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장홍석 사장은 드디어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장님! 사장님?”
잘못 받아진 건가? 하는 마음에 전화를 끊으려는 그때, 수화기 너머로 장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민 대리.
“네, 사장님! 2시 다 되어가는데 어디쯤이세요?”
JC 병원에 데모하기로 한 약속 시각이 10분여도 채 남지 않아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장 사장에게 물었다.
그는 다급한 나보다 더 숨이 찬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 나 지금 사고가 났어. 좀 늦을 거 같은데, 시간 좀 벌 수 있지?
“예? 사고요?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괜찮으세요, 사장님?”
나는 장 사장의 사고 소식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데, 여기 상황을 정리해야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금방 처리하고 갈 테니까, 원장님 좀 잡아놔 줘.
“아니면 시간을 조금 미룰 수 있냐고 여쭤볼까요? 사장님 사고 나셔서 못 오시는 건데,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 이번에 데모 받는 메디컬 회사가 다섯 군데나 되니까, 아마 사정 안 봐주실 수도 있어. 내가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가볼게. 1시간만 부탁해, 민 대리. 딱 한 시간.
“네, 알겠습니다.”
나는 장 사장에게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전화기 너머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와 주변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있었기에 더 이상 통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장 사장과의 통화를 끝낸 후,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JC 병원과의 약속 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
나라도 시간에 늦기 전 도착해 데모 기구를 펼쳐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JC 병원으로 들어갔다.
JC 병원으로 들어가니 그동안 봐왔던 병원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왜 일반 병원이 아니라고 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의 분위기.
잘되는 병원들은 입구부터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렇기에 늘 정신없는 느낌이 가득하다.
하지만 JC 병원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병원이다 보니 입구부터 환자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밝은 톤으로 안정된 인테리어, 그리고 간호사들만이 자리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안을 살피자 나에게 다가오는 간호사.
그녀는 여느 병원의 간호사보다 밝은 미소와 친절함을 가지고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광주 메디컬에서 오셨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차트를 확인한 뒤, 내가 어디에서 온 직원인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네. 광주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예. 2시에 원장님과 약속 잡혀 있으시네요. 저 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앞으로 걸어가며 안내했다.
간호사를 따라 들어간 곳은 그 병원의 회의실이었다. 그곳에는 길고 큰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책상을 둘러 의자가 열댓 개쯤 놓여 있었다.
“데모 준비는 바로 가능하실까요?”
그녀는 나에게 물었고, 나는 그녀에게 원장님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준비는 금방 되는데, 혹시 원장님은 바로 오시는 걸까요?”
“원장님은 오늘 진료 없으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준비되시는 대로 들어오실 겁니다.”
한 시간가량 시간을 벌어야 하는 나는 이미 원장이 데모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셨어요?”
그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누군가.
나와 간호사는 고개를 돌려 문이 열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 원장님. 벌써 오셨어요? 방금 들어오셔서 준비 중이세요.”
간호사는 양손을 모으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바로 JC 병원의 원장.
그 의사 가운 앞에 자수로 박혀 있는 글자.
‘임재석 원장.’
임재석 원장은 170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날씬한 체형이었다.
오늘 진료가 없다는 그는 사복에 의사 가운을 막 걸치고 온 듯 보였다.
반 테 안경을 끼고,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임 원장.
나는 JC 병원의 임 원장이 돈을 많이 벌기에 겉으로 보아도 부티가 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다.
그가 찬 시계를 살짝 보아도 비싼 명품 같지는 않았다.
옷과 신발 그리고 주차장에서도 JC 병원 담당 구역에 주차되어 있던 차 중 외제 차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그가 검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광주 메디컬의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이 병원의 원장임을 안 순간,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허리를 들자마자 바로 명함을 꺼내 임 원장에게 건넸다.
“반가워요. 임재석입니다.”
그는 내가 건넨 명함을 받아 곧바로 자신의 수첩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
“김 간호사,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 나가서 일 봐요.”
“네, 원장님.”
그녀가 떠난 후 회의실에 남은 나와 임 원장.
그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 사장은 아직인가요?”
나는 그에게 애써 둘러댈 필요 없이 사실을 고했다.
“출발하다가 근처에서 접촉 사고가 나는 바람에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임 원장의 인상은 선해 보였고, 그의 표정을 보아 그는 우리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 듯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곧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아……. 그럼 얼마나 걸리는 거죠?”
차마 한 시간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나는 어떻게 다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무려 한 시간가량을 기다려달라고 한다는 것은 친한 원장이라고 해도 너무 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걸린다고는 했는데,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오실 것 같습니다. 원장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시간이 벌써 2시인데요. 우선 저 통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임 원장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나는 그의 태도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휴대전화를 가지고 자리를 벗어났고, 나는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임 원장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장 사장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데모 기구를 펼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데모는 장 사장이, 그리고 나는 그 옆에서 보조 역할을 하기로 했다.
