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2. 거짓말쟁이와 나쁜 놈 (62/121)

062. 거짓말쟁이와 나쁜 놈2021.04.06.

결국 클로이의 박력에 지고만 레이얼은 들어와 새 옷을 받고 씻고 나오는 길이다. 늦은 밤 피앙세의 집에서 씻다니. 민망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안내 받은 응접실에 도착해 막, 자리에 앉기도 전 클로이가 달려들 듯 다가왔다. 목덜미에 바짝 들이민 얼굴 덕에 따끈한 날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클로이!”

당혹감에 방어하듯 들어 올린 손을 끌어내린 클로이는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표정이었다.

“전하, 목. 다쳤어?”

“아아…… 조금.”

그제야 레이얼이 잔뜩 긴장한 어깨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씻을 때 보니 목덜미에 상처가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에 베인 건지 깊진 않으나 벌어진 상처 단면이 깔끔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정도야 기사인 그에겐 별일이 아니었다.

“괜찮아.”

그의 대답에도 클로이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조금은 무슨. 꿰매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아. 궁에 돌아가서 처리하지.”

“난 안 괜찮아. 우리 거버 솜씨 좋아. 치료 받자.”

“거버?”

“주치의”

레이얼은 솜씨 좋은 의사라는 클로이의 말에 오래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로이, 의사를 내주마.’

‘솜씨 좋은 의사는 나도 있어.’

‘황의는 다른 의사와는 다르지.’

‘나 진지해. 내가 부르는 의사도 죽은 사람이 아니면 대충 다 고쳐.’

“아아…… 그, 주치의?”

“맞아. 그 주치의야.”

가볍게 되묻는 그의 말에 대꾸는 해주지만 그의 상처를 본 이후로 클로이는 내내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였다.

“난 괜찮아.”

“치료받자. 미인에게 흉이 남으면 아깝잖아!”

여상히 말하나, 시선을 피하듯 내리깔린 긴 속눈썹과 미소를 짓는 입매가 조금 전보다 확실히 경직되어 있다. 레이얼은 클로이의 이상한 반응의 이유를 쉽게 눈치챘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아르네 남자들을 보았으리라. 허세를 부리려거든, 겁에 질린 얼굴이라도 어떻게 해보든가. 정말 거짓말 못 한다니까. 레이얼은 옅게 한숨을 내쉬곤 팔을 내밀었다.

“이리 와.”

“응?”

“안아줄게.”

“뭐? 왜!”

벼락이라도 맞은 펄쩍 뛰는 모습이 아주 활기차다.

“안아준다고.”

“돼, 돼, 됐어! 왜 갑자기!”

“그럼, 안아줄래?”

“……왜?”

“난 무척 놀라서 진정이 안 돼. 누가 날 좀 위로해주면 좋겠어.”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레이얼은 팔을 벌린 그대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안아줘.”

“…….”

“어서.”

하얀 앞니가 쉴 새 없이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며 씹는다.

“구걸해야 할까? 나의 로이?”

귀여운 로이. 사랑스러운 부하씨. 그의 일곱 번째 피앙세이며, 드높은 긍지를 가진 아르네 공녀는 우습게도 어이없을 만큼 마음이 여렸다. 애원하면, 약한 모습을 내비치면 금세 달군 팬 위의 버터처럼 흐물거린다.

“안아줘. 제발.”

그가 제발이라고 덧붙이는 순간, 품 안이 가득 찼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코끝으로 상큼한 향이 들어찼다.

“두, 두 번은 없어!”

“그럼 구걸하기 전에 안아주렴.”

품 안에서 파들거리는 온기를 느긋하게 거머쥔 레이얼이 두 팔에 잔뜩 힘을 올렸다. 가는 뼈마디가 차분하게 오므라들며 그의 가슴에 박혀 든다.

“읍!”

잔뜩 힘줘 안자 클로이에게서 앓는 소리가 울렸다. 물론 옆구리의 상처에 해가 되지 않을 만큼, 그가 졸라매듯 안은 건 어깨에 불과했다.

“전하, 좀 점잖아지면 어때? 어른처럼. 무려 황태자잖아.”

“이미 충분하지 않아?”

“내 앞에서도.”

