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4화>
“어, 어어? 어어어!”
강태한과 눈을 마주친 중년 남자는 세 번에 걸쳐 반응했다.
강태한을 보고 놀라고, 아래에 누워있는 친구를 보고 또 놀라고, 강태한의 모습이 너무 멀쩡해서 한 번 더 놀란 것이다.
“뭐야! 언제 올라왔어?!”
“저길 혼자 올라왔다고? 성인남자를 들쳐 메고서?”
“아니, 이야··· 말이 되나 그게?”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강태한과 아래에 누워있는 피구조자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감탄을 내뱉을 뿐이었다.
“···학생. 혹시 특전사나 뭐 그런건감?”
“야. 아무리 특전사래도 이게 말이 되냐?”
“그럼 뭔데? 리듬체조?”
“아니··· 마술사?”
“아 이 인간들이 진짜.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자기들끼리 주책 맞는 추측들을 나누던 중, 일행에서 한 남자가 그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가장 점잖아 보이는, 아무래도 일행의 중심 격이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학생, 도와줘서 정말, 정말로 고맙네.”
그는 쓰고 있던 등산모를 벗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목소리와 행동 모두에서 진심이 우러나오는 감사였다.
* * *
구조 이후, 남자는 뒤늦게 도착한 산악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이송되었다.
듣자하니 뇌진탕 증세로 인해 의식을 잃은 것 같지만, 그래도 구조가 빨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모양이었다.
강태한의 활약으로 구조 과정이 생략되고 곧바로 환자를 이송할 수 있었던 덕분.
물론 ‘다음부터 이러시면 안 된다’는 구조대원의 핀잔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학생. 다시 한 번 고마워.”
“이거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일행 중 네 명은 부상자를 따라 하산했지만, 다른 둘은 아직 강태한과 함께 남아있었다.
먼저 감사 인사를 건넸던 점잖은 남자와 혹시 특전사냐고 물어봤었던 다소 가벼운 인상의 남자였다.
거듭되는 감사에 강태한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저었다.
“별 말씀을.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보다 친구 분은 어쩌다가 언덕 밑으로 떨어지신 겁니까?”
“저 친구가 사진을 좋아하는 친구인데··· 아무래도 사진을 찍다가 떨어진 모양이야. 나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말이야.”
“사진 찍다가 떨어진 게 맞아. 사진기 들고 있다가 미끄러지는 걸 내가 봤다고. 쯧. 하필 저런 곳에서.”
그는 자리에 없는 친구한테 핀잔을 하며 혀를 찼다.
다치지만 않았다면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었을 정도로 부주의한 행동이었다.
“그건 그렇고 통성명도 안하고 있었군.”
“어, 나도 명함이··· 아 여기 있구만.”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두 남자는 강태한에게 각각 명함을 건넸다.
[백병원 병원장 박호연]
[공주컨트리골프클럽 오너 조원호]
명함을 확인한 강태한은 신기함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등산을 하다가 만난 인연이라고 하기엔 꽤 화려한 직함들이었던 탓이다.
특히 전자 쪽은 몰라도 후자 쪽은 흔히 동네 아저씨라 불리는 인상과 딱 맞는 느낌이었기에 더더욱.
“혹시라도 도와줄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게. 뭐라도 좋으니까 말이야.”
“이놈 병원이 이래 뵈도 꽤 잘 나가는 곳이야. 그리고 난··· 음, 학생이 필요하다고 하면 돈은 빌려줄 수 있지.”
“···너는 이럴 때도 장난이 나오냐?”
“장난 아닌데?”
친우 사이에 오가는 핀잔과 대응이 친숙하고 자연스럽다.
보아하니 꽤 오랜 사이인 모양.
그러다 순간, 문득 떠올랐다는 듯 조원호가 손뼉을 쳤다.
“맞아. 학생, 혹시 술 좋아하나?”
“술 말입니까? 싫어하진 않지만···”
“다행이구만! 조금만 기다려봐.”
강태한이 거절을 하기도 전에, 조원호는 배낭을 내려놓고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안에서 갈색빛 액체가 담긴 물통 하나가 나왔다.
“이거 도라지술인데, 이게 또 몸에 아주 좋거든.”
“···그거,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태한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려했다.
하지만 배낭에서 나온 술병을 본 순간,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보다 정확히는 거기서 새어나오는 기운을 감지한 순간부터였다.
“이거? 이건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거야. 내가 직접 캐서 내가 담근 술이니까. 세계에 몇 병 없는 술이다 이거야.”
조원호가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강태한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은 듯 기분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맛 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어? 아니 학생 주려고 꺼낸 거니까 아무 문제없긴 한데··· 보기보다 술을 많이 좋아하나봐?”
강태한의 적극적인 모습에 조원호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 전까진 점잖다 못해 묵직한 무게감이 실린 인상이었던 탓이다.
한편, 강태한은 술병을 건네받고서 곧바로 뚜껑을 열어 거기에다 술을 조금 따랐다.
술 자체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집에서 만든 담금주가 으레 그렇듯, 딱 그 정도 수준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까 강태한이 놀랐던 것은 술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생각 이상이군.’
조금만 따라 아래쪽에서 찰랑이는 술.
