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3화>
수행을 쌓는다.
무협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산에 틀어박혀 수련을 쌓는 묘사가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당, 곤륜, 소림, 그 외에도 대다수의 문파들은 사람이 많은 도시가 아니라 깊은 산 속에 자리를 잡곤 한다.
말 그대로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부분.
그럼 정말 산에서 수행을 쌓는 게 효과가 좋은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강태한은 ‘그렇다’고 대답해줄 수 있었다.
단순히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렇게 나오니 그럴 것이다’라는 게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는 대답이었다.
“후우우.”
지금 강태한이 있는 곳은 계룡산.
대전 외곽에 위치해있는 한국의 명산 중 하나다.
웅장한 외관도 뛰어나지만, 한때 나라의 수도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풍수지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산이다.
“확실히 좋군.”
이제 목적지까지 얼추 3할 정도 올랐을까.
도중에 마침 앉기 좋아 보이는 바위가 하나 있었기에, 강태한은 잠시 발을 멈추고 거기에 앉았다.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경치가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웠던 탓이다.
“명산이구나.”
무림에서 지낸 나름 긴 세월.
강태한은 중원의 수많은 산들을 돌아다녔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산을 보는 안목 또한 자연스레 지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명산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웅장하게 펼쳐진 산경(山景), 높이 솟은 험난한 봉우리는 마치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듯하다.
허나 정작 산을 오르는 길에 펼쳐져있는 풍경은, 마치 산을 오르는 이들을 북돋고 축복하려는 것처럼 아름답다.
장엄(莊嚴)하되 삭막(索莫)하지 않다.
무림에 있던 시절 중원에 퍼져있던 한국의 산에 대한 묘사로, 특히 이곳, 계룡산은 그 묘사가 아주 잘 어울리는 산이라 할 수 있었다.
“공기도 아주 좋고.”
흐으읍.
강태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대기 중에 떠다니는 기(氣)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직도 무림과 비교하면 여전히 한참 부족했지만, 도시 한복판과 비교하면 몇 배는 짙은 농도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기의 순도.
도시에서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던 기는, 양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기운이 너무 탁해 활용자체가 힘들었다.
허나 이곳의 기는 다르다.
체내에 흡입함과 동시에 내공으로 전환이 가능할 정도로 기운이 정순하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만으로도, 미미한 양이지만 체내에 기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이 정도면··· 한 번 해볼까.’
마침 주변에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태한은 바위에 앉은 상태 그대로 무릎 위에 손을 얹고, 편안한 상태 그대로 눈을 감으며 잠시 단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단전 안쪽에서 느껴지는 힘의 덩어리.
그동안 흡성대법으로 조금씩 모아둔 내공이다.
이제 잠깐이라면 간단한 무공 정도는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 양이 모였지만, 질적인 부분에선 아직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애당초 여기저기서 탁기를 끌어 모아 쌓은 내공이고, 태청심공(太淸心功)과 역근경(易筋經)의 원리를 통해 부작용이 없도록 갈무리를 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천 조각을 모아 조각보를 만들었는데, 여기저기 묻은 때와 바늘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라고 할까.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별도의 정련(精鍊) 과정이 필요했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앉은 상태에서 긴 호흡을 반복하여 몸에 힘을 뺀다.
신체가 편안해지고, 몸의 감각이 예민해졌을 때,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고리를 만들고 양손에다 정신을 집중한다.
왼손에는 하단전에서 꺼내온 자신의 내공을, 오른손에는 방금 막 외부에서 끌어들여온 맑은 기를.
어느 한쪽이 과해지지 않도록 기의 비율까지 맞추고 난 후, 준비가 끝나면 호흡을 내쉬면서 두 고리가 서로 닿지 않도록 엮은 다음, 양손의 기운을 양쪽으로 서로 통과시킨다.
‘···좋아.’
체질에 맞는 기운의 내공은 그대로 통과하여 오른손으로 건너가고, 아직 남아있던 탁기와 성질이 어울리지 않는 기운의 내공은 스쳐지나가는 맑은 기운에 이끌려 왼손으로 되돌아간다.
깨끗하게 걸러진 오른손의 내공은 다시 단전으로 들여보내고, 왼손에 모인 불순물들은 날숨과 함께 바깥으로 내보낸다.
단전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내공의 정련(精鍊).
심법에 따라 방법은 각자 다르지만, 거의 모든 심법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자신의 체질에 맞는 순도 높은 내공을 얻기 위해선 수시로 반복해줘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네다섯 차례 반복했을까.
등 쪽에 맺혀있던 땀이 서서히 식어갈 무렵, 강태한은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거리가 멀긴 하나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가까울 때는 피하는 게 좋으니.’
심법을 운용하는 중에 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해야하는 것이 상식.
운기(運氣)를 어지간히 깊이 한 게 아니라면 큰 문제까진 일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괜히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
괜히 사이비 도인처럼 보이는 일은 피하고 싶다.
애당초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가볍게 시험 삼아 해봤던 것이었기에, 강태한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어느 정도 올랐을까.
맞은편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이 건네는 인사에 강태한은 순간 멈칫했다가 마주 인사했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
그는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게 익숙한 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습니다. 즐거운 산행 되시길.”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조심히 내려가세요.”
“고마워요.”
등산객끼리 오가는 덕담.
흔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종종 있는 일이다.
발걸음이 위아래로 어느 정도 멀어졌을 쯤, 혼자 걸어가고 있던 강태한이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평화롭군.’
솔직히 말해, 강태한은 산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다.
