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5화>
천마.
마교의 우두머리.
마교란 순수하게 강(强)을 숭배하는 강자존(强者尊)의 집단이다.
그렇기에, 천마라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가장 강한 자를 뜻했다.
그 자리에 어떻게 강태한이 올라섰는가.
사실 처음 무림에 떨어졌을 때, 강태한은 무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장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데 무슨 놈의 무공이란 말인가.
그랬던 그가 무림인이 된 것은.
그저 낯선 세계에서 거지꼴로 빌빌거릴 때, 유일하게 그를 도와주고 거둬줬던 스승이 무림인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랬던 그가 천마가 된 것은.
문파가 멸문당하고 은인이었던 스승이 살해당했을 때, 그 음모의 배후에 전대 천마가 있었을 뿐이다.
복수.
그 이후로 강태한은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지 했다.
그는 약자였고 약자는 수단을 가릴 수 없다.
살인이 필요하다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일들을 끝마쳤을 때.
그는 새로운 천마가 되어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두 번 할 짓은 못 되지.’
후회는 없었다.
‘복수는 씁쓸할 뿐이다’라는 세간의 흔한 가르침들과 달리 복수는 달콤했다.
···허나 세월이 지나고, 머리가 하얗게 새갈 무렵.
유독 옛 스승의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아른거렸다.
‘성인(聖人)처럼 살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그 한 마디가.
‘무림에서는 그리 지키지 못했던 가르침이었는데.’
천마라는 것은 힘과 공포의 상징.
그땐 이미 먼 길을 와있었고, 돌이키기엔 늦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남아있는 세월도, 시대도 다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옛 스승의 가르침대로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삶’의 길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어찌 보면 얼떨결에 첫 단추도 잘 꿴 셈이군.’
안마사.
원래는 돈이 급한 상황에서 단순히 돈 때문에 시작했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금 다르다.
원래 자신의 무공, 그리고 그와 관련된 지식들은 오로지 타인을 해치기 위해서만 갈고 닦은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또 그걸로 감사를 받는다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뿌듯했다.
‘그렇다고 성인군자가 될 생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여유가 있다면 되도록 선행도 베풀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삶.
과연 이 일을 업으로 삼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다 진지하게 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런 생각과 함께 강태한은 걸음을 옮겼다.
* * *
천리물산의 김관호 부장.
그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고, 매일 밤마다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니 컨디션이 나쁠 수가 없는 것이다.
“김 부장, 요즘 얼굴이 훤해 아주?”
어두워지는 일 없이 싱글벙글 밝은 표정.
요 근래 안색이 안 좋아 뭔 일이 있나 싶었는데, 지금은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게 느껴진다.
심지어 일요일에 거래처와 골프를 치러 나온 건데도 말이다.
“하하. 오랜만에 유 상무님이랑 라운딩 나올 생각을 하니, 전날부터 가슴이 설레지 뭡니까?”
“이 사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네?”
“어? 진짭니다?”
김관호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하자, 유 상무는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자네가 나 좋아하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몸에 좋은 거 있으면 우리 같이 공유하자구. 뭐야. 먹는 거야? 아니면, 마시는 거?”
유 상무는 젓가락 흉내를 냈다가 소주잔을 넘기는 흉내를 냈다.
김관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 왼손으로 입 한 쪽을 가리며 비밀스레 말했다.
“둘 다 아닙니다.”
“그럼 뭐야? ···이건 아닐 테고.”
유 상무가 이번엔 주사기 시늉을 내며 말했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장난으로 말한 거긴 한데, 지금 자네 텐션이 약간 뽕이라도 맞은 것처럼 보이긴 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상이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뽕이라···”
김관호는 턱 부근을 매만지며 잠시 뜸을 들였다.
“뽕은 맞아본 적이 없지만, 처음 받고 나왔을 때는 확실히 뽕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죠. 물론 몸에 해로운 건 하나도 없었고요.”
