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확실해?”
나는 생각에 잠겼던 터라, 미간에 힘을 잔뜩 준 채로 한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
그는 내 단호한 말투에 살짝 당황했는지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급하게 미간을 풀어냈다.
“메디컬 이름 말이야. 가을 메디컬이 확실하냐고.”
그는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연속으로 끄덕였다.
“예. 백 퍼센트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던 회사인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는 내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근데 아직 직원도 아무도 없고, 거래처 병원도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어요.”
거래처가 한 군데도 없다?
신생 회사에서 거래처가 아직 없다는 말은 당연히 맞는 말이다.
회사를 이제 막 차렸기에 거래처는 그 후에 뚫어야 하는 게 정석이지.
물론 그것이 일반 회사일 경우에 해당한다는 게 문제일 뿐.
메디컬 회사에서는 대부분 신생 회사가 거래처 없이 시작한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특히나 광주 지역에서 경력을 가지고 나와, 타지가 아닌 광주에 그대로 회사를 차린다면?
더더욱 드문 일이지.
어느 직종의 영업직이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특히나 병원과 일하는 메디컬 업계는 인맥 영업이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에서 인맥이라는 말은 학연, 지연과 같은 공통된 분모를 말하는 인맥이 아닌, 메디컬 일을 하며 알게 된, 그리고 거래를 하고 있는 병원의 의사, 그리고 그 지인 의사들의 인맥을 말한다.
그래서 경력을 가지고 퇴사를 할 때는 기존의 거래처를 그대로 들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 병원 하나를 토대로 지인 병원, 지인 의사를 영업해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
이상일 차장 같은 경우에는 하나의 거래처도 없이 회사를 차렸다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정 ‘맨땅에 헤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다른 메디컬들과 일하고 있는 병원이 무엇을 믿고 신생 회사에게 일을 맡기겠는가.
그래서 회사를 차릴 때 가지고 나오는 병원 선점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나 이상일 차장은 이 좁디좁은 광주 메디컬 업계에 소문이 안 좋게 나 있다.
이유는 복 메디컬에서 좋지 않은 소문으로 퇴사를 했던 일, 그리고 이번 우리 WG 메디컬에서 퇴사를 했던 일 때문이다.
WG 메디컬에서는 불미스러운 일로 권고사직을 당했었다.
“근데 배짱도 좋다. 어떻게 회사를 차렸지?”
“그러게요. 그래서 저한테 스카우트 제의할 때 제가 물어봤거든요.”
“뭘?”
“제가 가을 메디컬로 가게 되면 어떤 병원들과 일하게 되는 지를요.”
“그랬더니 뭐래.”
“큰 거래처 작업 중이니, 들으면 놀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하기 나름이라고…….”
한태준이 하기 나름이라.
그도 그 말을 썩 잘 이해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회사라는 곳이 직원이 하기 나름인 곳은 맞지만, 내게는 조금 다른 해석으로 들려왔다.
어떤 거래처와 일을 할 것이냐는데, 네가 하기 나름이라는 말.
이제 담당 거래처가 여러 병원 생기기 시작한 한태준.
그에게 그 담당 거래처들 중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병원이 네 담당 병원이다, 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래서 이상일 차장은 한태준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것이다.
광주에서 구할 수 있는 직원은 많다.
퇴사 후 취업 준비를 하는 메디컬 경력 직원도 많았을 텐데, 그런 직원을 뽑지 않고 굳이 연봉을 크게 인상까지 시켜주며 한태준을 데려가려는 이유.
취업 준비생은 경력이 어느 정도로 풍부할지는 몰라도, 가지고 올 거래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 당연히 가지고 있는 거래처 병원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한태준은 경력이 오래된 직원들에 비해 경력이 조금 적을지라도, 그들과 다른 이유가 분명 존재했다.
이상일 차장이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 한태준을 자신의 후임으로 두었기에 어떤 병원을 담당하고 있는지도, 그의 실력도 자신의 눈으로 봐왔기에 더더욱 한태준을 탐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는 그 누구도 모르는 거지만, 예측하건대 한태준은 이상일 차장의 회사로 갔다간 소위 말해 빨대가 꽂힐 것 같았다.
단물만 쏙 빼먹고 버려질, 거래처만 빼가 버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차 싶어 한태준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큰 거래처가 어딘지 대충 알겠네.”
나는 한태준을 바라보며 눈을 작게 뜨고 중얼거렸다.
내가 예상하는 그 큰 거래처.
바로 모던 정형외과이다.
모던 정형외과의 박승호 원장. 그리고 이상일 차장이 WG 메디컬에서 퇴사하기 전까지 담당하고 있던 병원이 바로 모던 정형외과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한 가지.
모던 정형외과는 이상일 차장의 전 거래처였지만, 박승호 원장과의 관계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박승호 원장은 바로 며칠 전 모던 정형외과로 왔기에 어떻게 둘이 아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 둘의 관계가 어떤 인연일지가 가장 나에게는 중요한 관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미 내 거래처로 굳어진 모던 정형외과를 그에게 내줄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차장에게 자신이 외쳐둔 큰 병원인 모던 정형외과에 대한 성공에 기대를 꺾어 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태준은 내 중얼거리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 나에게 물었다.
“대리님이 어떻게 아세요? 어디 병원이에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비밀.”
“대리님, 저도 알려주세요.”
