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나는 그의 말에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당연한 듯이 말하는 타 거래처와의 만남.
거래처를 갈아타는 것이 불법적인 일은 아니기에 숨길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 병원에서는 메디컬 영업 직원에게 말을 하는 것을 꺼리는 게 사실이다.
누가 거절을 하고 끊어내는 것을 쉬워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타 거래처에서 영업을 왔다거나, 메디컬 업체를 갈아탈 때는 점점 연락을 끊어내고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가을 메디컬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박승호 원장. 게다가 우리 회사의 견적서와 가을 메디컬의 견적서를 내 앞에서 비교하는 모습이 다소 놀라움을 자아내기는 했다.
“아시는 업체입니까?”
나는 그에게 가을 메디컬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오늘 모던 정형외과로 첫 출근을 한 박 원장이, 전날 메디컬 업체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사적으로 아는 메디컬 회사 같았기 때문이다.
“어… 아는 회사이긴 하지.”
메디컬 업체를 갈아타려고 하는 것인지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서로 불편해질 수도 있었기에,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 질문을 겨우 삼켜냈다.
“근데 민 대리.”
“네, 원장님.”
“기존에 국동 정형외과로 넣던 단가랑 오늘 가져온 단가가 좀 다르네?”
예전에 박 원장이 국동 정형외과에 있을 당시 들어갔던 금액과 오늘 내가 모던 정형외과로 견적서를 뽑아온 단가가 상이한 이유.
바로 박 원장 때문이다.
회사에서 모던 정형외과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박 원장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게 하기 위해 김 대표가 단가를 하향 조정해 준 것.
그는 아직 그 이유에 대해 몰랐기에, 자칫하면 기존 병원에서 단가가 높아 서운해할 수도 있어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번에 원장님께서 모던 정형외과로 옮기시면서 저희 물품을 사용해 주신다면, 기존 병원 사용량도 있었기 때문에 단가 대폭 하향 조정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다 낮아졌네.”
그는 내 말을 듣고 견적서 금액들을 펜으로 표시하며 다시 보았다.
“네. 원장님 많이 도와주십시오. 회사에 열심히 푸시해서 최소가로 낮춰왔습니다. 다른 어느 병원도 이 단가로 들어가는 곳 하나 없습니다.”
그는 품목별로 가을 메디컬 견적서와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 박 원장에게 들어왔지만, 가을 메디컬에서 견적서를 넣어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좋을 수는 없었다.
“우선 내가 한번 비교해 보고, 연락 줄게.”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원장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내게 미소를 보였다.
단가와 품목만큼은 자신이 있었지만, 가을 메디컬과 박 원장의 관계를 모르는 현재로써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박 원장의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자, 메디컬 직원으로 보이는 3명의 사람이 병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메디컬 직원임이 확실했다.
쫙 빼입은 정장에 화분을 하나씩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박 원장의 진료실에서 나오는 나를 견제하는 눈빛.
나는 그들의 시선에 맞받아치지 않고, 원무과 간호사에게 향했다.
그들에게 맡겨두었던 커피를 받아 김사랑 원장과 안국환 원장에게 차례로 들려 인사를 나눈 후 그제야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 * *
가을 메디컬.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였기에 신생 회사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박승호 원장과의 친분이 있다라…….
가족 관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금세 접었다.
그랬다면 자신의 형인 여천 정형외과의 박승철 원장에게 나를 소개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어떤 관계일까, 가을 메디컬은 어떤 회사일까, 라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사무실로 복귀했다.
회사에는 하필 아무 선임도 자리해 있지 않았다. 같은 직책의 대리나 후임들이 알 리는 만무했기에, 나는 발이 넓은 손지혁 차장이나 김 대표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직원.
한태준이었다.
“대리님. 혹시 바쁘십니까?”
“바빠도 너랑 이야기할 시간은 있지. 왜, 또 무슨 고민이 생겼길래, 그런 표정 짓고 있어.”
그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내게 물었다.
“제 표정에서 티가 납니까?”
“그럼.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왜 무슨 일인데.”
그는 무슨 일이냐는 내 말에 사무실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이 들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임을 눈치채고 나는 그에게 턱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한태준은 나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왔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한태준 역시 담배를 입에 물더니 대화의 시작을 망설이는 듯했다.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물었다.
“대리님. 이상일 차장님 기억나십니까?”
“이상일 차장?”
나는 그의 질문에 물고 있던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
이상일 차장은 우리 회사에 잠시 이직해서 들어왔던 직원이었다.
그는 회사에 이직하자마자 온갖 거짓말로 직원들의 매출 높은 병원을 빼앗았고, 그 병원을 가지고 퇴사해 자신의 회사를 차리려고 했던, 한마디로 양아치 같았던 놈이다.
내 표정을 본 한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차장님, 메디컬 업계로 다시 돌아오셨답니다.”
“하. 어떻게 메디컬 회사에 들어갔지? 광주 바닥에 그렇게 나쁘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텐데.”
메디컬 업계가 좁다 보니, 소문이 나는 건 삽시간이다.
게다가 나쁜 소문이라면 더더욱이지.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아예 회사를 차리셨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믿고 광주에서 메디컬 회사를 차린 것인지, 자신의 모든 거래처를 우리 회사에 두고 갔기에 그 배짱이 신기할 따름.
“근데 어떻게 알았어? 이 차장이 회사 차린 지?”
