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장님 잡고 갑시다(2)
회귀 전 부산영화제는 크게 성공하고, 오차장은 마케팅 부서의 실세가 된다.
‘그리고 부장을 넘어서 임원까지 노리게 되지.’
최경준, 정부장은 한록과 현과장 같은 타입은 아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그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될 뿐이다.
‘오차장이 gv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이번에도 둘은 오차장의 라인이 될 것이다.’
생각을 마친 한록이 입을 열었다.
“오차장님이 gv로 입지를 굳히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부산영화제에 오차장님
의 공이 많이 들어간건 사실이니까요.”
“영화제를 망치잔 거야?”
“아뇨, 저희가 오차장님보다 더 잘해야한다는 거죠. 오차장님이 담당하는 프
로젝트와 똑같은 시간에 gv를 배치해서, 저희가 훨씬 더 많은 관객을 데려오
는걸 보여줍시다.”
오차장과 관객수 대결을 하겠다.
다시 말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오차장보다 뛰어나다’는 걸 보여주겠단 뜻이
었다.
“완전 정면으로 맞붙겠다는 거구만.”
평소라면 겁을 먹거나, 그건 아니지 않냐고 말렸을 현과장.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반대를 하지 않았다.
“능력으로 오차장을 꺾는다라...”
현과장의 눈에 비치는 승부욕.
“좋아. 가보자.”
단호하게 말한 현과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전부 다 최고로 준비하자. 영화관도 제일 큰데로 대관하고, 감독님도 제일
유명한 사람으로 데려오고. 박감독이나, 봉감독님 같은 분. 아니면 아예 두분
다 연락해볼까?”
“아뇨, 생각하고 있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누군데?”
“윤감독님이요.”
“....뭐라고?”
현과장이 놀라 되묻는다.
“윤감독님? 삼일의 삶?”
“네, 맞습니다.”
“이대리. 삼일의 삶이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이건 아니지 않아? 그분 이게 데
뷔작이야. 거기에 삼일의 삶도 소규모 인디영화고. 누가 gv를 누가 보러오겠어?”
“그걸 보러 오게 만드는게 저희 마케터들이 해야하는 일 아닙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 그래도 지금은 아니지 않아?”
현과장이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도 이해는 간다.
GV는 보통 감독과 영화의 유명세에 따라 흥망이 정해지는 것.
그런데 오차장과 붙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유명하지 않은 신인감독을 데려오
겠다는 한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대리.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를 가져와야 하는거잖아.
“삼일의 삶이 제가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한록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대리가 삼일의 삶 좋아하는 것도 알고, 삼
일의 삶이 좋은 영화인것도 알아. 그래도 이건 이대리 욕심이다. 난 이대리
욕심 때문에 일 망칠 생각은 없어.”
“과장님,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강하게 얘기하는 현과장과, 설득을 시작하는 한록. 망설이던 현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록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삼일의 삶, 야외무대에서 상영할겁니다. 해운대 비프 랜드에서요.”
해운대 비프 랜드.
해운대 해수욕장에 설치된 야외무대를 뜻한다.
“비프 랜드면...바닷가에서 상영을 하겠다고?”
“네. 삼일의 삶은 바다에 대한 영화죠. 그리고 영화에 몰입할수록 감동을 받
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현과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과장은 삼일의 삶에 대한 강한 몰
입을 직접 느껴본 사람이었다.
“바닷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겁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삼일의 삶인거죠.”
“밤바다에서 상영하는 영화라...”
가족들과 여름마다 바다로 휴가를 가는 현과장.
현과장에게 바다는 언제나 애틋한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한록의 말하는 장면이 마치 눈에 그려지는 것마냥 선명하게 상상됐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어부의 바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철썩이는 부산 밤바다...
현과장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부산 밤바다.
바닷가에서 진행되는 영화제.
그 모습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과, 어디서도 본 적 없었던 야외무대에 감탄
하는 외국인들.
그리고...그들 앞에서 재생되는 삼일의 삶.
사람들은 삼일의 삶을 보며, 언젠가 자신이 찾아갔던 밤바다를 떠올릴 것이다.
마치 재개봉때 현과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무모한 시도다.’
‘그런데도 해보고 싶다.’
심장이 뛴다. 마케터라면 누구나 한번 해보고 싶을 획기적인 아이템. 설사 실
패하더라도,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한록의 자신만만한 말.
‘아, 졌다.’
