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사전 준비(5)
드림 에이전시 출신, 두 팀장 간의 팽팽한 기 싸움.
프로모션의 여왕과 안목 천재의 대결.
이 정도면 세기말 치킨게임이 아닌가.
하필이면 솔라를 지금의 위치에 올린 두 사람이었다.
"크으, 가슴이 웅장해진다."
지유는 오래전부터 알던 동네 오빠의 모습을 직관하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루나가 뜬다는 데에 '책임'을 지겠다니.
그동안 솔라만 신경 쓰는 줄 알았는데.
"와아, 수호 오빠 진짜 멋있네."
좋은 집 구석에서 커뮤니티만 하는 누구랑은 달랐다.
"언니들한테 말해줘야징."
냉큼 달려가 연습실에 있는 솔라 멤버들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두 사람의 말싸움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인가.
소문은 이미 퍼져서 멤버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 이미 알고 있었구나."
".... 저기 봐."
소미가 가리키는 곳에 쪼그려 앉은 김 리더.
오늘따라 예지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예지 언니는 왜 저러고 있어?"
"루나를 책임진다는 거 때문에...."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당연하지. 책임지겠다잖아, 책임!"
"아....!"
지유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회사 나간다는 뜻이었어!?!!!!"
"아 깜짝이야."
그러고 보니까.
홍보팀장과 루나 멤버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지.
플립나인 때문에 루나가 묻히면 책임을 지겠다고.
"와아, 오빠. 거의 야수의 심장."
"무슨 타짜도 아니고...."
"그러게. 왜 이렇게 위험한 도박을 하시남."
"...."
한편, 예지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생각했다.
차라리 솔라가 루나보다 먼저 컴백했으면 어땠을까.
루나가 묻힐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매니저님이 잘리진 않았겠지.
아니, 적어도 이렇게 두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았겠지.
컴백 무대에서 더 나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할 테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문득, 수호가 처음으로 솔라를 맡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솔라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본인의 안목과 아티스트에 대한 믿음.
그 신념을 지켜주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얘들아."
이내, 예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유에게 걸어갔다.
"우리 SNS 계정 만들자."
"응? 갑자기?"
"루나 잘되라고 홍보해줘야지. 자매 그룹인데."
"회사에 말 안 하고...."
"그냥 만들고 내가 다 책임질게."
"...."
지유는 팬라이브 방송 어플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솔라의 공식 계정을 생성했다.
"오, 된 거야?"
"응?"
예지는 지유에게 건네받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 근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언니, 왜 눈빛만 비장한데."
"응?"
멤버들은 어리둥절한 예지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뭔가 좀 허술해."
"조금 아니고 엄청."
"연장자잖아. 이해해줘야지"
"예지 언니, 혹시 MBTI가 뭔지 알아?"
"???"
이거 놀리는 것 같은데.
* * *
이 사람들이 내가 책임진다고 하니까 그걸 퇴사로 알아듣네.
그냥 연봉이나 성과급 삭감 정도.
아니면, 다음 우리 팀 TO 걸던가.
'어이없네. 내가 언제 그만둔다고 했냐.'
박 실장님과 함께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이 순간에도 회사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수호야, 괜찮겠냐?"
"저기요, 실장님."
이건 뭔가 이상해요.
"아휴, 너는 이렇게 한 번씩 급발진하더라."
"않이, 그러니까...."
내가 언제 그만둔다고 했냐고.
"지금 회사에서 전부 너랑 홍 팀장님 얘기만 하더라."
"네. 저도 눈치껏 알아요."
"하여튼, 정수호 진짜 화끈해. 저쪽은 홍보팀 신입 TO를 걸었는데 본인은 옷 벗을 각오까지 하고."
"...."
저는 그런 각오를 한 적이 없다니까요.
"걱정하지 마. 네가 루나 망한다고 잘리기야 하겠냐. 솔라의 아버지가."
".... 대신 개쪽팔리겠죠."
"그 정돈 감수해야지. 자신 없어?"
"당연히 자신 있죠."
"역시."
솔직히 말하면, 플립나인이 '조만간' 휘청할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근데, 똥촉이 언제 그렇게 친절했나.
한 달 뒤에 망할지 1년 뒤에 망할지.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직 프렌즈 엔터에 내 자리는 남아있으려나.
"선배님!"
그때, 옥상에 올라온 후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도 들었어요. 루나 때문에 퇴사하실 각오를....!"