등산로가 좁아진다거나 번잡하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무림에서 지내는 동안 생긴 습관의 탓이었다.
‘무림에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하기 바빴으니까.’
겉보기엔 수상하지 않더라도, 저 사람이 그냥 행객인지 산적단이 보낸 망꾼인지, 아니면 가슴 품에 비수를 숨긴 암살자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때로는 방금처럼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건 혹여 수상한 낌새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뿐인지 단순히 반갑다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특히 서로가 무림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편히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옛날에 비하면 참 사치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음?”
그렇게 좀 더 올랐을까.
갑자기 앞쪽에 모여 있는 인파가 보였다.
얼추 보이는 사람의 숫자만 해도 대여섯은 되어보였다.
‘무슨 일이지.’
다들 언덕 끝부분에 서서 아래쪽을 보고 있는 것이 그냥 앉아서 쉬는 것 같아보이진 않았다.
강태한은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뭔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이고, 이 일을 어쪄!”
“김씨! 어설프게 기웃거리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그러다 김씨까지 굴러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꽤 가파른 경사의 언덕.
그곳에 모인 남자들은 하나같이 언덕 아래를 쳐다 보며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떨어졌나보군.’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금방 파악했다.
보아하니 가장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네 명은 떨어진 사람의 일행.
그나마 침착한 둘은 지나가던 산객인 모양이다.
강태한은 옆쪽으로 돌아가 언덕 아래를 살폈다.
언덕의 경사는 절벽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중간 중간 수풀이 우거져있어 시야가 차단되어있는데, 수풀이 빈 곳으로 보이는 바닥은 높이가 꽤 되어보였다.
사람이 내려가긴 힘들어 보이는데 어디 떨어져 있는지조차 확인도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떨어진 사람이 보여도 불안할 텐데, 육안으론 보이지 않으니 일행들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흐음.’
강태한은 잠시 눈을 감고 내공을 끌어올려 언덕 아래쪽으로 기감을 펼쳤다.
활용할 수 있는 내공의 양은 아직 소량이었지만, 방향을 한정하고 약간의 기교만 더해준다면 꽤 넓은 범위를 탐색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리 멀진 않군.’
가운데쯤 수풀이 가장 우거져있는 부분.
그쪽 아래에 평평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곳에 한 남자가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정황상 이 남자가 사고자일 것이라, 강태한은 생각했다.
상황을 보건데 남자는 머리에 부상을 입은 모양이다.
지금은 다행히 중간에 걸쳐져 있지만,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다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위치다.
여기서 더 떨어지면 얄짤없이 한참 아래에 있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지겠지.
‘···어떻게 할까.’
사람을 구조할 때 고려해야할 것은 두 가지.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더 나은 구조수단이 있진 않은가?
구조 과정에서 본인도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없는가?
전자의 경우엔 산악 구조대가 있고, 이미 신고도 했겠지만,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다.
경사가 가파르긴 하지만, 서역의 험산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간단한 경공만으로도 충분하다.
‘···천마가 구조 활동이라.’
그리 어울리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천마가 안마를 하고 있는 것부터 웃긴 일이지 않은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경사면 위쪽에 튀어 나와있는 작은 바위를 향해 가볍게 뛰어내렸다.
“어어! 학생! 위험해!”
“학생, 올라와!”
곧바로 위쪽에서 걱정 섞인 고함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차피 말을 들을 일도 없었기에, 강태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음 디딤돌을 향해 뛰어내렸다.
약 2m 높이를 과감하게 뛰어내리는 도약.
하지만 착지한 몸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균형을 잡아냈다.
경공(輕功).
말 그대로 가벼움을 지향하는 무공.
단순히 높은 곳에서 균형을 잡는 것 정도야, 내공 없이 몸만 움직이는 선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강태한은 아무렇지 않게 사고자가 있는 작은 언덕까지 순식간에 내려갔다.
“괘, 괜찮은 거 맞나···?”
“아우, 보는 내가 다 불안하네.”
위쪽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신기하면서도 조마조마하고 있는 상황.
이윽고, 강태한은 남자 한 명을 어깨에 들쳐 메고서 수풀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적 같은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파른 경사를 올라오기엔 아무래도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뭐 없나? 줄 같은 거 없어?”
“아무거나 꺼내봐 좀!”
뭐라도 도와야한다는 생각에 다 같이 짐을 뒤지는 사람들.
다행히 산객 중 한 명이 산악용 로프를 꺼내들었다.
이거라면 저 학생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이쪽은 나무에 묶고, 반대쪽은 저쪽에 던져!”
“학생! 거기서 이거 잡고 올라와!”
“···잠깐. 없는데? 안 보여!”
“뭐, 진짜야?”
그새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밧줄을 들고 아래쪽을 살피던 남자는 물론 다른 이들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언덕 아래로 고개를 내밀자, 그 말대로 경사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고, 이를 어떻게 해.”
“그러니까 위험하대도. 내려가긴 했더라도 거길 무슨 수로 다시 올라오냔 말이야···”
“왜요. 또 무슨 일 났어요?”
“아니,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떨어졌는데, 그거 구하겠다고 한 학생이 내려갔다가 또···”
설명을 하던 남자가 순간 말을 멈췄다.
왠지 방금 전에 똑같은 목소리로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던 탓이다.
“설마 그새 한 명 또 떨어진 건 아니겠죠?”
남자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선 방금 언덕 아래로 내려갔던 학생이 아무렇지 않게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었고, 그 발밑에는 아까 전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던 친구가 배낭을 벤 채로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