볼 마음이 들지 않겠니?”

은근하게 맴도는 말 끝에 레이얼이 건넨 것은 노골적인 경계였다. 내쉬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에서 따온 듯 잔뜩 짙어진 녹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을 뿐.

“그거 아세요?”

몸을 일으키던 내쉬가 고개를 돌려 레이얼을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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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을 게 없으니까, 더 절박하게 매달릴 수 있다는 거.”

“내쉬.”

“네. 형님.”

“그럼 이것도 알아두렴, 지킬 게 있어서 필사적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응원해드려요?”

“아껴두었다가 힘든 날 꺼내쓰렴.”

하. 레이얼의 부드러운 거절에 내쉬가 숨을 뿜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웃는 내쉬는 마치 움츠린 나무가 기지개를 피며 새순을 틔우듯 청량해보였다. 그러나, 레이얼은 찰나에 보고 말았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사이로 보이던 녹안이 광기로 물들어 무섭게 번들거리던 것을.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뚝, 숨이 가쁘도록 터트리던 웃음을 일시에 그친 내쉬는 조각상처럼 무감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속삭이곤 나갔다. 뚜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얼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선전포고인가. 지금도 그리 녹록지 않았는데 대놓고 선언했으니, 이제 정말 벅차겠구나 싶어진다. 하지만 겁이 나는 건 아니다. 지킬 게 있으면 필사적이 되고 만다던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레이얼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너머 아득한 곳을 바라보았다. 황궁 담 너머로 보이는 건 아스라한 지붕들뿐이었으나, 레이얼은 한없이 결연한 표정이었다. * * * 그날 저녁이 지나기 전, 아르네에서 문을 닫아건다는 소식이 수도로 퍼져나갔다. 정확히는 아르네에서 황실로 양해를 바라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황실은 아르네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려 아르네 공작과 소공작이 황제의 명에 지금 초주검이 되어 있지 않나. 아르네 공녀가 아르네 가를 이끌며 가주 대리로 황실의 명을 수행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게 아르네 가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아걸었다. 모든 외부인의 방문과 초대를 거절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아울러 그 누구도 아르네가의 상태에 왈가왈부할 수 없어졌다.

“정말 짜증 난다니까.”

내쉬는 제게 아르네가의 소식을 전한 시종장의 말에 턱을 괴곤 나른하게 속삭였다. 어쩐지 레이얼이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흐응…….”

짜증난다는 말과 달리 내쉬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황자님, 차를 새로 내어드릴까요? 식어서 맛이 덜할 것입니다.”

“식어도 로열크라운인걸.”

알 수 없는 소리였으나, 시종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내쉬 황자궁에 배정받으며 딱 하나를 주의받았다.

‘시키는 대로 할 것’

내쉬 황자에게 길게 말을 섞었던 이들의 끝을 떠올린다면 뼈에 새겨야 할 가르침이었다.

“오늘 아침에 찾아가 볼 걸 그랬지? 꽃을 사 들고.”

턱을 괸 내쉬 황자는 창밖 어디엔가 시선을 매어둔 채였다.

“놀랐을 테니, 모레쯤 가볼 생각이었는데. 어울리지도 않게 배려 같은 짓을 하니 이 꼴이 나는 거지.”

하. 혼잣말인 듯했으나, 시종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쉬 황자의 형형한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예예.”

“머저리 같긴. 오늘 아침에 찾아갔으면 내쫓기기밖에 더 했을 거 같아?”

“아, 예?”

“꼬리말고 깽깽거리는 개처럼 굴지 마. 짜증 나니까.”

“예, 전하.”

그저 자신이 하는 말에 ‘예예’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틈에 있으려니 더욱 더 간절해진다.

‘전하, 덤벙거리는 건 좋지 못한 습관입니다.’

‘아르네는 몰아본 적은 있어도, 달아나 본 적은 없답니다. 정 아쉬우시다면, 첫 춤 이후 청해주시겠습니까? 그때라면 레이얼 황태자께서도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하는데.’

‘이거, 미안하게 됐군요.’

그를 향해 똑바로 쏘아지던 당당한 시선. 그가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레이디 아르네는 단 한 번도 굽신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제 모친을 앞에 두고서도 그랬다. 새파랗게 빛나던 시선이 어찌나 찬란하던지.

“하아…….”

툭. 한숨과 함께 내쉬의 손에서 책이 뚝 떨어졌다. 며칠째 단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똑똑. 서류를 넘기던 레이얼은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성큼성큼 거리는 걸음이 자칫 조급해 보일 만큼 빨랐다. 커튼을 젖혀 누구인지 보지도 않고 문을 활짝 열자, 몰아치는 찬바람과 함께 늘씬한 인영이 쑥, 밀고 들어왔다.

“전하!”

“왜 온 거야!”

말은 불퉁명하지만, 입꼬리엔 숨기지 못한 미소가 매달려있었다.

“왜 오긴. 레이디 아르네께선 안전하니까 염려 말랬잖아.”

“나의 로이도 위험한 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으익.”

‘나의 로이’라는 말에 클로이가 진저리치듯 푸들거렸으나 레이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복면 아래 드러난 하얀 뺨이 추위에 얼어 푸릇했다.

“복면은 왜?”

이미 그는 로이가 누구인지 아는데. 한번 얼굴을 보아서일까. 그도 아니면 그 아래 감춰진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아서일까. 손바닥만 한 천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얼른 벗겨서 그가 아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하지만, 조급한 남자의 손길은 클로이에게 딱 붙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허.”

“왜?”

“내가 말했지, 도움받지 않고, 잡히면 모르는 사이라고.”

“로이. 그때와 다르지 않나?”

“똑같아 전하.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하지. 난 심지어 아르네야. 내가 여기서 붙잡히기라도 하면 반드시 일이 커질 거야. 길롯이 황태자와 아르네를 쓸어낼 기회를 놓칠 리 없잖아.”

“……고집스럽긴.”

“말했잖아. 전하. 좀 새겨둬. 난 내 걸 남 주는 법이 없다고. 응?”

지쳤다는 듯 고개를 잘게 턴 클로이가 레이얼을 슬쩍 밀치며 탁자로 다가섰다. 타닥거리며 불티를 날리는 벽난로 속 장작, 탁자 위를 빼곡하게 채운 서류. 그리고 두 몫의 의자. 오지 말래 놓고 버릇처럼 제 자리를 만들어 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어쩐지 손끝이 간질간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연회 다니느라 잊었네. 우리 미인은 호숫가 별장 잘 만들고 있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클로이가 오자 비로소 그의 밤이 완벽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토록 이기적인 감정이라니. 그는 정말 비열한 시오도르가 분명했다.

“어떨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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