상체 윗부분이 짓눌리니 숨쉬기가 벅찬지 내내 할딱인다. 원래는 고집스럽게 혼자 버티는 클로이에게 위안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내민 품이었으나, 이 순간 레이얼은 자신이 위로받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품을 가득 채우는 온기와 달콤한 숨소리. 머릿속이 쿵쿵 울리도록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이 뻐근하도록 욕심이 차오른다.

“그건…… 내키지 않아.”

레이얼은 고개를 떨궈 클로이의 정수리에 뺨을 가져다 댔다.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느슨해지면 안 되겠어?”

“…….”

“응?”

클로이는 그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어색하게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문득, 가슴이 뜨끈했다. 클로이의 뺨이 맞닿은 곳이었다.

  전원 몰살. 달이 지기 전 내쉬는 새가 물어온 소식에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하……. 역시라고 해야 했을까. 상대는 무려 레이얼이었다. 레이얼 시오도르.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남다른 실력을 내보인 황태자. 기사서임을 성년이 되기도 전에 받았다고 했던가. 제 기사단은 심지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보통 실력 이상이니 고전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처리하고 싶었기에 첫손에 꼽힌다는 암살단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패 정도가 아니라 전원몰살이라는 소식을 보내올 줄이야. 절로 입맛이 쓰다.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급한 발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부르셨습니까?”

내쉬는 밭은 숨을 삼키며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시종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차를 내와. 평소에 마시던 걸로.”

나가 뒈져버리라고 빌어도 부족할 판에, 애도라니. 제가 건방졌다. 내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이 소리 없이 물러갔다. 이윽고 내쉬의 침대 맡엔 향이 짙고 수색이 뚜렷한 차가 올라왔다. 코끝을 스치는 산뜻한 향은 예전 그대로였는데, 내쉬는 문득 이것 말고 다른 것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하고 진한 것 말이다. 들고 있던 찻잔을 그대로 기울여 바닥에 쏟아버린 내쉬가 다시 설렁줄을 당겼다.

“다른 것으로 내와 로열크라운이 좋겠어.”

“예. 전하.”

공손한 답과 함께 시종이 물러나고 이내 둘이 들어왔다. 하나는 젖은 바닥을 치우고, 하나는 진득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는 차를 그에게 건넸다. 새로 내온 차는 희미한 조명 아래 제 이름처럼 노란빛으로 반짝인다. 그것이 마치 어둠 속에서 눈을 뜬 맹수같아 내쉬는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작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그래. 흉포한 짐승의 눈알을 닮은 이 차는 정말이지 자신에게 딱 어울렸다. 자신은 레이얼을 몰아내고, 달아나 본 적 없다던 아르네 공녀를 쫓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레이디 아르네. 부디 쉽게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말아요. 그래야 쫓는 맛이 날 것 같아. 나를 조금 더 안달나게 해봐.

“흐음.”

혀끝을 간질이며 넘어가는 찻물이 아리도록 달아 더욱 흡족했다. * * * 자다 끌려 나온 거버는 레이얼의 목을 소독하고 붕대를 둘러주는 것으로 끝냈다. 괜히 꿰맸다가 바늘땀 자국이 남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흉이 지지 않을지는 확답 듣지 못했다.

“…….”

레이얼은 의사가 돌아간 뒤로 내내 근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클로이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깟 흉터가 뭐라고. 심지어 클로이는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얼른 먹어 전하. 원래 잘 먹어야 잘 낫는 법이야.”

초콜릿 케이크와 고기 스튜를 번갈아 가며 먹는 식성이 참 괴이쩍었다.

“흐음…….”

레이얼은 제게도 똑같이 주어진 식단에 살짝 곤란한 기분이 들었으나 내색 없이 스푼을 들었다. 저 힐끔거리는 시선과 제 앞에 놓인 음식에 서린 것이 무언지 알아서였다. 애정어린 걱정. 다정한 염려. 평생 그에겐 해당 없는 것들이었다. 베인 목덜미는 통증을 가시게 하고 회복을 돕는 약을 발라두어 이제 옅은 통증조차 가신 지 오래인 건 만 클로이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저릿하다. 보이지 않는 깃털이 그에게 잔뜩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머릿속에도 한껏 들어 차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기뻤다고 한들 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단내를 풍기는 이 초콜릿 케이크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

“생각보다 맛있지?”