현과장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안하면 후회한다.’
*
잠시 후, 통화를 하러 나간 현과장이 회의실로 돌아왔다.
“비프 랜드에 야외상영 가능하대. 대신 본부장님 결재 필요하다고 한다.”
“그건 제가 정부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현과장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할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이대리. 이거 너무 기대하지마. 아마 통과되기 어려울거다.”
솔직한 현과장의 말. 그러나 한록은 놀라지 않았다. 아까 한록이 설득할 때
현과장의 표정을 봤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그럼 왜 반대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현과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해보고 싶어.”
한록과 함께 일하는 것은 늘 그랬다.
늘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늘 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평소의 현과장이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일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
‘이게 성공한다면, 대체 어떻게 될까?’
그 마음이 결국 모든 것을 이긴다.
“한번 전략을 짜보자.”
한록의 앞에 앉은 현과장이 조언을 시작했다.
“일단...정부장님은 절대 설득 안 될거야. 그분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는
분인거 알지.”
너무나 솔직한 현과장의 말. 그러나 한록도 반박할 수 없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밤바다에 대한 낭만이나, 애틋한 기억 같은게 있겠어? 평소에 바다
얘기하시는거 들어본 적 있어?”
“없습니다.”
“그럼 설득 안돼. 이대리가 키포인트로 잡은 낭만적인 부분들이 전혀 상상이
안 갈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본부장님은...생각보다 가능성 있어.”
현과장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본부장님 부산 분이시거든. 해운대인지는 모르겠는데, 바다 가까이 사셨다고
들었어.”
“분명 추억이 있으시겠네요.”
“그렇지. 정부장님은 몰라도 본부장님이랑은 좀 얘기해볼만하지.”
“그러면...”
“그래.”
현과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부장님 제끼고 가자.”
*
그날 오후.
현과장에게 보고를 받은 정부장이 한록을 불렀다.
“본부장님 의견이 필요하다고?”
현과장이 얘기했던 ‘전략’은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 GV 후보를 여러개 적어놔. 그리고 본부장님의 의견이 듣고 싶다고 해.’
정부장에게는 ‘삼일의 삶’으로 결정한게 아닌척 하고, 최경준에게 바로 얘기
를 하는 전략.
‘그래도 괜찮을까요? 정부장님을 뛰어넘고 보고를 하는건데.’
‘당연히 정부장님을 뛰어넘었다는 걸 티내면 안되지. 아마 본부장님이 이대리
의견을 궁금해하실거야. 그때 말씀드려.’
“내가 본부장님한테 연락드려보지.”
다행히 현과장의 말처럼, 정부장은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정부장이 다시 한록을 불렀다.
“본부장님이 보자신다. 다녀와.”
“네,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한록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정부장이
말했다.
“이한록.”
“예.”
“삼일의 삶은 안 된다. 알았지.”
현과장의 예상처럼, 많은 후보 중 삼일의 삶만을 거론하는 정부장.
“네, 알겠습니다.”
정부장을 향해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한록은 본부장실로 향했고, 비서가 문을 열어주었다.
“앉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GV 선정에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중요한 문제이다 보니 본부장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나는 자네 의견이 궁금하군. 어떤 영화로 진행하고 싶나?”
“저는...본부장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괜찮네. 편하게 말해보게.”
역시나 현과장의 예상대로.
연기는 충분했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한록이 최경준을 보고 말했다.
“삼일의 삶입니다.”
“삼일의 삶이라.”
한록의 앞에 마주앉은 최경준.그가 작게 웃다가 말했다.
“이한록. 욕심이 너무 많군. 그렇게 삼일의 삶이 좋은가?”
현과장이 했던것과 같은 말이다. 최경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본론부터 말하지. GV는 유명한 감독을 섭외하게.”
“본부장님.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필요없어.”
한록의 말을 자르는 최경준.
“이한록. 오차장이 영화제를 위해 얼마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아나?”
‘오차장도 널 이기기 위해 이를 갈고 있다.’
라는 뜻.
“예, 알고 있습니다.”
한록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영화제가 아마 한록과 오차장의 운명이 갈리는 곳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라.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한록을 바라보는 최경준.
“그래, 실패해도 상관없겠지.”
“본인은 초고속 승진을 했고, 이미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지. 프로젝트가 실
패한다면 아쉽기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해낸 것들이 더 많아. 한두개 실패한
다고 해서 커리어가 위협받지 않으니 본인이 하고싶은걸 시도할만 하지. 그런
데 말이야.”