허나 거기서 새어나온 기운이 잔을 가득 채우며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현대로 돌아와서 느껴본 것 중에 가장 선명한 영기(靈氣)였다.
‘과장만 좀 보태면 영약이라도 불러도 되겠어.’
영약(靈藥).
직역하면 신령스러운 약.
그 자체로 영험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 복용하고 몸에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수 년, 수십 년 치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약을 말한다.
대개는 이름만 그럴듯하고 별 효능은 없는 하등품들이 대부분이지만, 천년 묵은 삼이나 영물의 내단처럼 희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영약들은 그 자체로 온 무림이 들썩일 정도로 강력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 도라지술은 영약이라 부르기엔 부족한 물건이다.
분명 영기를 담고 있긴 했지만 단지 그뿐.
만약 중원에서 이걸 영약이라고 팔았다가는 사기꾼 소리를 들으면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림의 기준.
여기가 기의 개념 자체가 흐릿해진 현대라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 수준으로도 영약이라 불리기에는 충분했다.
‘어디 한 번.’
강태한은 잔을 들어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켰다.
직접 맛을 보니 더욱 더 선명하게 영기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침 산의 맑은 기운을 떠올리게 하는 정순한 영기.
영기를 머금으며 자란 약초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느낌이다.
‘···좋군.’
체내를 맴돌며 자연스레 흡수되는 맑은 영기.
영기의 양 자체는 굳이 운기조식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흡수될 정도로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영기의 감각 자체가 각별했다.
평범한 담금주의 맛조차도 향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어때, 괜찮지?”
강태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조원호가 물었다.
강태한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자랑하실만합니다.”
“흐하하. 다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한 입 마셔보면 표정이 달라진다니까? 이게 진짜 내가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야.”
솔직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듯 조원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직접 캐서 담그셨다고 했었죠?”
“음? 아, 그랬었지.”
“혹시 어디서 캐신 건가요?”
우연히 특출나게 영기를 품은 도라지를 캔 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기가 담긴 이 도라지술은 그저 우연의 산물.
그 도라지로 담근 술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한정된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직접 맛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건 이 도라지를 캔 그 땅, 그 산 자체가 짙은 영기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훨씬 크게 열리게 된다.
애당초 이건 도라지에 불과하다.
까놓고 말해 영약과는 매우 거리가 먼 흔한 약재다.
만약 이 도라지를 캔 산에서 자란 다른 약초들을 캔다면?
만에 하나 산삼이라도 발견한다면?
강태한으로선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상이었다.
“···왜, 왜 그래? 내가 어디 엄한 데서라도 캐 왔을까봐? 그런 거 아니야.”
한편, 캐묻는 듯한 강태한의 질문에 조원호는 난감하단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사람을 구하고도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혹시 괜한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산에서 약초나 나물을 캐는 것은 불법입니다!’ 순간 등산로 곳곳에 걸려있던 경고문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의 생각을 대략 짐작한 것일까.
강태한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좀 생겨서요. 저희 아버지도 술 담그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아, 그래? 그럼 진즉 말하지!”
담금주.
자신의 관심사가 화제로 나오자 조원호의 표정이 금방 다시 화색으로 바뀌었다.
“저도 좀 캐 가면 좋아하시겠다, 싶어서요.”
“그렇구만.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데서 캔 건 아니고, 제대로 개인 사유지에서 허락받고 캔 거야.”
“사유지요?”
“우리 친구 중에 땅을 좀 많이 갖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말이야. 그 친구가 갖고 있는 산이라네.”
이번에는 옆에 있던 박호연이 대신 대답했다.
계속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계속 가만히 서있기에는 영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공주에··· 어디였지? 주소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여기서 좀 멀긴 하지만 차 타고는 갈만한 곳이었지.”
“동네 이름이 오곡? 오룡? 아무튼 사람이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서, 산길은 좀 험한데 이런 거 캐기가 참 좋아.”
“나중에 한 번 가보면 좋겠는데, 혹시 그분 좀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강태한의 말에 조원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아마 그 친구도 좋아할 거야.”
“자네가 구해줬던 사람이 바로 그 친구거든.”
“···아하, 그렇군요.”
강태한은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생판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단 도와줬던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더 나으리라.
우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우연이라면 몇 번이라도 반가울 따름이다.
* * *
“그럼 다음에 꼭 연락하게!”
“혹시 골프 칠 일 생기면 연락해!”
“예. 조심히 내려가세요.”
강태한은 아직 더 산을 올라야했고, 박호연의 일행은 원래 산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강태한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남긴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지나가지 않길 잘했군.’
처음엔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괜히 오지랖을 부리는 건 아닐까 고민했었는데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다.
강태한은 방금 받았었던 명함을 떠올렸다.
백병원은 집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꽤 규모도 크고 유명한 병원이다.
딱히 인맥 갖고 유세떨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입원하실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여기에 나름 영약이라고 부를만한 도라지술도 한 병 얻었고, 앞으로 영약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찾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성과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흠.”
강태한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두어 차례 꼼지락했다.
한때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피를 손에 묻히고, 복수를 위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만들었던 손이다.
이 손으로 선행을 베푼다고 하면 그야말로 위선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군.”
생각지 못하게 얻은 성과와는 별개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감사를 받는 것.
그건 생각보다도 꽤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