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상일 차장이 나간 후 적막해진 진료실.
“근데 민 대리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용건 말이야.”
박승호 원장은 아직 풀어지지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준비해 온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지난번에 드렸던 견적서랑 카탈로그 외에 다른 추천 제품들로 선별해서 더 가져와 봤습니다. 확인해 보시고 더 필요하신 품목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사무실에서 급히 준비해 온 자료.
이 자료에 들어 있는 품목들은 광주에 총판이 하나인 우리 WG 메디컬에서만 받을 수 있는 품목으로 골라 준비해 왔다.
내가 생각했을 때 기능적인 면에서부터 뛰어나기도 했고, 박 원장의 성향을 고려한 제품이었다.
박 원장과 나의 관계는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선호도를 빨리 파악하는 것 또한 내 업무이다.
그렇기에 우리 회사에서 받는 제품을 선호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특징을 토대로 물건 목록을 준비해 왔다.
더불어 이 물건들은 절대적으로 우리 회사를 통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품목들이다. 즉, 이상일 차장은 우리 회사에서 물건을 사가지 않는 한 물건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
박 원장은 내가 건넨 파일의 품목들을 꼼꼼하게 읽어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일만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민 대리. 어떻게 내 취향 알고 물건을 이렇게 골라 왔어?”
먹혔다.
박 원장과 일했던 세월이 길지는 않지만, 짧은 시간 속에서 그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박 원장이 선호하는 물품 취향을 맞췄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상일 차장을 이기고 지고를 떠나, 내가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마음을 온전히 맞췄다는 기쁨. 그 하나로도 충분한 지금이었다.
나는 넘치도록 나오려는 기쁨을 겨우 눌러내고 박 원장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원장님이 선호하시는 스타일의 품목을 알고 있어야죠. 마음에 드시는 품목들이라고 하니 다행입니다. 하하.”
“민 대리가 이렇게 신경 써주는데……. 아무튼 한번 봐볼게.”
그의 씁쓸한 표정.
아마 이상일 차장의 가을 메디컬. 그 메디컬과 나를 저울질했다는 미안함이 생각나 그러는 모양.
“에이, 신경은 원장님이 저한테 써주시는 거죠. 항상 도와주시고, 원장님 덕분에 많은 거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내 말에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 대리가 저번에 준 견적서 말이야. 다른 회사 비슷한 품목들과 비교해 봐도 저렴하게 넣어줬더라.”
“그럼요. 업계 최저가로 드린 겁니다. 저도 이쪽 업계에서 일하면서 마진율 그렇게 적게 드린 건 처음이에요.”
“이상일 사장이랑은 아직 잘 지내고?”
“조금 전에 온 이상일 선배님 말씀하시는 거죠?”
“어. 이번에 회사 차렸다고 하더라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가을 메디컬. 이번에 우연히 듣게 됐습니다. 회사도 한 달? 잠시 다녔던 터라 사적 친분은 없습니다. 물론 퇴사 후에는 더더욱 없었고요.”
“아… 그래? 난 꽤 친분이 있는 줄 알았네.”
이상일 차장이 박 원장에게 나와 친분이 있다고 한 모양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반박하고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상일 사장이 하도 앓는 소리를 하길래, 물건 몇 품목은 가을 메디컬로 바꿔야 하나 고민했었거든. 그래서 사실 단가랑 샘플 받아서 몇 가지 비교해 봤었어.”
그는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원장님 입장에서는 비교해 보시고 초이스하는 게 당연한걸요. 저는 당연히 원장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좋은 물건과 단가로 가지고 오는 거고요.”
그는 내 말에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알려주셔도 됩니다. 그만큼 저희 물건과 그리고 원장님께 드리는 단가도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하. 내가 이래서 민 대리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는 내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직책이 대리답지 않아. 가끔 보면 십 년 이상 일한 베테랑 같을 때가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하핫.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근데 단가며 물품이며, 전부 안 바꾸기로 결정했어. 빠른 시일 내로 연락할 테니까, 물건 정리해서 넣어줘.”
나는 그의 말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 원장에게 허리를 숙였다.
“원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 물건 쓰는 것도 아닌데 뭘 이렇게까지 해. 얼른 앉아.”
“그래도요. 사실 오래 고민해 보실까 봐 조마조마했거든요. 하하.”
내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에 이상일 사장 올 때까지만 해도 조금 더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민 대리가 준비해 온 자료보고 고민할 틈이 없겠더라고.”
“네?”
“민 대리는 늘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였어. 뭔가 내가 이런 건 어떨까? 라고 혼자 생각을 하고 있으면 민 대리가 꼭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더라고.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누구랑은 다르게…….