"그런 거 아냐."
"아니긴요! 지금 회사에서는 다들 그렇게 알던데요!? 저도 엄청 감동했어요!"
"...."
그냥 얘가 옷 벗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부터 지상모가 루나 로드였잖아.
차라리 스케줄 주는 대로 운전만 하는 로드가 마음은 편한 것 같아.
"선배님, 그거 아세요?"
"뭐를."
"지금 솔라 SNS로 라이브 영상 켰어요."
"응?"
아직 개인 채널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SNS는 인생의 낭비야.
은서랑 주희 싸우는 거 찍기만 해 봐라.
스윽─
상모는 내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라이브 방송을 함께 진행하는 솔라와 루나.
연예인들이 주로 팬들과 소통하는 어플이었다.
-류씨아 언니! 노래 한 소절 부탁해용!
-그럼 예지야. 나랑 듀엣 할래?
-으음, 뭐 부르지.
-여왕님 타이틀곡. 비 더 원.
-응! 좋아.
두 팀이 함께 나오니까 보기 좋았다.
원래 연습생 시절에도 함께 숙소 생활하던 사이였으니.
<솔라빔> 리얼리티 예능을 촬영하면서 많이 친해졌다.
-우아, 기대된다.
-쏴리질러!
이내, 류시아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기타를 쳤다.
'기억나네.'
녹음실에서 저 노래를 듣고 촉이 빡 왔지.
곧장 여왕님께 달려서 곡을 추천했었는데.
-역시 음원 차트 1위 찍는 곡은 뭔가 달라.
-으아앙, 귀가 살살 녹네.
-여러분, 시아 언니가 대표님 타이틀곡 작곡가인 것 아시죠?
-저작권 재벌, 부럽다.
-여왕님, 이거 보고 계신가요?
-대표님 사랑해요!
우리 애들 좀 귀엽네.
허락한 적은 없지만.
'앞으로 종종 라이브 방송 켜도....'
띠리리링─
그때, 누군가 내 스마트폰에 전화를 걸었다.
[프렌즈 엔터 구현식 인사팀장]
새 걸그룹 데뷔하기 직전이면 가장 바쁠 텐데.
"여보세요, 정수호 팀장입니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도라희 학폭이요.
굿. 이게 벌써 터져부렀구나.
-정수호 팀장님, 다음에 술 한잔하시죠.
"그래요."
-나중에 제가 근처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실장님, 루나 컴백 무대나 신경 쓰시죠."
"그래야지."
딱 필요할 때 스캔들이 터져주네.
당연히 우연일 리는 없을 테니까.
'내 똥촉.... 묵혀놓는 거 싫어하는구나?'
홍보팀 TO 가져오면 솔라 매니저부터 한 명 늘려야겠다.
* * *
얼마 후.
신인 걸그룹 플립나인은 데뷔하자마자 음방 1위 후보에 올랐다.
조만간 이슈가 터지긴 하겠지.
정확한 날짜까진 알 수 없지만.
"얘들아, 오늘 무대가 제일 중요한 거 알지?"
"네에."
루나의 음방 대기실.
하필이면 괴물 신인과 비슷한 시기에 컴백해서 그럴까.
리더, 류시아를 제외한 루나 멤버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시아야, 오늘 파이팅 넘치네."
"당연하죠."
오늘 3위의 성적으로, 뒤에서 세 번째 무대에 오르는 루나.
솔직히 묵직한 한 방만 있으면 1위 후보에도 오를 뻔했기에.
"근데 손톱은 물어뜯지 말고."
"아 실수."
".... 근데 지연이는."
"네?"
"아니야."
혼자 라디오 스케줄 갔는데 왜 안 돌아올까.
걱정하는 마음에 상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상모야, 언제 오냐."
-어, 어쩌죠? 차 사고 났어요.
"아.... 지금 리허설이야."
-빨리 택시라도 타려고 했는데 상대가 진상이라.
"아니, 무슨...."
-.... 진상? 나한테 진상이라고 했냐? 너 내려 봐.
"뚜.... 뚜.... 뚜...."
-선배님? 팀장님?
뚝.
아씨, 어떡하냐. 큰일 났네.
솔라였으면 어떻게든 미뤘을 텐데.
루나 리허설은 연기할 자신이 없다.
똑, 똑─
그때, 마침 스탭이 들어와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다음 다음에 루나 스탠바이할게요!"
"저기요."
"네?"