임 원장 같은 큰 병원의 원장이라면 내가 데모를 한다는 것은 짬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임 원장이 애초에 맡긴 것은 내가 아닌 장 사장이었기에.
평소에 교류가 있던 병원이라면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난생처음 보는 병원의 원장이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 영업직원의 능력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다르다.
영업을 하기 위해 왔을 때 나눌 수 있는 대화와 지금과 같이 데모 약속을 잡고 오는 것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사적인 대화를 하려는 걸 툭 잘라버리는 임 원장의 태도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대화를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데모할 기구를 모두 정리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고, 머지않아 임 원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묻는 임 원장.
“장 사장은 아직 멀었대요?”
“그쪽 상황이 정리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은요, 뭐. 사고가 났다는데 별수 있나.”
말로는 이해하는 듯 답했지만, 얼굴은 그렇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 원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이 허비되는 것을 보며 못마땅해하는 모양.
그와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고 나는 몇 차례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한마디 이상을 넘기지 않았다.
나는 데모 기구와 임 원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고, 그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나 오래는 못 기다려요. 다음 메디컬 회사랑 또 선약이 잡혀 있어서요. 지금 전화 한 번 더 해볼래요?”
그는 내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장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 민 대리.
장 사장 주변은 여전히 시끌시끌한 거로 보아 아직 사고 난 곳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사장님, 혹시 언제쯤 오실까요?”
- 나 한 시간만!
“아… 임 원장님께서도 다음 일정이 있으셔서 오래 기다려 주시기가…….”
- 아! 그쪽으로 차가 들어오니까 그런 거잖아요! 아, 민 대리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한 시간만 버티고 있어 봐. 금방 갈게.
“사장님!”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고, 임 원장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장 사장은 몇십 분 전에도 전화할 때,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버텨달라는 시간은 여전히 한 시간.
“뭐래요? 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아…….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지금 벌써 약속한 시각 15분 넘게 흘렀는데, 더요?”
“죄송합니다. 금방 정리하시고…….”
“나도 바쁜 사람이라, 이렇게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다음에 또다시 기회가 되면 데모 요청할게요.”
임 원장의 표정이 굳어진 걸 넘어 정색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지금 내가 데모를 하지 않으면, 우리 광주 메디컬은 JC 병원 그 다섯 개의 후보에서 떨어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거기까지 생각에 미친 나는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저… 임 원장님.”
그는 내 부름에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입으로만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제가 데모해도 괜찮을까요?”
내가 오자마자 데모를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장 사장 때문이었다.
JC 병원 임 원장은 장 사장을 보고 우리 광주 메디컬에 데모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저 서포트를 위해… 아니, 교육을 위해 데려온 셈.
그런데 내가 여기서 데모를 해버린다면 장 사장에게도 그리고 임 원장에게도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지금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우리에게 또다시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차선책으로 내가 데모를 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임 원장은 내 말에 그제야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 고개를 빼꼼 들고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분명히 들었음에도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듯 재차 묻는 임 원장.
“데모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못 보여드리고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데모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중하게 부탁했고, 그는 입술을 꾹 닫은 채 코로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 내는 사람처럼 말이다.
임 원장은 양팔을 꼬아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며 내게 답했다.
“장 사장한테……. 아니, 한번 해봐요.”
그의 눈빛과 말투는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이 뚝뚝 묻어났다.
하지만 별수 있겠는가, 방법은 이것 하나뿐인 것을.
나는 제자리에 서서 허리를 반으로 접어 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데모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등을 의자에 붙인 채로 기대어 있었고, 나는 책상 옆에 서서 데모를 시작했다.
우리가 준비해 온 수술 기구는 총 두 가지.
하지만 현재로서는 두 가지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나는 과감하게 하나의 기구를 밀어둔 채, 나머지 기구를 앞으로 당겨왔다.
“이 기구의 스템 사이즈는…….”
30분을 꽉 채운 기구 설명.
중간중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임 원장의 태도에서 나는 조급함을 느끼고 설명을 최대한 간소화했다.
하지만 설명이 뒤로 갈수록 그는 집중력을 발휘해 눈에 힘을 주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해서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그는 내 말에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구 설명의 굳히기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수술의 금액과 회복에…….”
임 원장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을 내밀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데모가 끝난 후 그의 첫마디.
궁금한 게 있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관심이 없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나는 그가 질문을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내가 골반 기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오늘 두 가지 기구를 가져왔잖아요.”
“예, 맞습니다.”
“근데 그 두 가지 중에 방금 데모했던 기구만 보여줬는데, 그걸 선택한 뭐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그의 질문에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내가 그동안 준비해 왔던 과정의 결실을 볼 대답.
“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