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복수 소녀(7)
「복수 소녀」의 배급 시사회 영화관.
국내 대형 배급사 중 하나인 '씨네마고'의 직원.
심창효 부장은 사내 이사의 전화를 마무리했다.
-망하면 자네 탓이고, 성공하면 자네 공이야. 알지?
"알고 있습니다. 이사님."
이번 영화는 회사 내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극장 수를 최대한 늘리는 게 좋을지.
아니면, 적당히 구색만 갖춰야 할지.
-그럼 계속 수고하게.
"네. 이사님."
걸그룹 솔라의 멤버가 주연인 영화.
그동안 아이돌 멤버가 말아먹은 영화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더군다나, 단독 주연이면 그 위험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석아, 이번 영화 어떨 것 같냐."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제가 태양빛이라서."
"태양빛?"
심 부장은 시선을 돌려 박철민 실장을 바라봤다.
"야 인마, 대머리 놀리면 벌 받아."
"???"
「복수 소녀」의 주인공 장은서.
필모그래피는 로코 드라마 서브 여주인공 달랑 한 줄인데.
씨네마고 영업 3부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방 마담.'
그녀가 망설임 없이 100억대 투자를 결심한 작품이었기에.
이 바닥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 할머니의 투자 안목이 얼마나 뛰어난지.
하지만, 아무리 방 마담의 선택이라도 무명 감독에 걸그룹 주연이라서.
"저기, 부장님."
"뭐야."
이내, 옆자리 부하 직원이 특이한 말을 꺼냈다.
"오늘 투자자도 한 명 오긴 했습니다."
"그래? 투자자 누구."
"저분입니다."
"???"
직원이 조심스럽게 가리킨 방향.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한 남자.
분명히 저분은 걸그룹 솔라 매니저라고 전달받지 않았나.
"장은서 씨 매니저 아니었어?"
"네. 근데 개인적으로 투자하셨다고."
"얼마나?"
담배를 피우며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금수저 같지는 않고, 평범해 보이는데.
"10억?"
"네."
「복수 소녀」에 10억 이상을 태우는 개인 투자자.
뭘 믿고 이 영화에 전 재산을 몰빵했다는 뜻일까.
"성공을 확신한다는 건가."
"겨우 시나리오만 보고요?"
"아마도."
유명 걸그룹을 키워낸 프로듀서의 신들린 안목인 걸까.
'확실히 뭔가 달라.'
처음부터 이번 영화에는 평범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10년 묵은 무명 감독.
방 마담의 통 큰 투자.
걸그룹 멤버의 액션.
보통 이런 특이한 케이스는 둘 중에 하나였다.
미친 듯이 날아오르거나, 개 같이 멸망하거나.
'영화를 보면 알겠지.'
금성 프로덕션, 씨네마고, 주요 제작진.
관계자들은 전부 모여 영화를 시청했다.
잔잔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오프닝 곡.
쿵─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으로 첫 씬을 진행했다.
길바닥에 픽 쓰러지는 피해자의 처참한 모습.
잔혹한 악역은 짐승을 도축하듯 남녀를 살해했다.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조폭들은 현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본 소녀.
은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다짐했다.
적절한 시간 스킵과 함께, 초반부터 액션 장면으로 이어졌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에 대한 단서는 독특한 문신뿐이었으니.
어느새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했다.
깔끔한 장면 전환과 연출.
심장을 옥죄는 진동 소리.
주연 배우들의 눈빛 연기.
악역을 하나씩 제거할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
예측하기 어려운 진행과 전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숨이 막힐 듯한 몰입감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주인공은 조직 보스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마지막, 복수에 성공한 은서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재밌다거나 지루하다고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 아."
영화의 막이 오르고, 영화관에 불이 켜지는 순간 몰입에서 벗어났다.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먹먹한 여운.
하루 정도는 계속 생각날 법한 결말이었다.
'.... 미쳤군.'
김춘수 감독은 어디에 숨어있던 보석인가.
이런 연출력으로 10년간 무명 생활을 보냈다니.
영화 속 장은서의 연기와 양주희의 액션.
둘 다 완벽했다고,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혹시 다른 스턴트우먼을 기용했더라면, 과연 이런 클로즈업 연출이 가능했을까.
짝, 짝짝짝─
영화가 끝나고 모두 일어나서 손뼉을 치는 관계자들.
순간, 심창효 부장은 시선을 돌려 정수호를 바라봤다.
'이래서 투자한 건가.'
영화를 보기 전에 그의 모습은 타짜였는데.
지금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천재로 보였다.
'정수호 팀장.'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품 팔던 무명 감독을 발굴한 재능.
어쩌면, 그는 대한민국 영화계의 역사를 바꿔버렸을 수도.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은 가히 천재 수준.
투자할 때 보여주는 과감한 행동력까지.
'씨네마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장 수를 땡길 테니.
'.... 조만간 큰물에서 놀겠네.'
정수호 팀장의 뒤로 반짝이는 후광이 비췄다.
* * *
아씨, 빔프로젝터 좀 꺼라.
'졸라 눈부시네.'
