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상일 차장 앞에 앉은 박 원장이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가 WG 메디컬의 민 대리와 해온 세월이 있는데, 가을 메디컬로 갈아타려면 단가가 동일해서는 안 되지.”
그의 말에 이 차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 원장님. 제가 신생 회사이다 보니 WG 메디컬 보다 더 낮추게 되면 정말 원가도 안 나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수진아! 뭐 해?”
그녀의 심각한 표정과 다른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진 몸.
박 주임을 본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를 보며 외쳤다.
그녀는 이상일 차장이 자신의 이름을 들을세라 검지를 펴 자신의 입과 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잠시만.”
그녀의 말에 친구 두 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착석했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이상일 차장 테이블의 목소리.
“그럼 내가 아까 연락했던 물건은? 거기 제조사 제품은 받을 수 있는 거야?”
“그게… 그 제품은 광주 총판이 WG 메디컬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제품은 제가 구할 수가 없어서……. 대신에 다른 제조사 제품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차장의 말에 박 원장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긴 정적이 흐른 후, 박 원장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 차장. 아니, 이 사장.”
“네, 원장님.”
“자네가 나와 친분이 있었으니 솔직히 이야기할게. 그게 더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네.”
“예.”
“힘들다고 이렇게 찾아와서 사정하길래, 내가 도움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아서 많이 고민했어.”
이 차장은 그의 진지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자네도 생각해 봐. 단가도 내가 이야기하니까 이제야 민 대리랑 똑같이 맞춰준다고 하지. 물건도 내가 원하는 제조사 품목도 못 맞춰주지.”
“그건…….”
“내가 자네와 어떻게 일을 하겠나.”
이 차장은 박 원장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 대리한테 내가 가을 메디컬로 옮기게 됐다는 제대로 된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걸 떠나서 내가 이 사장네 메디컬에서 물건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못 찾겠어.”
앞에 앉은 이 차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 회사 막 차렸다고 하니까, 내가 조언 하나 해주자면. 앞으로 어디를 가든, 어느 원장님을 만나든 가을 메디컬만의 강점을 가지고 가. 나는 지금으로써는 못 찾겠거든. 그 강점을.”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주임은 그들의 퇴장에 이 차장과 눈이 마주칠 새라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후에야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몸에 카페인을 수혈하기 위해 탕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탕비실에 들어와 문을 닫으려는데 나를 바로 따라온 그녀. 박수진 주임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대리님!”
나는 닫히려는 문을 열어 그녀가 들어오게 문을 잡고 있었다.
“박 주임님. 커피 드시려고요?”
“네.”
나는 그녀의 말에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려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요. 이거 드세요.”
그녀는 내가 건넨 커피를 양손으로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민 대리님.”
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대답한 뒤 내가 마실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할 말이 있는지 탕비실을 나가지 않고, 안을 서성거렸다. 커피 머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를 곁눈질로 살피는 그녀.
나는 고개를 돌려 박 주임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아녜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그녀.
아무래도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박 주임을 바라보았다.
[민 대리님한테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그래도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아, 하지 말까?]
무슨 이야기이길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박 주임님.”
“네, 대리님.”
“저한테 할 말 있으시죠?”
“아니. 그게…….”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내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열려있는 탕비실 문으로 향했다.
문을 꽉 닫아내고 뒤를 돌아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이야기하셔도 돼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를 들고 탕비실 벽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넵.”
나는 커피를 챙겨 그녀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리님. 사실 제가 어제 카페를 갔다가 이상일 차장님을 만났어요.”
“이 차장님이요?”
나는 뜬금없는 인물 소환에 눈썹을 들썩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 박 원장이라고 하는 분이랑 있으시더라고요. 어디 병원인지까지는 못 들었는데, 의사 선생님인 건 확실해요.”
그녀가 말하는 박 원장이라는 사람.
내 예상이 맞는다면 모던 정형외과의 박승호 원장일 것이다.
“네. 대충 어떤 원장님인지는 알 것 같네요.”
“근데 민 대리님 이야기가 오가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옆 테이블이라 이야기를 듣게 됐거든요.”
“제 이야기요? 혹시 뭐라고 하시던가요?”
“근데 대리님. 이 차장님 메디컬 안 한다고 하시더니, 회사 차리셨어요?”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가을 메디컬 맞아요?”
“네.”
“어쩐지. 그럼 그 말이 그거였구나!”
그녀는 내 말에 박수를 한 번 세게 치더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녀가 어제 듣고 온 이야기가 내 대답으로 인해 해결된 모양.