그 누구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상일 차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연락 줄 테니까, 물건 가져다줘. 가을 메디컬 사장님 너무 오래 기다리시겠다.”
“아! 넵. 저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원장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진료실 문을 열고 병원 로비로 나왔다.
진료실 앞 환자 대기석에 앉아 있는 이상일 차장.
나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어. 민 대리, 오랜만이네.”
“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들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넵. 고생하십시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한 뒤 곧장 박 원장의 진료실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를 뒤로 한 채 담배를 피우기 위해 병원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던 정형외과의 옥상은 역시 큰 병원답게 잘 꾸려져 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한 가든과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들. 그리고 내가 걸어가고 있는 저 멀리 보이는 흡연실까지도.
흡연을 할 수 있는 곳은 옥상 맨 끄트머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날씨가 우중충한 탓인지, 애매한 시간 탓인지 옥상에는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것 마냥 조용했다. 고요한 느낌만이 아닌,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가고 있는 그때, 모퉁이 뒤에서 들리는 흐느끼는 소리. 나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장소가 병원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혹여나 환자가 아픔에 울고 있는 소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지체할 틈도 없이 코너를 돌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동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한 여성. 몸이 아파 울고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녀는 환자복도 그리고 일상복도 아니었다.
간호사복을 입고 있는 그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얼굴이 온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짝살짝 보이는 얼굴.
분명 수간호사 선생님이었다.
울고 있는 장면을 들켜 나에게 민망할세라 나는 뒷걸음질로 조용히 자리를 피하려고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직.
뒤로 걷는 탓에 보이지 않아 밟아버린 버려져 있던 플라스틱 물병.
그녀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내 발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얼굴로 시선을 움직였다.
“민… 대리님?”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화장이 모두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두덩이도 꽤 부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쳐 당황스러움에 서둘러 대답했다.
“아… 선생님 제가 오려고 온 게 아니라……. 저는 소리가 나길래 환자분이 혹시나 아파서 그러시는 줄 알고 왔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혹시 몇 시에요? 제가 휴대폰을 두고 올라와서…….”
그녀는 슬리퍼를 신은 채 아무 짐도 가지고 올라오지 않은 듯했다.
날씨가 추운 편은 아니었지만, 얇은 간호사복에 슬리퍼를 신은 그녀.
나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보여주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내려가야 하는데.”
그녀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몸은 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울고 난 후라 얼굴이며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잠시만요. 거기 그렇게 계시지 말고 우선 여기 앉아 계세요.”
나는 그녀에게 옆 벤치를 가리키며 말을 하고 뒤를 돌아 자판기로 향했다.
옥상에 있는 커피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뽑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미 그녀와 몇 마디를 나눈 후라 이왕이면 수간호사를 진정시키고 같이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여기요. 따뜻할 때 한 모금 하세요. 그리고 이거.”
나는 커피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 감사해요.”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묻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묻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와 나란히 앉은 그녀.
우리는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대화 없이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그렇게 오래 만났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로 세상이 무너질 듯 슬퍼하는 그녀.
“잊으려고 노력하는데,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눈물에 일하다가도 몇 번씩이나 옥상에 올라오게 됐어요.”
그녀는 마치 허공에 외치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수간호사가 울게 된 이유에 대해 듣게 되었고, 나는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동안 병원을 오며 가며 수도 없이 만났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싶어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람 몸에 아주 자그마한 화상 하나가 생겨도 다 아무는 데에는 짧게는 몇 주, 길게는 평생 흉터가 남아요. 하물며 몇 날 며칠을 함께한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어떻게 금방 잊겠어요.”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금방 잊으려 애쓸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선생님 삶에서 나가게 두세요.”
나는 재킷 안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대리님.”
“대신 너무 아파하고, 이별에만 몰두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인생에 한 부분을, 지금 이 순간을 슬픔 속에서만 갇혀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그녀는 내 말에 한참이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멈추고 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대리님.”
“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생각하면서 요즘 너무 힘들었거든요.”
“누구에게나 당연한 거죠.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지는 마세요.”
“병원 간호사 선생님들한테 털어놓기도 힘들었는데, 제가 어쩌다 보니 대리님께 다 털어놔 버렸네요.”
“입단속 잘하겠습니다. 하하.”
나는 그녀에게 농담 섞인 말투로 입에 지퍼를 잠그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그녀는 내 모션에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그래도 말하고 나니 한결 가볍네요. 오늘 이야기 들어주셔서, 그리고 조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나는 그녀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너무 오래됐다. 저 먼저 내려가 볼게요, 대리님!”
“네. 저도 얼른 가서 일 봐야겠네요.”
우리는 벤치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 앞장서는 그녀의 뒤를 따라 모퉁이를 빠져나오려는 그때.
앞서가고 있는 수간호사는 누군가를 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