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너 진짜 일 똑바로 안 할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한마디에 사무실은 싸한 분위기로 얼어붙었다.
큰 소리에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장홍석 이사였다. 장 이사가 소리를 지르는 대상은 다름 아닌 최준성 과장.
안 좋은 소식은 금방 퍼진다더니, 벌써 장 이사가 모든 얘기를 듣고 온 모양이다. 장홍석 이사가 소담 정형외과의 수술방 간호사들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는 길에 바로 알아보고 온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물건 발주 넣은 거 실수했던 건 왜 말 안 했어?”
“아 그게……. 공급실 선생님이랑 얘기해서 좋게 끝냈…….”
“좋게 끝내기는. 최 과장 앞에서야 좋게 끝낸 거겠지.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지 않냐? 최 과장 물건 몇 번이나 잘못 넣고, 발주 누락도 했다며? 오죽하면 병원에서 먼저 자기들이 깠던 백상 메디컬에 연락해 봤겠냐.”
“…….”
“백상 메디컬에서는 이때다 싶어서 원래 자기들이 기존에 넣던 제품 단가 낮춰서 들어갔다잖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문제가 아니라, 일을 대체… 하……. 됐고, 대책 세워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랬는데. 이건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찍어누르기지만, 최준성 과장의 콧대가 완전히 꺾여 먼지처럼 탈탈 털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지만 통쾌한 마음도 분명 있다.
그렇게 늘 큰소리 뻥뻥 치더니 결국은 거래처를 빼앗긴 이유가 실수 때문이라니.
병원에서는 겨우 한두 번의 실수 가지고는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다. 간호사들도 같은 나와 마찬가지인 그저 월급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할 수도 있는 실수 한두 번 가지고는 업체를 바꾸기가 힘들다.
귀찮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현재 거래 중인 업체에서 넣는 물건들 재고부터 빨리 없애야 하지, 바뀐 물건으로 또 환자들에게 설명해야 하지.
새로운 거래처에 발주, 납품 방식부터 귀찮은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단가를 대폭 하향 조정하거나 현 업체의 태도가 상당히 문제가 있을 때가 아니면 이뤄지지 않는 게 바로 거래처 변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홍석 이사가 직원들을 향해 큰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들 잘 들어. 직원들 입장에서 한 번 두 번 가벼운 실수하는 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 이게 모여서 병원이랑 벽 생기고 하다 보면 거래처 이렇게 끊기는 거 한순간이야. 너네 나가서 열심히 영업하는 거 너무 좋지. 신규 거래처 따오는 거? 좋다, 이거야. 근데 자기 거래처 관리 이딴 식으로 해서 끊길 거면 거래처 더 따오지 마. 쥐고 있는 거래처 관리나 똑바로 해. 이렇게 병원 몇 개 등 돌리면 소문나는 거 순식간이야. 잘들 하자, 좀.”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홍석 이사는 문을 세게 닫으며 이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사무실 공기는 퇴근 때까지 녹지 않았다. 퇴근 시간을 30분 넘긴 지금도 다들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이사실 문이 열리고 장홍석 이사가 나왔다.
“뭐 해. 할 일들 끝났으면 얼른 들어가. 나 들어간다. 정리들 해.”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제야 하나둘씩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 *
8시 40분.
“안녕하십니까.”
평소보다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출근하지도 않은 시간. 사무실에는 이미 많은 직원들이 출근을 한 이후였다.
어제 최준성 과장의 소담 정형외과 일이 있었던 이후라 다들 바짝 긴장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누구 하나 상사에게 책잡힐 일이 생기지 않게 쉬쉬하며 일하는 탓에 사무실 분위기는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평상시에는 지나갈 법한 작은 일도 이런 상황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돌아오는 대가는 몇 배가 되기 때문이다.
띠리링.
적막한 사무실 탓에, 울리는 벨 소리는 우렁차게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벨 소리에 놀라 주머니에서 급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은 신비 병원 임근수 과장.
핸드폰을 들고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굳이 나와서 받을 필요는 없지만 왠지 오늘은 사무실에서 이 전화를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네, 과장님. 민지훈입니다.”
- 어, 민 대리. 통화 가능해? 바쁜가?
“아닙니다. 통화 당연히 가능합니다. 과장님은 병원이십니까?”
- 그럼. 좀 전에 나왔지. 민 대리 혹시 오늘 시간 괜찮아?
“네. 오늘 가능합니다!”
- 아직 몇 시인지도 얘기 안 했는데. 하하.
“하핫. 과장님이 불러주시면 언제든 가능하죠.”
- 고맙네? 다름이 아니라, 어제 내가 얘기했던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 기억나지?
“네. 기억납니다.”
- 박 원장이 오늘 시간 된다고 하는데, 오늘 저녁에 가능해?