“김유선도 그런가?”
최경준의 입에서 유선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GV 팀구성은 들었네. 계약직과 만년 과장이라. 더 물러설 곳이 없을 사람들
이야.”
한록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과장은 큰 용기를 내서 자신의 편이 되었
다. 유선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
“누군가 힘을 쓰면 회사를 나가야할 수도 있어.”
오차장의 타겟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어때, 이한록. 아직도 삼일의 삶을 할 마음이 드는가?”
최경준의 질문. 그리고.
“네. 변함 없습니다.”
한록의 대답.
“이 프로젝트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기 때문입니다.”
*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군.”
“아뇨, 지킬 수 있습니다.”
“이유는?”
이 GV가 성공할 수 있다는 데이터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한록은 현과장과의 말을 떠올렸다.
‘이대리. 본부장님을 어떻게 설득할거야?’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아냐. 그것보단 치사하게 가자.’
‘치사하게 가자’는 현과장의 말.
‘이건 어차피 데이터도, 자료도 없는 프로젝트잖아. 그런걸로는 설득이 안 될
거야. 본부장님이 반대하시는데 자료로 따지고 드는것도 마음에 안 드실거고.’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좀 감정적으로 접근해 봐. 이건 그 방식이 더 나을거 같다.’
한록의 설득이 논리로 남을 패배해게 만드는 방식이라면, 현과장은 다른 방식
을 사용했다.
타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 감정에 집중하는 것. 거기서 공감대를 끌어내
는 것.
‘윤감독님! 감독님들은 원래 다 긴장해요.’
한록은 윤감독을 달래던 현과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밤바다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어떠셨습니까?”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피식 미소를 짓는다. 누구 앞에서 바다에 대해 묻냐는
듯한 미소였다.
“당연히...”
“아름답지.”
‘됐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은 성공을 직감했다.
*
“본부장님. 삼일의 삶을 어떻게 진행하고자 하는지, 한 번만 말씀드려도 되겠
습니까?”
“어지간히 하고 싶나보군. 한번 말해보게.”
최경준의 허락. 하지만 진지하게 들어보겠단 태도는 아니었다. 그저 뭐라고
말하나 들어는 보자라는 태도.
의자에 기댄 최경준을 보며 한록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제가 삼일의 삶을 추천하는 이유는 단순히 제가 삼일의 삶을 좋아하거나 삼
일의삶이 좋은 영화라서가 아닙니다.”
“삼일의 삶이 부산영화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말
씀드린 겁니다.”
한록이 그린 부산영화제와 삼일의 삶.
그 모습이 최경준의 눈앞에 펼쳐진다.
“상영은 9시에 시작할 겁니다. 그때가 돼서야 해가 질테니까요.”
어두운 밤바다.
“그리고 야외 상영관에 입장하기 전 슬리퍼와 신발주머니를 나눠줄 생각입니
다. 슬리퍼로 갈아신은 관객들은 발 사이로 모래가 들어가는걸 느끼겠죠.”
백사장의 모래 감촉.
“가림막은 되도록 설치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바람이 많이 불겠지만 그게 오
히려 좋을 겁니다. 바다냄새가 날테니까요.”
시원한 바닷바람과 소금의 향기. 그리고-
“그리고 파도소리가 들리겠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와 뱃고동 소리.
한록의 말이 이어질수록 최경준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젊은 시절을 바다에서 보낸 최경준.
파도소리, 바다냄새, 발 사이로 흐르는 모래.
그 언젠가 자신이 걷던 밤바다.
“본부장님. 저도 본부장님처럼 밤바다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삼일의 삶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밤바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겠죠.”
밤바다를 찾아가게 만든 아름다운 기억.
“사람들이 밤바다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 한, 삼일의 삶은 절대 실패할 수 없
을 겁니다.”
한록이 말을 마치고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밤바다를 떠올리고 있을 최경준. 어렸을때부터 바다에서 살아왔을 최
경준.
그가 떠올리는 기억이 무엇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아름다운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오늘 한록과의 대화는 그 추억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이한록.”
한참 후,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최경준이 추억에 젖은 듯 쓸쓸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자넨 정말 못 당하겠군.”
작가의말
실제로 몇년 전까지 부산국제영화제에는 해운대 해수욕장에 야외 무대가
설치됐었습니다.
이대리님 말빨이 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