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사전 준비(4)
대본도 없이 투입된 일본 예능 <토모쿠미>.
소미는 패널들의 말투에서 묘하게 무시하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일본 예능 문화가 이런 건가.
게스트 불러서 뒤통수 때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한국 걸그룹치고는 꽤 열심히 하네요."
"개인기가 살짝 올드하긴 한데."
"그래도 크레용 짱은 가와이. 하하."
"...."
특히, 한두 명의 패널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느낌.
매니저님도 분명히 어떤 뜻을 품고 출연을 결정하셨을 텐데.
"다음 코너는 뿅망치 게임으로....."
이거였구나!
소미는 MC의 말을 듣자마자 매니저님의 그 깊은 혜안에 감탄했다.
때리고, 넘어지고, 놀리는 일차원적인 개그감.
일본의 장난은 조금 단순한 면이 있지 않은가.
1타 물리 걸그룹의 참교육을 일본에서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에이, 걸그룹이랑 뿅망치 게임은 안 된다니까요."
"맞아. 저번에 AKT 48 때 울렸잖아요."
"약한 친구들만 괴롭히는 건 미안해서...."
소미는 일본 꼰대 아재들의 말을 듣고 속으로 칼을 갈았다.
"주희 언니, 최대한 세게 때려."
"최대한? 사람 죽어."
"우리 매니저님께서 시키신 거야."
"오, 진짜?"
저기서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잖아.
뒤통수를 긁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고.
"응. 진짜야."
"옥케이."
뚜둑, 뚜둑─
이내, 양주희는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아저씨들....'
그냥 운동 컨셉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러기에는 너무 헬스에 진심인 사람이라.
곧이어, 패널들은 차례대로 나와 양주희와 게임을 진행했다.
"아오, 졌네. 그럼 내가 먼저 맞아보...."
빡─!!
뭐지, 뿅망치 말고 진짜 망치로 맞는 소리가 나는데.
"기, 기절한 거야?"
"장난하는 거지?"
".... 다음."
곧이어, 정신을 차린 패널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우소! 그거 뿅망치 아니잖아!"
"뿅망치데스."
"...."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내 MC와 패널들은 다 함께 폭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다나카 씨 맞아봐요!"
"와, 이건 혼모노다!"
"진짜 걸그룹 맞냐고!"
공포에 덜덜 떨면서도 양주희에게 뿅망치를 맞으러오는 아저씨들.
일본식 몸개그의 달인들.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찐 고통을 개그로 승화하는 패널들 덕분에 방송 분위기는 한층 살아났다.
"솔라 멤버들 솔직하구나."
"정말 매력 있어요."
"K팝 아이돌 중에 최고예요!"
소미는 패널들의 반응을 보고 누군가를 쳐다봤다.
'역시, 매니저님.'
처음부터 이 모든 게 정수호 팀장님의 계획이었지.
일본 연예계는 어떻게 분석하고 전략을 짜신 걸까.
'전부 다 예상하셨구나!'
한방컷 참교육을 당한 패널들은 온순한 고양이가 되었다.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코너를 앞두고 패널들을 정리했다.
"조만간 한국에서 신곡을 발표하신다고요?"
"네! Sunrise And Sunset이라는 곡이에요!"
"오, 그럼 안 들어볼 수가 없겠네요."
곧이어, 솔라 멤버들은 우르르 내려가 무대를 준비했다.
이어지는 신곡 홍보 타임.
패널들의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
인성교육(물리)을 받은 패널들은 다 함께 '쓰고이'를 남발했다.
대외적으로는 처음 발표하는 신곡 무대.
고작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시 K팝 걸그룹은 댄스가 격렬하군요!"
"네. 이번 안무 포인트는 고양이 춤으로...."
소미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열심히 곡을 홍보했다.
"와, 우리 방송 나가면 이미 컴백한 이후겠죠?"
"네. 한일 양국에서 동시 발표하는 거예요!"
"아이고, 영광입니다!"
정수호 매니저님은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었을까.
일본 연예계 진출로 끝날지.
아니면, 다른 해외 활동일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언젠간 미국도 갈 수 있지 않으려나.
* * *
역시 사람은 맞으면 착해지나 봐.
중간에 은서 빡칠 때마다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화가 날 때마다 손을 덜덜 떠니까 더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주희한테 맞고 나서는 촬영 분위기가 좋아졌으니까.
촬영 때 분위기가 좋으면 보통 방송도 잘 뽑히잖아.