“나쁘진 않다.”

“솔직하지 못하긴.”

흥. 버릇처럼 코끝을 울린 클로이가 또 한 번 힐끔, 그의 목덜미를 훑는다. 그리고 쿵, 그의 가슴이 소리 없이 울었다.

“아…….”

레이얼은 기습적으로 울린 심박에 당황해 작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왜 그래 전하?”

가슴을 움켜쥔 채 신음을 흘린 모습에 당황한 클로이가 단번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그를 살폈다.

“거버, 거버 부를까? 어디 아파? 독인가?”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에 거칠게 떨렸다. 잊고 있었다. 늘 괜찮은 척하는 그의 귀여운 피앙세는 가슴이 타는 불안을 홀로 삭이는데 너무도 익숙했다는 것을. 상처 입은 제 모습에서 그녀가 떠올린 건 공작과 소공작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밤 습격에 잠시 망각했던 길롯에게 몰렸던 그들의 처지를 다시 한번 깨우쳤으리라. 말 몇 마디에 기울어질 전세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궁지에 몰린 그대로다. 레이얼은 포크를 내려두고 파르르 떠는 클로이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안아줄래?”

“…….”

“안아줄게.”

클로이는 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반쯤 무릎을 꿇고 있던 클로이의 상체가 숙여지며 그의 허벅다리 위로 가벼운 무게감이 실렸다.

16566377730296.jpg

  레이얼은 제게 기댄 듯한 클로이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전하, 오늘 자고 가는 건 어때? 생각해보니까 마부가 자러 갔을 거 같아.”

거짓말, 참 못 해.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잔당이 남아 있을까 봐 걱정된다는 말을 저렇게 어설프게 돌리다니.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그럴까.’라고 대답해주었다. 무릎을 울리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퍽 가냘팠던 것이다.

“그래. 나도 좀 피곤하던 차였지.”

“그럴래?”

“그러지.”

“다행이다.”

안도감에 들떠 제가 방금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도 모르는 클로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레이얼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허술한 거짓말’

그건 클로이 아르네가 안심했을 때, 비로소 방심 끝에 보이는 틈이란 것을. 그래서, 천진하게 미소 짓는 저 붉은 입술이 더욱 예뻐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하?”

의아한 클로이의 부름에서야 레이얼은 제가 손가락으로 클로이의 입꼬리를 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묻었잖아.”

엄지와 검지를 슬쩍 문지르는 태도에, 클로이의 얼굴이 벌게졌다.

“머, 먹던 중이었잖아. 그리고 초콜릿 케이크가 꾸덕꾸덕해서 조심해도 어쩔 수 없다고.”

조금 전까지 사랑스럽게 웃던 여자는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라 팩 토라졌다. 그러나 레이얼은 그런 클로이를 달래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맞비빈 그의 손가락은 너무도 깨끗했으니까. 개자식. 레이얼은 제가 레이디를 함부로 더듬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홀린 듯이. 그리고 그 순간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얼른 먹어.”

초콜릿 케이크를 떠넣은 포크를 야무지게 빠는 저 입술을. 자신도 빨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쓰레기 같은 새끼. 자괴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레이얼은 자신이 깨달은 게 그것뿐만이 아닌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하? 식으면 맛없어.”

손이 닿을 때마다 피부를 타고 흐르던 찌릿한 감각. 그녀 없이 홀로 지새우는 밤이면 밤새 그를 괴롭히던 그리움. 요즘 들어 점점 더 심해지는 두근거림.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은 그의 레이디,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다. 고작 품에 안는 것으로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충족감이 일만큼. 진심으로. 로이와 클로이가 동일 인물임을 알아차린 순간. 당혹감보다 더욱 진하게 들이쳤던 건 바로, 안도감이었다. 로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앙큼한 부하씨를 놓지 않아도 되어서. 클로이, 평생 아껴주고 귀하게 여겨주리라고 생각한 일곱 번째 피앙세를 마음을 다해 보듬을 수 있어서. 정말이지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걸, 넌 아나?

“전하? 안 먹어?”

레이얼은 자신을 바라보는 클로이를 향해 웃어주었다.

“아. 먹어. 먹을 거야. 남김없이. 나도 내 건 절대 놓지 않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