“예. 저녁에 딱 시간 비워뒀습니다.”
- 민 대리도 참. 그럼 이따 저녁에 같이 만나게.
“네! 편한 시간 알려주시면 맞춰서 가겠습니다.”
- 그래. 그럼 이따 오후에 다시 연락하자고.
“저녁에 뵙겠습니다!”
됐다.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기회에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미소를 지었다.
아직 거래처를 따온 것도 아니지만, 사무실 문을 열며 들어가는 내 어깨는 한껏 솟아있는 느낌. 삭막한 사무실 분위기와는 다르게 나만 홀로 들떠있었다.
* * *
오후 5시 50분.
다들 퇴근 준비를 하고, 나 역시도 신비 병원의 임 과장과의 약속에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혹시 모르지만 소모품 물품들 종류와 자료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오늘은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과의 친분만 쌓고 온다고 해도 성공적인 시작이지만, 혹여나 얘기 중 일 관련 주제가 나온다면 대화에 합류해 제품 어필을 해도 충분하기에 준비는 항상 철저히 해가야 한다.
손지혁 차장이 팁을 주었던 명의 병원 박 원장의 취미인 바이크 라이딩에 관한 대화를 섞기 위해 준비를 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용돈 벌이를 하기 위해 배달 아르바이트 몇 달 해본 것 외에는 바이크의 ‘바’ 자도 모르지만.
[광주 바이크 라이딩.]
[광주 근교 바이크 라이딩 가기 좋은 곳.]
[전라도 바이크 라이딩.]
취미 생활의 대화에서 십분의 일이라도 공감을 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장소 물색과 바이크에 대해 한참이고 검색을 했다.
회사를 빠져나와 약속 장소에 들르기 전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들어와 곧장 숙취 해소제 3개를 구매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한 병을 원샷 했다.
* * *
“민 대리. 어서 와.”
“안녕하십니까. 벌써 와계셨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직 우리 약속 시간도 안 됐지. 외래 마무리가 일찍 끝나서 그냥 먼저 와 버렸어.”
신비 병원 임근수 과장은 자기 옆자리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인사해. 여기는 명의 병원 박 원장, 박승호. 여기는 내가 말한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
입사 초반에만 명의 병원에 들러 지나가다 얼굴 스친 게 전부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미리 듣고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박 원장은 딱 바이크 라이딩을 좋아할 것처럼 생겼다. 옷도 가죽 재킷이 잘 어울릴법한?
이쪽 일을 하다 보면 대부분 써전들의 이미지가 살짝 비슷하다. 단정하고 바른 생활 사나이 같은, 그런 공부 잘했던 학생 이미지.
반면 박승호 원장은 이전에 봐왔던 써전들과는 달리 머리 길이도 꽤나 긴 편에 노는 걸 굉장히 좋아하게 생긴 상이랄까?
178 정도 돼 보이는 키에 얼굴도 훈훈한 편이라 젊었을 때, 특히 의과대 출신에 이 얼굴이면 여자들에게 인기 꽤나 많았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딱딱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런지 박승호 원장에게 호감이 갔다.
“안녕하십니까.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겉옷 안주머니의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박승호 원장에게 건넸다.
“뭐 나한테 잘 부탁할 게 있나, 반가워요. 임 과장한테 종종 민 대리님 얘기 들었어요.”
박 원장은 두터운 휴대폰 케이스를 열어 앞면에 꽂혀있는 명함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정말요? 임 과장님, 칭찬해 주셨을 거라 믿습니다. 하하.”
“그럼, 당연하지. 내가 민 대리 칭찬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 배고플 텐데 인사는 이쯤하고 얼른 밥부터 먹자고.”
주문한 참치 회와 새우튀김, 탕, 그리고 술이 테이블에 차례로 세팅이 되었다. 그리고 오기 전에 편의점에 들려 사 온 숙취 해소제를 꺼냈다.
“과장님, 원장님. 시작 전에, 이거 하나씩 드세요.”
숙취 해소제 뚜껑을 하나씩 열어 박 원장과 임 과장 앞에 올려두었다.
“와, 민 대리님 센스가 장난 아닌데요? 이래서 임 과장이 칭찬을 그렇게 했구나? 잘 마실게요.”
“그래, 나도 요즘 이거 안 마시고 술 마시면 다음 날 힘들더라 힘들어. 거 봐. 내가 민 대리 센스가 남다르댔지? 고마워, 민 대리.”
“하하. 쑥스럽습니다, 과장님. 박 원장님 말씀 편하게 하십쇼.”
“그럴까, 그럼?”
박 원장은 웃으며 말을 놓았다.
“그런데 민지훈이라고 했지?”
“예, 맞습니다.”
“근데 낯이 좀 익는데?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