그때, 촬영장 밖에서 솔라를 지켜보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저분 뭐지....?'
22세기에 유행할 법한 미친 패션 센스의 서양인.
이상한 옷차림 때문인지, 뒤통수가 슬슬 간지러웠다.
"헬로우."
"오우?"
다행히 상대방 국가도 영어권인 듯 말이 통했다.
"그냥 무슨 일 하시나 궁금해서 말을 걸었어요."
"누구신지...."
"아, 저는 솔라 매니저입니다."
"오오, 저 소녀들!?"
"네."
다행히 솔라 멤버들을 좋게 보는 모양이었다.
"저는 패션 디자이너 사쿠라입니다. 토모쿠미에서 가끔 패널분들 코디도 맡고 있어요."
"아하."
패션에는 문외한이지만, 범상치 않은 건 확실했다.
"이게 혹시 그 아방가르드인가 뭔가 그건가."
"오, 패션을 좋아하시나 봐요!"
".... 맞구나."
솔직히 옛날 같았으면 전혀 감흥도 없었을 텐데.
뒤통수가 간지러운 게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솔라 멤버들도 좀 더 화려한 옷을 입으면 어떨까요?"
"음, 글쎄요."
한국에선 지금이 적당해요.
"아무튼, 매니저님. 저는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잠시만요."
나는 인사와 함께 떠나려는 여인을 붙잡았다.
"사쿠라 씨, 명함이라도 주세요."
"저는 명함 없는데."
"그럼 제가 명함을 드릴게요. 나중에 연락주세요."
"정말요?"
상대는 활짝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제가 프리랜서라.... 스탭분들은 저를 신경도 안 써주시는데."
"하하, 그러기엔 패션이 너무 화려하셔서."
좋다기보다는, 특이하다는 뜻이지만.
"그럼 제가 나중에 꼭 연락드릴게요!"
"네.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명함을 받고 싱글벙글 웃으며 사라지는 디자이너.
이내, 엄지유는 슬쩍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아는 분이야?"
"아니."
"근데 왜?"
"그냥."
이유는 없었다.
그냥 패션이 조올라 특이했으니까.
하필이면 뒤통수가 간지러웠으니까.
"뭐야, 싱겁게."
나중에 두고 보면 알 수 있겠지.
또다시 내 똥촉의 승리가 될지.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수고이!"
촬영을 마치고, 스탭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멤버들.
지유와 함께 곧장 멤버들을 챙겨 숙소로 이동했다.
"얘들아, 가자."
"네에!"
일본 예능 촬영은 끝났지만, 아직 리얼리티 <솔라빔> 촬영은 끝나지 않았다.
애초에 팬서비스 개념으로 찍는 방송이니까.
온천이나 불꽃놀이 같은 소소한 장면도 그림이 됐다.
"얘들아, 모여 봐."
멤버들에게 남은 일정을 알려주었다.
"이따 루나 멤버들 오면 간단하게 게임도 할 거야."
"와, 오랜만에 시아 언니 보겠네."
"시아 언니는 쿨해서 좋아."
"탑아이돌 찍을 때도 절대 안 떨더라고."
"맞아. 맞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멤버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지난 몇 달간 열심히 준비한 곡을 내놓기 전.
컴백을 앞두고 보내는 마지막 힐링 시간이었다.
"지유야, 우리도 이제 더 바빠질 거야."
".... 원래 바빴는데?"
"그건 맞지."
곧, 숙소에 도착하고 촬영에 들어가는 멤버들.
그 모습을 슬쩍 확인하고 나서 지유에게 말했다.
"지유야, 이따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자."
"응. 좋아."
멤버들도 챙겨야겠지만, 그래도 여행이니까.
"우리도 소소하게 힐링 좀 해야지."
"그니까."
지유도 금수저가 로드 일을 하면서 고생했으니.
이제 슬슬 추가 매니저를 구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빠, 근데 태양빛 팬카페에 우리 회사 관계자도 있는 것 같아."
"관계자?"
"응. 회사 내부 정보를 막 알고 있더라고."
"...."
그게 너야.
니가 오빠한테 알려주면 그게 정보가 된다고.
"뭐,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
"응. 발표 하루 전날 정도에 미리 알더라고."
"아하."
엄재하가 은근히 밀당을 할 줄 아는구나.
"하루 정도는 기자들한테 미리 뿌리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런가."
"그냥 그런 걸로 하자."
"으음."
그나저나, 문득 촬영장에서 명함을 건넨 사람이 떠올랐다.