나는 조심스럽게 스탭에게 질문을 건넸다.
"아직 루나가 리허설을 미룰 짬은 아니겠죠?"
"...."
"농담이에요, 농담!"
"...."
"거 참, 넝~담도 못하겠네."
".... 준비해 주세요."
저 쉑, 내가 얼굴 기억해놨다.
솔라 컴백했을 때 두고 보자.
"팀장님, 어떡해요?"
"기다려 봐."
좀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류시아도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리허설이라 꼭 멤버가 오를 필요는 없었다.
당장 대타가 올라서 동선만 맞추면 충분했다.
"일단 너희 춤 알고 있는 사람 데려와야지."
"갑자기 어디서요?"
"내가 회사에 전화해서...."
순간, 류시아를 비롯한 세 명의 멤버들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팀장님, 알잖아요."
"나?"
"네. 솔라랑 루나 안무 자주 따라 하시잖아요."
"그건."
아니, 그냥 따라서 연습한 게 다예요.
익숙해지면 거슬리는 게 없어지니까.
"가요, 팀장님."
"...."
내가 치프 매니저로서 자존심이 있지.
차별이 아니라, 솔라여도 안 했을 거야.
"내가 리허설 무대를 어떻게...."
드림 에이전시에서 쫓겨난 이후, 오직 한 길만 걸었다.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면 이유 불문하고 따르기로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 가자."
하씨, 진짜 먹고 살기 힘들다.
* * *
구현식 팀장은 방송국에 들렀다.
플립나인 멤버들 중 6명은 자신이 직접 캐스탕한 아이들.
그녀들이 음방에서 1위를 찍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아마 내일이면....'
갸냘픈 소녀들은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하겠지.
"도라희...."
분명 데뷔 전에 학폭 건을 밝혔지만.
결국 그녀의 데뷔를 막을 순 없었다.
오히려, 오늘은 자신이 연예계에 발붙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좋소엔터 로드매니저와 캐스팅 디렉터를 거쳐 인사팀장에 오르기까지.
20대의 전부를 바친 회사로부터 받은 퇴사 권유.
학폭 연습생을 자르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인가.
띠리리링─
마침, 제작본부장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하게 됐다. 도중구 이사는 못 건드려.
"....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지 않았다.
'하이엔드' 멤버 중 한 명을 자신이 캐스팅했다.
그 공로만 봐도 이렇게 자를 순 없는 거 아닌가.
"저는 그냥 회사에 맞는 말을 했을 뿐이에요."
-대신 도화선에 불을 질렀지. 너 때문에 빨리 터지는 거야.
"...."
결국에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것 같은데.
-현식아, 생각해 봐. 이름이 플립나인이잖냐.
"네?"
-이제 와서 플립에잇으로 바꿀 순 없다고.
".... 에잇!"
30대 중반의 백수.
다른 회사에 제대로 이직할 수 있으려나.
어렵겠지,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연예계에서의 하루.
플립나인의 차례를 기다리며 다른 아이돌의 리허설을 지켜봤는데.
"엉....?"
<탑아이돌> 출신 걸그룹 루나의 순서.
4인조 멤버 중 한 명의 상태가 이상했다.
'정수호 팀장님?'
당신이 거기서 왜 나와.
-아아, 그럼 루나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정수호 팀장님은 지연 양 동선만 잘 따라주시고....
걸그룹 멤버들 대신해서 무대에 오르는 매니저.
너튜브에서만 봤는데 실제로도 가능한 거였구나.
'뭔데 잘 추냐.'
무심한 듯 섬세한 춤선.
루나 못지않은 부드러운 웨이브.
마치 유연한 고릴라 같은 댄서가 아닌가.
그 동선 하나하나마다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 대단하네.'
아티스트를 위해 기꺼이 흑역사를 박제할 희생정신.
저 정도 위치에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을 법도 한데.
'그래,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미친 듯한 열정을 불태워 부산까지 왕복 세 번씩 운전했던 시절.
하이엔드 멤버를 캐스팅하고 '천재' 소리를 들었을 때도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 연예계를 떠날 때가 아닌 것 같다.
"오! 안녕하세요!!!"
순간, 정수호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손을 번쩍 들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엥? 못 봤나."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계속해서 인사를 건네는 구현식.
한편, 수호는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아 왜 자꾸 아는척하는데.'
저 사람 왜 저래.
진짜 인간적으로 영상은 찍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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