한태준은 내 물음에 담배를 깊이 마신 후 곧바로 발로 밟아 꺼트렸다. 그리고 시선은 내 눈이 아닌 내 옷자락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이 차장님이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뭐?”
“저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하더라고요.”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태도를 보니, 스카우트 제의에 거절한 게 아니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상일 차장이 나쁜 자식인 것을 알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한태준에게 미쳤냐, 정신 차려라, 같은 이야기를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인생이 아니라는 것, 그 하나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쁘게 퇴사를 했고 인성이 아닌 사람인 것을 알아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기에, 그 사건을 일반화하여 평생 안될 사람, 평생 망할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가 없기 때문.
나는 이를 악물고 하고 싶은 말들을 참아냈다.
“조건은?”
한태준은 나에게 혼날 것이라 생각했는지, 내가 아무 나무람 없이 묻는 모습에 상당히 놀란 듯했다.
“지금 받는 연봉의 150퍼센트요.”
한태준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뇌리에 꽂혔다.
신입인 한태준에게 중요한 것.
다른 직책의 직원들보다 돈에 대한 흔들림이 가장 강할 시기이다.
경력이 쌓이면 급여 외에도 보이는 것들이 많아진다.
돈만큼 중요한 것이, 회사 사람.
물론 회사라는 곳이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수단이지만,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24시간이라는 시간 중 잠자는 10시간을 제외하면 14시간. 그중 절반이 넘는 9시간에서 10시간 정도를 매일 회사 사람과 부딪히며 일을 한다.
각자의 가족들보다 오랫동안 붙어 있는 셈이지.
그렇기에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 특히 회사 사람들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클 수밖에 없다.
돈 역시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만큼 사람 관계를 제쳐둘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태준과 같이 신입 직원은 그것을 깨닫기에는 아직 미숙한 사회 경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데이거나, 직장 동료 간의 스트레스를 받아보기에는 적은 시간이었기에 돈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이다.
그래서 연봉을 반이나 올려준다는 사실에 흔들리는 것 또한 당연했다.
“많이 올려주네.”
“네. 그래서 사실 고민이에요.”
“당연하지.”
나의 호의적인 반응에 오히려 한태준이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사과를 했다.
“뭐가 죄송해. 퇴사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아니요. 고민 중인데, 제가 이런 이야기 말씀드리게 돼서요.”
“죄송하긴. 혼자 결정하고 퇴사했을 수도 있을 텐데, 나한테 고민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거 아니야. 하하.”
그는 내 장난스러운 말에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제가 회사 다니면서 믿고 따른 분이 대리님이셔서. 대리님께는 이 고민을 상담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서 조심스럽게 여쭤봤습니다.”
나는 들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 붙잡아야 할까, 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한태준의 표정을 보니 이미 마음이 많이 기운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너를 붙잡을지, 퇴사하라고 추천을 할 생각도 그리고 능력도 없어.”
한태준은 나의 말에 눈을 연신 깜빡였다.
내가 자신에게 딱 해결책을 줄 것이라 예상한 모양.
“물론 이 차장이 나쁘게 나간 사람이고, 인성? 솔직히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네가 거기 회사로 들어가서 앞으로 승승장구할 수도 있지.”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지금 회사는 내가 네 연봉을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거기로 가면 연봉도 반이나 올려준다는데, 어떻게 붙잡겠어.”
나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어 갔다.
“네가 그 회사로 가게 된다면 널 응원하고 잘되기를 기원해 줄 거야. 나 역시 태준이 너를 아꼈으니까. 나는 조언을 해줄 뿐이지, 네 인생이기에 선택은 네 몫이야. 난 너를 책임져줄 수는 없거든.”
“네. 만약에 대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은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 음……. 나는 상사라는 인물이 회사 생활에, 그리고 넓게 보면 내 인생에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상사가요?”
“어. 내가 겪어본 바로는 그래. 그 사람에게 일을 배우면서 일뿐만 아니라, 나는 인생도 배운다고 생각하거든.”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럴 것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차장 밑으로는 못 갈 것 같아. 내가 너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큰 이유가 바로 그거지.”
그는 내가 붙잡고 싶어한다는 말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지금은 연봉이 조금 낮을지라도, 첫 사회생활에는 좋은 사수 밑에서 배우고 난 뒤에 네 능력치를 키우면 돈이라는 건 따라오기 마련이거든.”
“아…….”
“당장 눈앞에 놓인 것도 중요하지만, 먼 미래를 보는 거. 그게 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내 조언은 여기까지. 선택은 말했다시피, 태준이 네 몫인 거 잊지 말고.”
“넵. 감사합니다, 대리님.”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대리님 말 듣고 후회해요, 같은 핑계 대지 마라. 하하.”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농담을 던졌다.
그는 내 말에 웃음을 보였다.
“엄청 도움됐습니다. 역시 대리님께 여쭤보길 잘했어요.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 근데 회사는 이미 차렸대?”
“네. 이제 일주일인가, 이 주 정도 됐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입술을 샐쭉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이름은? 뭐, 상일 메디컬 이런 건가?”
“에이. 대리님도 참. 하핫. 뭐라고 하더라, 한 번밖에 못 들어서… 여름 메디컬?”
“여름?”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세게 치며 말했다.
“아니다. 가을 메디컬! 가을 메디컬이에요.”
나는 한태준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일 차장이 가을 메디컬 대표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