“다음에. 그건 그렇고 내 생각보다 아직 미래가 많이 불투명한 회사였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봉 인상에 흔들려서 미래가 눈앞에 잘 그려지지 않았었는데, 대리님과 이야기해 보니까 그러네요.”
“그래. 뭐든지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으면서 다시 생각해 봐.”
“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내려가자.”
* * *
박수진 주임은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급히 수정 화장을 했다.
퇴근 후 약속이 있는 모양.
사무실 주변을 살펴본 후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박 주임 조심히 들어가요.”
박 주임은 서둘러 문을 열고 회사를 벗어났다.
“벌써 왔어?”
커피를 마시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다가가는 박 주임.
그녀는 친구들과 안부 인사를 나눈 후 한참 수다를 떨었다.
“수진아, 너 그 회사에 좋아하는 대리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돼가?”
“그래. 고백은 했고?”
그녀의 옆자리와 맞은 편에 앉은 친구들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야. 아직 고백 안 했어?”
박 주임의 한숨에 맞은 편에 앉은 친구가 물었다.
“몰라.”
박 주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 사람 벌써 여자 생겼어?”
“아니. 여자보다 더한 사랑에 빠지신 것 같다.”
그녀들은 박 주임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설마… 남자 좋아하는 거야?”
편견 없는 그녀들의 대답에 박 주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다른 거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다른 거? 뭔데?”
박 주임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일. 일이랑 사랑에 빠지셨어.”
“일? 그런 사람이 있다고?”
“어.”
“에이. 이미 여자 있는데, 수진이 너한테 핑계 대는 거 아니야?”
“그래. 여자친구 있는데 네가 모르는 거 아니고?”
그녀들은 박 주임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나무라듯 물었다. 그러자 박 주임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야. 진짜 없어. 정말 일밖에 모른다니까?”
“와, 그런 사람이 진짜 있구나.”
놀란 그녀들을 뒤로하고 박 주임은 민 대리 생각에 잠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그 일에 열중한 모습이 멋있긴 해. 그래서 내가 좋아하기 시작했던 거고.”
그녀들은 이내 박 주임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일에 집중한 남자가 멋있긴 하지.”
박 주임과 나란히 앉은 친구가 그녀의 어깨를 연신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고 말했다.
“맞다! 너희 회사, 정장 입고 일한다며? 흰 셔츠에 소매 걷고 머리카락 탁! 넘기면. 섹시해 보이기는 하겠다.”
박 주임은 그녀의 묘사에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리고 우리 대리님. 얼굴 진짜 잘생겼거든. 하하.”
“얘 진짜 빠졌네.”
“그러게. 수진아 열심히 꼬셔 봐. 네가 이렇게 남자 짝사랑하는 건 또 처음 본다.”
“내가 그랬나?”
그녀들은 박 주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너 고등학교 때 이후로 짝사랑하는 건 처음인걸?”
“그랬나?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회사 사람이 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박 주임은 대답을 하고는 앞에 놓인 커피를 마치 쓴 술처럼 한 모금 털어 마셔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 30분가량 대화 후 박 주임을 제외한 친구 두 명은 화장실로 향했다.
자리에 혼자 남은 박수진 주임.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소리.
“WG 메디컬이랑 일하고 있잖아.”
그녀는 자신의 회사 이름이 언급되자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친구들과 민지훈 대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기에 회사 사람이 이 카페에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카페 사람들을 보았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던 그때, 낯이 익은 옆모습과 목소리.
“WG 메디컬에 민지훈 말씀하시는 거죠?”
그 낯익은 사람이 내뱉는 말.
회사 이름과 그리고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민지훈’이라는 말. 그리고 그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
“아. 이상일 차장님이잖아?”
그녀는 홀로 조용히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리고 이 차장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일 차장님, 메디컬 이제 안 한다고 하시더니 다시 시작하려는 건가?’
그녀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채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으나 회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라면 들어야 했고, 또 민 대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에 자신이 꼭 들어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을 이상일 차장의 테이블 쪽으로 기울여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경청했다.
그러자 들리는 그들의 대화.
“내가 민 대리랑 오랫동안 일했던 거 자네도 알잖아.”
이 차장 앞에 앉은 인물이 그에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상일 차장은 뒷모습이 보였고,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까지 선명히 보였다.
“지훈이는 거래처도 많고…….”
“그리고 WG 다닐 때 민 대리랑 같이 일했었잖아. 둘이 친해?”
“그럼요. 지훈이가 저를 엄청나게 따랐거든요.”
그녀는 민 대리와 이 차장의 관계를 알았기에 이 차장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럼 더더욱 곤란하지. 돌려 말하지 않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
“사실 민 대리가 이번에 견적서를 가져왔는데, 가을 메디컬이랑은 단가가 비교도 안 돼. 진짜 업계 최저가로 뽑아 왔더라.”
“박 원장님. 거기 단가를 제가 아는데, 제가 더 싸게 넣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번에 민 대리가 힘을 썼는지 엄청 낮게 책정해 왔어.”
“…그럼 알려주시면, 제가 그 금액과 동일하게 맞춰보겠습니다.”
박 주임은 대화를 엿듣고 그들의 관계를 금세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이상일 차장이 박 원장이라는 인물에게 영업 중이라는 것. 동시에 민 대리도 박 원장에게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