“그래서 그게 뭐냐고. 뭔데 자꾸 바람만 넣어?”
자꾸 뜸을 들이는 김관호의 반응에 유 상무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관호는 하하 웃으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니, 이번에 알게 된 거래처 직원이 안마샵 하나를 소개시켜줬는데, 거기 계신 선생님 한 분의 솜씨가 장난이 아니지 뭡니까.”
“안마? 어느 동네에 있는 덴데?”
“그게 사우나에 딸려있는 안마샵이었습니다.”
“···사우나에?”
김관호의 말에 유 상무의 표정이 팍 식었다.
사우나에 딸린 안마샵이라면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관호가 손을 저었다.
“이게 별 거 없을 거 같은데 막상 받아보면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받고 나오자마자 다음 예약부터 잡았을 정도라고요.”
“···그래?”
“그렇다니까요. 제가 그래도 안마원, 스포츠 마사지, 태국 마사지, 뭐 나름 소문난 곳은 다 다녀봤지 않습니까? 근데도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김관호의 안목이 꽤 괜찮다는 건 유 상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확실히 다른 뭔가가 있으리라.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다음에 한 번 가지.”
“좋죠! 사우나는 평범하긴 한데, 꽤 깔끔해서 몸 좀 풀고 나오기 딱 좋습니다.”
김관호가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유 상무가 강태한의 단골손님 중 한 명이 되는 것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입소문이라는 게 원래 당장 눈에 띄는 효력은 없지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한 홍보 효과를 가진 놈이다.
당장 인터넷에 잔뜩 올라와 있는 수십 개의 맛집 리뷰보다 현지에 사는 지인 한 명의 추천이 더 믿음직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여기엔 연쇄작용마저 일어난다.
남우현이 김관호를 데려오고, 김관호가 새로운 손님을 데려오고, 그 손님은 단골이 되어 또 다른 손님을 데려오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구조.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단지 몇 명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강태한의 손을 거쳐 간 손님들 대다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 요새 허리가 좀 편찮으시다고 했었죠? 제가 이번에 괜찮은 안마샵 하나를 알았는데···”
“민수 엄마가 그러는데, 거기 안마 선생님 한 분 실력이 진짜 장난이 아니라고 하데. 거기 바깥양반이 요즘 그렇게 힘이 넘친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느낌부터가 달라. 십 년은 젊어진 것 같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지인에서 지인을 거쳐 퍼져나가는 입소문.
그 결과, 전에 이야기가 나왔었던 강태한의 프리미엄 코스는 시작하기 전부터 호황인 상태였다.
“···이거, 가격을 좀 더 올려 받을 걸 그랬나?”
황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감탄을 뱉었다.
앞에 놓인 화면에 나와 있는 것은 장인 코스의 예약표.
장인 코스는 전에 말했던 프리미엄 코스로, 단골도 많고 평도 좋았던 두 안마사에게만 할당되어 완전예약으로 운영되는 서비스다.
하지만 원래 가격이란 것이 소비자 민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그렇기에 걱정도 많았고, 인상폭도 그리 크게 잡지는 못했는데···
‘걱정을 한 게 우스울 정도네.’
강태한의 예약표는 이미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앞의 2주 동안은 출근시간 같은 기피 시간밖에 안 남아있었고, 그마저도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었다.
“가격을 낮게 잡은 건 아닌 것 같은데···”
황 실장은 화면에 다른 예약표를 띄웠다.
강태한과 함께 장인 코스를 맡게 된, 나름 단골도 많고 실력도 좋은 다른 안마사, 김성훈의 예약표였다.
하지만 방금 전 강태한의 것과 비교하면, 여기는 간간히 채워져 있긴 하지만 휑할 정도로 비어있었다.
‘···아니지. 이건 태한 씨가 이상한 거지.’
오히려 김성훈 쪽이 예상했던 반응에 가깝다.