영화 끝나고부터 심 부장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주 심각한 얼굴로 계속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기분 탓인가.
"은서야. 어떤 것 같아?"
"영화 잘 뽑혔네요."
"...."
나는 아니던데.
청불 받았잖아.
그럼 최소한 이보다는 재밌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똥촉을 뛰어넘을 만큼 재밌을 수 있는 거잖아.
'....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나?'
이제 와서 슬슬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괜히 투자해서 역배의 흐름을 방해한 건 아닌지.
영화처럼 미래를 아는 주인공이 운명을 바꾸려다 나비 효과가 발생한다거나.
터벅, 터벅─
이내, 천천히 다가오는 배급사 관계자들.
심 부장은 대표로 감독님께 말을 걸었다.
"감독님,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하하."
"아...."
자존심 강한 양반인데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이어지는 극찬 릴레이.
쫄린 마음이 풀어졌다.
"최대한 많은 극장을 확보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소에 공적으로는 제법 담백한 사람이라 기분이 묘했다.
나도 친분이 있는 건 아니고, 오늘 처음 담배 피운 사이라.
"정 팀장님."
"네?"
스윽─
나는 심 부장님이 건네는 명함을 받았다.
"서로 필요한 일 있으면 종종 연락하시죠."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역시, 학연 지연 흡연.
몇몇 제작사 직원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굳이 다가와서 말을 붙이는 사람도 있었는데.
"정 팀장님."
"아, 네."
이번 영화의 음악감독.
종종 솔라 정규 앨범 작업을 욕심내던 사람.
뒤통수가 가렵지 않아서 딱히 관심은 없었다.
"팀장님, 혹시 그 소식 들었습니까?"
"네?"
"원래 이 바닥에서 3명 알면 비밀이 아니거든요."
"무슨 비밀이요?"
음악 감독은 남들이 들을세라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한국을 기웃거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 네?"
"역시 모르셨구나."
"네. 몰랐네요."
"어쩌면 묠니르 후속작일지도 몰라요."
"...."
그거 왜 나는 알 것 같지.
"한국 프로듀서 중에서 한 명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이에요."
".... 아하."
그거 이미 물색 끝났어요.
도하나가 작업한 거 보냈어요.
"지금 국내 프로듀서들 사이에서 난리예요. 선착순 1명 로또잖아요."
"음.... 로또죠."
"누가 알아요, 제가 맡아서 인생 역전할지? 하하핫."
"아, 예."
벌써 옛날에 선착순 1명 끝났어요.
그 인생 역전은 다이애나 몫이라고.
"그니까 저 같은 인재 놓치지 마시고 솔라 정규 앨범을...."
그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박철민 실장님.
음악 감독은 아쉬운 듯 나를 놓아주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니까 너무 퍼트리진 마시고."
"아, 그럴게요."
이분은 무슨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 싶은 것 같은데.
옛날에 기차 떠났다니까.
아니, 애초에 기차도 없었지.
처음부터 도하나한테 의뢰가 들어왔으니까.
'근데 이렇게 소문이 퍼지는 거 보면....'
묠니르 후속작도 슬슬 기사가 뜨려나 봐.
* * *
성공적으로 배급 시사회를 마치고.
멤버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보통 언론과 대중 앞에 보여주기 전까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앞으로 기자들과 관객 시사회-, 즉, 영화 개봉만을 앞두고 있었다.
"소미야, 내일 복면가수 촬영 있다."
"알죠. 헤헤."
소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내게 말했다.
"저 준비 엄청 열심히 했어요."
"얼마나?"
"매일 3시간!"
"...."
보통은 그 정도면 열심히 한 게 아니지만.
"열심히 했네."
"그쵸? 헤헷."
"이왕이면 5연승 가자."
"당연하죠!"
「복면가수」 스케줄은 조금 특이했다.
떨어지면 얼굴을 공개하고 일정이 끊기지만.
올라가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진행이 됐기에.
"근데 다음 주에는 호러 데이즈 스케줄도 있어."
"아아아아."
이내, 소무룩한 표정을 짓는 소미.
첫 방송 시청률도 잘 나왔으니까.
"소미야, 좀만 더 고생하자."
"저 복면가수 노래 준비 때문에 바빠요!"
"걱정 마. 호러 데이즈는 준비할 게 없어."
"잉."
그냥 가서 무서워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돼.
"팀장님."
옆에서 지켜보던 예지가 말을 거들었다.
"소미가 준비한 노래 한 번만 들어주세요."
"아, 그래."
"노래 잘하면 소미한테 선물도 좀 주시고."
"선물?"
"네!"
그럼 잘했다고 칭찬 스티커라도 붙여줄까.
"오케이. 오늘 잘 부르면 내가 상줄게."
"오예!"
내가 잘했다고 말하는 기준은 조금 달랐다.
뒤통수는 간지러우면서도 무언가 거슬리면.
'.... 그게 나한테는 잘한 거지.'
이어서, 김강욱 선생님의 발라드곡 「너를 위해」 전주가 흘러나왔다.