“이 차장님이 가을 메디컬 사장님이라 그런 거였구나.”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무튼. 이 차장님이 민 대리님이랑 같은 병원에 지금 영업하고 있으신가 봐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박 원장이라는 분이 민 대리님이랑 하려고, 이 차장님 거절했어요!”
“정말요?”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크게 떠냈다.
물론 내가 직접 듣고 본 장면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들은 것만으로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신난 아이처럼 이야기를 풀어냈다.
“뭐라고 했었냐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그녀는 어제 카페에서 들었던 그들의 대화를 열정적으로 나에게 쏟아부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박 원장과 이 차장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녀 덕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온전히 다 들은 후에야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녀가 들려준 대화의 결론은 내가 이긴 싸움이라는 것.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고 기쁨이 배로 느껴졌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아직 이 소식이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승호 원장이 모던 정형외과로 부임을 온 뒤, 가을 메디컬과 나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던 건 사실이다.
나와 오래 일을 한 박승호 원장이 얼마나 대단한 거래처이기에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 수많은 고민을 했었다.
물론 다른 메디컬과 비교를 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유명하거나 큰 회사가 아닌 신생 회사와 고민을 한다는 사실에 어떤 회사일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한태준을 통해 들은 사실, 가을 메디컬의 사장이 이상일 차장이라는 것. 그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았었다.
대체 이상일 차장과 박 원장은 무슨 관계이기에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 걸까. 둘의 관계가 깊다면 내가 과연 이 사이를 파고들어 영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렇기에 둘의 관계를 알아내야 했었던 와중에 박수진 주임 덕에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관계가 깊은 관계가 아닌, 단순히 전 담당 메디컬 회사였다는 것을.
둘의 관계가 비즈니스로, 심지어 예전 비즈니스 관계였다면 지금은 매우 얕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승산이 있었다. 내가 노력해 성공해 낼 수 있다는 것.
승리의 여신은 나에게 왔구나, 라는 생각에 환희를 불렀다. 주먹을 불끈 쥐고 광대가 올라가도록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기세를 몰아 내가 박 원장에게 입지를 굳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다가온 승리의 여신이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 둬야 했기에, 나는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앞에 앉은 박 주임과 눈을 맞췄다.
“박 주임님. 고마워요.”
“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임님 덕분에 잘 해결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저는 그냥 어제 들은 일 말씀드린 것뿐인데.”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고민하던 이야기. 나한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꼭 보답할게요.”
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박 주임은 나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양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럼… 다음에 꼭 밥 사주세요.”
그녀는 내가 아닌 앞에 놓인 커피잔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럴게요. 드시고 싶은 거 생각해 두세요.”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한 뒤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 * *
박수진 주임과 이야기를 나눈 뒤, 서둘러 서류 작업을 마쳤다.
작업한 서류를 출력해 급히 모던 정형외과로 향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박승호 원장의 마음이 혹여나 바뀌기 전에.
* * *
똑똑.
“원장님. 저 왔습니다.”
나는 박승호 원장 진료실로 들어갔다.
“민 대리. 무슨 일이야?”
사전에 약속이나 연락을 하지 않고 왔기에, 그는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 제가 일이 있어야 오나요. 원장님 뵈러 왔죠. 하하.”
그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럼. 시간이 벌써 몇 신데.”
박 원장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때.
큰 노크 소리가 진료실을 가득 메웠다.
똑똑똑.
박 원장은 노크 소리에 대답하기 전,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
그는 문밖에 누가 찾아왔는지 알고 있는 듯했고, 그 인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열리는 문.
“원장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오는 사람.
바로 이상일 차장이었다.
이제는 가을 메디컬의 이상일 사장이 된 그.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 박 원장에게 인사를 하는 동시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의 눈에는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민 대리가 여기 왜…….”
나는 그에게 눈썹을 들썩이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입을 여는 박승호 원장.
“아까 내가 오늘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들의 대화. 단 한 번의 주고받는 말로도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대폰을 보며 탄식하던 박 원장.
이 차장이 미리 방문하겠다고 박 원장에게 연락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던 모양.
나는 박 원장과 약속을 잡지 않고 방문했지만, 이 차장의 눈에는 나와의 만남 때문에 자신의 약속 제안을 거절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 앞에 손님 있잖아.”
박 원장의 단호한 목소리와 말투에 나 역시 흠칫 놀랐다.
평소의 모습에서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인 이 차장은 꽤 놀랐는지 어깨를 움츠리고 대답했다.
“아! 네.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바로 뒷걸음질로 문을 닫고 진료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