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임재석 원장은 나를 본 채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이야기해 봐요. 그 특별한 이유가 뭐죠?”
데모 준비를 한참 하던 때, 나는 장홍석 사장에게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JC 병원에 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장 사장과 손 차장은 대체 그게 왜 궁금하냐며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하지만 장 사장은 내가 묻는 말에 그 환자의 이름을 알려주었었다.
내가 물어본 이유는 단순히 어떤 왕자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한국까지 와서 수술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VIP 수술을 받는데, 내가 그에게 쓸 수술 기구를 고를 때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 와서 수술을 하는 데에는 조금이라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지.
그 왕자의 이름으로 열심히 조사하다 보니, 예전에 이미 임 원장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던 환자였다.
돈이 많고 이름이 알려진 왕자였기에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때 사우디 왕자가 임 원장에게 수술을 받았던 부위는 다리.
‘femur’, 즉 대퇴골 수술이었다.
그 당시에는 작은 plate 수술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femur와 이어지는 골반 수술. 그래서 나는 골반과 이어지는 femur 수술을 이미 받았던 환자에게 맞는 기구를 조사했다.
장 사장이 골라온 기구 하나와 내가 고른 골반 수술 기구 하나.
이렇게 총 두 가지의 기구를 최종 결정해 JC 병원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은 한 가지 기구를 데모하기에도 촉박했고, 나는 장 사장의 기구가 아닌 내가 선택한 기구를 임 원장에게 소개했다.
장 사장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 있게 데모하기에는 내가 준비한 기구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 사장이 데모를 하지 않는 순간, 이미 광주 메디컬에는 기회가 날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라면 내가 준비해 온 것을 후회 없이 모두 보여줘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내가 선택한 기구로 데모한 것.
“이 기구가 이번에 수술받으실 분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한 거죠?”
“사실 이번에 오시는 환자분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몇 년 전 원장님께서 직접 femur 수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미 수술을 한번 한 이력이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기구를 찾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고, 임 원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임 원장을 바라보며 나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이미 plate를 한번 댔던 환자, 즉 femur 뼈가 이미 약해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환자에게는 제가 가져온 기구가 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roximal femur plate가…….”
나는 그동안 사무실에서 데모 준비를 하며 알아낸 정보와 내 지식을 모두 입 밖으로 쏟아냈다.
임 원장의 얼굴을 살필 새도 없이 나는 기구에 집중해 데모 시간만큼이나 이야기를 이어 갔고, 그는 데모 때와는 달리 손목시계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나고, 나는 드디어 고개를 돌려 임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아랫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놈 봐라? 째깐한 놈이 준비를 많이 했네? 환자 상태 보고 기구 가지고 온 메디컬은 또 처음이네.]
임 원장의 속마음이 그 내밀고 있던 아랫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속마음을 듣지 않았어도 그가 내게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임 원장은 데모를 시작하기도 전에 내내 끼고 있던 팔짱과 의자에 딱 기대어 있던 등허리. 그 자세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새 자세를 고쳐 앉아 등을 의자에서 최대한 멀리 떼어내 오히려 책상 쪽, 그러니까 내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더불어 양팔로 끼고 있던 팔짱은 풀어낸 지 오래.
내 준비성과 정보력이 그의 차갑던 마음을 녹여낸 것이다.
대부분 데모할 때에는 환자의 상태를 잘 알아보지 않는 편이다.
아니, 거의 알아 오는 일이 없지.
보통 병원에서 데모를 할 때는 병원에서 요청한 기구를 가져와 사용 방법과 장점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번 JC 병원에서 요청한 건은 달랐다.
특정 환자가 정해져 있었고, 더불어 JC 병원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특이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JC 병원, 그리고 VIP 환자에게 수술할 용도이기에 기구는 최고급이어야 했다.
돈은 상관없이, 이번 데모에 참여하는 모든 메디컬은 기구의 금액, 장점들에만 집중했을 터.
나는 그들과는 하나라도 달라야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환자의 상태가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
나머지는 어느 메디컬 회사나 비슷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은 나의 선택이 먹힌 것이다.
임 원장의 마음은 나에게 열렸지만,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인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잘 들었어요. 우선은 내가… 어?”
그는 내게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울리는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내가 오늘은 늦어서 이만 가고, 다른 메디컬들도 다 비교해 본 뒤에 장 사장한테 연락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정리하고 나가요. 나 늦어서 먼저 나갑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나는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임 원장.
그는 문밖으로 나가다 닫히려는 문을 순간 붙잡았다.
“아, 저기!”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기구를 정리하려다 말고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예, 원장님.”
“오늘 고생했어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확 닫은 채 자리를 떠났다.
한 시간가량 그와 있으면서 듣는 첫 따뜻한 한마디.
날아갈 것만 같던 JC 병원과의 계약 기회는 ‘고생했어요.’ 이 한마디로 내가 그 끝을 겨우 붙잡은 듯했다.
완전히 사라져버릴 기회를 붙잡았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임 원장이 떠난 회의실. 텅 빈 공간에 남아 나는 천천히 기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JC 병원에 오늘 진료는 없었고, 고요한 분위기 속 들리는 소리는 기구가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그때, 회의실 밖에서 들려오는 또 하나의 소리.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타닥타닥.