"행복했어. 널 위해 아껴둔 마음."
우리의 도하나 씨가 편곡한 노래.
소미는 첫 소절부터 감정을 폭발했다.
"팀장님, 어때요?"
"음...."
투 머치. 아예 다른 사람 같아.
적어도 들킬 걱정은 없겠는데.
"너를 위해애애애─!!!"
소미의 장점은 정박에 시원한 고음이었는데.
과하게 표출하는 감정 때문에 전부 가려졌다.
'이게 맞냐.'
솔직히, 소미에게 뭔가 해줄 말은 없었지만.
다행히도 뒤통수가 살살 간지럽기 시작했다.
"팀장님, 너무 잘해서 감동하셨구나?"
".... 응?"
"저도 이렇게 금방 성장할 줄은 몰랐어요."
"아."
예지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군대 갔다 온 게 엄청 컸나 봐요!"
"그런가."
"네! 팀장님께서 큰 그림 그리신 거 맞죠!?"
".... 그런 거 아냐."
"치, 맞으면서."
군대도 그냥 역배로 보낸 거야.
너무 미안해서 마음 아프더라고.
"소미가 연달아 다섯 곡 부를 수 있을까?"
"그럼요. 체력 좋아요."
"...."
「복면가수」에서 계속 이기면 최대 5회 연속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제 노래 어땠어요?"
"잘했어."
"오, 진짜요?"
"응. 많이 늘었네."
"헤헤."
소미는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선물은요?"
"아, 선물."
나는 주변에 있는 멤버들을 스윽 둘러보고 말했다.
"호러 데이즈."
"대박! 그럼 하차하는 거예요!?"
"아니, 솔라 전부 게스트로 출연하게 해줄게."
".... 오홍."
이내, 날바락이 떨어진 멤버들은 내게 다가왔다.
"팀장님, 그건 좀...."
"에반데."
"진짜 에반데."
"삼진 에반데."
양주희도 무서운 걸 은근히 싫어하는 듯했다.
설마 귀신 때리고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니겠지.
"그럼 이렇게 하자고."
나는 멤버들을 한 명씩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면가수에서 1승할 때마다 한 명씩 추가."
"오케이! 4승 간다."
* * *
MBS 방송국, 「복면가수」 세트장.
아나운서 출신 MC 이정주는 오늘 출연자를 확인했다.
출연진 중 가면의 주인을 미리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와아, 솔라가 드디어 나오네."
"정주 씨, 여기 큐시트."
"네네."
작가에게 건네받은 큐시트에는 고작 세 줄이 쓰여 있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 오셨군요.
-과연 갓썬더 다람쥐의 정체는?
-일단 여성분인 건 확실하네요.
이 정도 레퍼토리만 있어도 10분은 떠들 수 있지.
톡, 토톡─
이정주는 곧장 너튜브를 검색해 솔라의 라이브를 시청했다.
나만 봐, SAS, 탑 아이돌.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특히, 소미는 수도꼭지처럼 TV만 틀어도 예능에 나오곤 하는데.
'회사가 일을 잘하네.'
「탑아이돌」을 제외하면 방송에서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가수로서 신비감을 간직한 채 친근한 이미지는 가져갔으니까.
'오히려 소미라서 다행이야.'
만약 김예지가 출연했으면 특유의 음색 때문에 금방 들켰겠지만.
얼굴과 이름을 숨기는 「복면가수」 특성상.
실력을 가감 없이 드러낼 절호의 기회였다.
'실력만 있으면....'
이번에 소미의 개런티가 한층 더 뛸 수도 있겠는데.
요즘 방송가에 떠도는 말이 있지 않나.
솔라가 출연한 방송은 망하지 않는다.
드르륵─
그때, 작가가 들어오며 성주에게 말했다.
"갓썬더 다람쥐님 도착했어요."
"오, 그래요?"
이정주는 한걸음에 달려가 대기실을 방문했다.
똑, 똑─
이내, 안에서 고운 미색의 여인이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제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소미, 갓썬더 다람쥐.
다람쥐 가면을 쓰니까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 그럼 이분이....'
큐앤지 레이블의 명물, 정수호 팀장님.
대중들에겐 댄싱머신으로 알려졌지만.
'.... 안목 천재.'
방송가에서는 솔라의 아버지로 유명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잠시 후, 「복면가수」 무대에 한 마리의 다람쥐가 올라갔다.
"소개합니다! 갓썬더 다람쥐!!!"
"와아아아아─!!"
패널들은 'ㄴㅇㄱ' 자세로 다람쥐를 바라봤다.
MC는 음성 변조가 된 소미에게 질문을 건넸다.
"오늘의 각오 한 말씀만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무조건 4승 하려고요."
"응? 최대 5연승까지인데요?"
"그래도."
그녀는 가면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4승 해서 다 같이 헬파티 가려고요!"
".... 파티요?"
"헬파티!"
아무래도, 이제 말 시키면 안 될 것 같다.
말 많은 사람들은 금방 정체가 드러나서.
"자, 그럼 갓썬더 다람쥐의 첫 번째 무대를 감상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