장인 코스는 다음 주부터 시작인데 어떻게 벌써 예약이 채워진단 말인가.
강태한 쪽이 말이 안 될 정도로 반응이 좋을 뿐이다.
“근데 태한 씨 솜씨가 그렇게 좋나?”
원래 샵에서 가장 솜씨가 좋고 손님이 몰렸던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헌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강태한이 금방 따라잡더니,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이를 벌려놓은 것이다.
이 정도 되면 한 번쯤은 안마를 받아보고도 싶다.
문득 기억을 돌이켜보니, 강태한에게 안마를 받고 나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느슨하게 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족이라는 게 넘쳐흐른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부탁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황 실장은 마우스 휠을 굴리며 피식 웃었다.
강태한은 늦은 아침에 나와 저녁까지 쉬지 않고 안마를 하고, 그럼에도 찾는 손님이 너무 많아 예약이 밀려있는 수준이다.
그런 사람한테 잠깐 안마 좀 해달라고하기엔 아무래도 미안하지 않겠는가.
황 실장은 왼쪽 어깨를 잡고 목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잠을 잘못 잤나···’
담이 결린 것처럼 목이 뻣뻣하고 숙이면 아팠다. 일하는데 지장은 없지만, 생각 없이 움직이다 느닷없이 아파오는 게 영 불편했다.
이따가 카운터 직원이 출근하면 잠깐 사우나라도 다녀와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어, 황 실장님. 출근하셨어요?”
“오! 태한 씨. 일 마치고 나오는 거야?”
“예. 손님 나오시면 응대 좀 부탁드려요.”
때마침 한 건 마치고 대기실로 가고 있던 강태한.
그는 문득 뭔가를 발견한 듯 황 실장 쪽으로 걸어갔다.
“잠을 좀 이상하게 자셨나보네.”
“어, 어? 아니··· 좀 그런가?”
“베개라도 바꾸셨나, 이쪽이 좀 불편하시겠는데.”
황 실장은 순간 당황한 나머지 어색하게 반응했다.
반면 강태한은 왼쪽 아랫목을 톡, 톡 건드리며 대수롭지 않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안 거야?”
“척 보면 알죠. 지금 목의 각도부터 다르잖아요.”
“가, 각도?”
“예. 어쨌거나, 괜찮으면 제가 좀 풀어드릴까요? 잠깐이면 되는데.”
강태한은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잠깐이면 돼요.”
“그래?”
“예. 이 정도야 뭐 간단하죠.”
“그럼 부탁 좀 해볼까···”
황 실장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강태한은 그의 왼쪽어깨와 뒷목을 잡았다.
그리고 근육과 근육 사이, 뭉쳐있는 지점을 각각의 엄지손가락으로 지긋이 압박했다.
“으윽···?”
일순 저릿, 하고 전기가 몸을 관통하는 듯하다.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다음 순간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풀어지고 몸이 느슨해졌다.
마치 목을 잡힌 게 아니라 거기에 기대고 있는 듯한, 그런 묘한 느낌이다.
그 느낌에 점차 익숙해져갈 무렵.
“어때요.”
“···어?”
어느새 손을 풀고 나온 강태한이 앞에 서있었다.
황 실장은 반사적으로 목과 어깨를 두어 차례 돌렸다.
결림은커녕 근육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예전보다 움직임도 부드럽고 가벼웠다.
이 느낌을 굳이 흔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시원하네?”
“괜찮죠? 불편한 데 있으면 다음에도 말하세요.”
강태한은 한 번 싱긋, 웃고는 손을 저으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황 실장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와 어깨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담이 결려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이게 말이 되나?”
시계를 보니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목에 결린 담을 순식간에 풀어놓은 것이다.
안마가 아니라 마술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손님이 많을 만 하네.”
잠깐 사이에도 이 정도인데, 이걸 몇십 분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 자기도 조금만 더 받고 싶을 정도였다.
납득한 황 실장이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