달려오다시피 들리는 발걸음은 더욱더 크게 내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고, 이내 회의실 문 앞에서 그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일 초의 정적.
곧바로 문이 열렸고, 그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장홍석 사장.
허리를 숙이고 짐을 싸던 나는 그를 보자마자 허리를 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장 사장은 나를 0.1초 동안만 바라본 후 곧바로 고개를 돌려 회의실 안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어? 사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는 장 사장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상태를 빠르게 살핀 후 소리쳤고, 그는 또 다른 의미로 내게 소리쳤다.
“뭐야? 원장님은?”
그가 급하게 달려와 찾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임 원장.
장 사장은 차 접촉 사고 마무리를 짓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것 같았다.
바로 데모 때문이겠지.
하지만 임 원장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사장님. 그게 임 원장님께서 다음 메디컬 데모 때문에 먼저 자리를…….”
“하. 민 대리, 내가 한 시간이면 된다고 했잖아. 그거 한 시간만 좀 붙잡아 달라고…….”
“예. 그래서 말씀드리고 제가 데모를…….”
장 사장은 매우 흥분된 상태로 보였다.
우리 직업이 차 운전을 매일 하는 직업이지만, 차 사고는 매일 나지 않는다.
사고가 난 후 정신이 없었을 텐데, 급하게 마무리를 하고 병원에 달려온 장 사장.
내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내 말을 자르고 소리쳤다.
“아니, 민 대리. 내가 오래도 아니었잖아. 사고가 났으니까 한 시간만 좀 어떻게든 붙잡아 달라는 거였는데. 그걸 왜……! 하…….”
“사장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나는 양 손바닥을 내밀어 그를 진정시켰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눈까지 충혈되어 있었고, 심신이 지쳐있는 듯 보였다.
장 사장은 내 말에 가쁜 숨을 몰아 내쉰 후 말했다.
“어. 말해 봐.”
“원장님께서 다음 스케줄 때문에 가셔야 한다고, 저희 기회가 사라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데모 진행했습니다. 말씀 못 드리고 제가 데모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며, 숨을 급하게 쉬었다 마시기를 반복했다.
“알겠어. 우선 지훈이 네가 데모했다는 거잖아. 내가 원장님이랑 통화해 볼게. 고생했다.”
“예. 그럼 얼른 기구 정리하겠습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뒤를 돌아 다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장홍석 사장은 빠른 걸음으로 JC 병원 앞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어디론가 전화를 연신 걸고 있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 모양.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 불이 붙고, 그는 그 담배를 크게 한 모금 빨아 마셨다.
연초에 불이 온전히 붙어 그의 숨에 타들어 가고 있었고, 그때 그의 휴대전화에서 전화벨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뒤, 방금 물었던 담배를 급하게 꺼내 밟아 꺼트렸다.
“여보세요? 원장님! 저 장홍석입니다.”
- 어. 장 사장, 전화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상대는 다름 아닌 JC 병원의 임재석 원장.
“오늘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접촉 사고가 나는 바람에……. 급하게 마무리하고 왔는데, 이미 다음 스케줄 가셨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니야. 나도 다른 날이면 기다렸을 텐데, 오늘은 다른 메디컬에서도 데모가 잡혀 있어서. 광주 메디컬만 기다려줄 수는 없잖아.
“예, 맞습니다. 혹시 일정 언제 끝나십니까? 끝나고 시간 되시면 제가 지금 여기서 기다렸다가 데모했으면 하는데 일정 가능하실까요?”
- 데모?
“네. 기구 준비해 왔는데, 그래도 보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이 안 되시면 가능한 날짜 말씀해 주시면 제가 일정 원장님께 바로 맞추도록…….”
- 데모 받았어.
“예?”
- 데모 받았다고.
“아……. 저희 직원이 아까. 네,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직원은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 제가 다시…….”
- 아니. 그 친구한테 정확히 다 들었어. 이름이 민지훈이던가?
“네, 맞습니다. 민지훈.”
- 그 친구 잘 키웠더라, 장 사장.
장 사장은 임 원장이 한 의외의 대답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 과장인가? 나이도 어려 보이던데, 놀랐어.
“아, 민지훈 대리입니다.”
- 뭐? 대리야? 그렇게 일을 잘하는데, 아직도 대리면 어떻게 해. 그런 스타일의 친구들은 오히려 직책을 어서 올려줘서 책임감을 더 주는 게 좋지. 직책이 올라갔다고 거만해질 만한 스타일은 아닌 듯 보이더라.
“하하. 그렇습니까? 저희 직원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 우리 VIP 환자 입국 날이 당겨졌거든. 이번 주 안으로 수술해야 할 것 같은데, 기구는 문제없이 준비될 수 있나?
임 원장의 질문에 장 사장은 휴대전화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허공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소리 없는 환호.
입술을 꾹 다문 채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예, 그럼요. 당장 내일이라고 해도 기구 준비 가능합니다!”
- 그래. 내가 더 비교는 해보겠지만, 일정은 우선 알았어. 내가 다시 연락할게. 나 들어가야 해서 이만 끊겠네.
“네, 원장님.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장 사장은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통화가 끊기자마자 참았던 소리를 입 밖으로 질러냈다.
“하! 민지훈, 이 기특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