'그냥 평범해 보였는데....'
디자이너 이름이 사쿠라였나.
왜 그 사람을 보고 뒤통수가 간지러웠을까.
"오빠, 나는 언니들 촬영 도우미 해주기로 했는데."
"어. 그럼 가 봐."
"오키. 이따 한잔해."
"응."
일본에서 보내는 평온한 밤은 저물어갔다.
* * *
일본 스케줄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멤버들은 수많은 인파에 휩싸였다.
일본에 갈 때와 달리 돌아올 때는 정보를 숨길 수가 없었다.
"와아아아아─!!"
"예지 누나!!!"
"은서야! 여기 좀 봐줘!"
"소미 짱!"
역시, 국내에서 솔라의 인기는 걸그룹 중 최상위권이었다.
"박 실장님, 오셨어요?"
"수호야, 고생했다."
보디가드와 팀원들을 데리고 온 실장님.
우리는 솔라 멤버들을 보호하며 길을 뚫었다.
"매니저님, 괜찮아요?"
인간 바리케이드가 돼서 밴까지 이동하는 길.
그 와중에 예지는 자꾸만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제가 땀 닦아 드릴까요?"
"아니."
"그럼 물이라도 드릴까요?"
"아니."
"그러면...."
제발 그냥 조용히만 있어줘.
"겨우 다 왔네. 다들 밴에 올라타."
"네에!"
업무 환경은 좋소기업인데, 솔라 인기는 대기업급.
팬이랑 멤버들 관리하는 건 직원들의 몫이었으니.
"후우...."
이래서 드림 에이전시로 옮기려고 하지.
매니저 한두 명 충원으로 될 일이 아니야.
"수호야, 회사에서 보자."
"네. 실장님."
사라지는 팀원들을 확인하고, 보조석에 올라탔다.
얼마 전에 1본부장 날아간 이후부터였던가.
줄줄이 갈려 나가고 인력난이 더 심해졌어.
'솔라 로드 한 명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빨리 인력을 채울 필요가 있었다.
일단 채용 공고는 올려놨으니까.
"지유야, 운전해."
"알겠어."
"이제 컴백도 얼마 안 남았어."
"응. 그러니까."
솔라의 컴백 쇼케이스 무대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컴백 시기에 가장 강력한 걸그룹은 프렌즈 엔터 아닐까.
톡, 토톡─
스마트폰으로 따끈따끈한 뉴스를 확인했다.
[프렌즈 엔터, 9인조 걸그룹 <플립나인> 데뷔 임박]
'결국 아홉 명 그대로 데뷔하려나 봐.'
기사에 실린 이름에 실린 '도라희'라는 이름.
그것도 아홉 명 중에서도 비주얼 센터라니.
"고생길이 훤하겠네."
"응? 누구?"
사실, 알려주면서도 괜한 짓을 했나 걱정했는데.
"플립나인, 프렌즈 엔터 신인 걸그룹."
"아, 거기."
내 똥촉은 사이언스라니까.
과학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보자고.
"플립나인이 왜? 기자들은 대박이라고 오바하던데."
"원래 대형 엔터에서 신인 나올 땐 다 그래."
매번 4세대 걸그룹의 판도를 뒤집을 거라고 떠들었지.
솔라는 반응이 평범한 정도였는데 지금은 탑 찍었잖아.
"오빠, 그래도 플립나인은 뜨겠지."
"글쎄."
똥촉만 아니었으면 나도 긴장했을 테지만.
도라희라는 멤버가 있는 한 어림도 없었다.
"솔라 발끝에도 못 미칠걸."
"와아!"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니저님!"
"응?"
예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게 말했다.
"우리 노래가 그렇게 뜰 것 같아요?"
"어. 확실히."
중소 엔터였던 프렌즈 엔터를 단숨에 대기업으로 만든 보이그룹.
'하이엔드' 2집 타이틀곡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한 감각.
"이번 신곡 완성본을 듣자마자 삘이 딱 왔어."
"어떤 느낌이요?"
"대박의 향기."
"오오....!"
그래, 이게 바로 반드시 망할 거라는 확실한 믿음.
이제는 신앙처럼 굳어진 순도 100%의 똥촉이었다.
"SAS는 승리한다."
제목은 조금 거시기하지만.
* * *
며칠 뒤,
걸그룹 루나의 컴백 일정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얼마 후 솔라보다 보름 먼저 컴백할 예정이었다.
분명히 확정이었다.
고작 며칠 전까지는.
드르륵─
나는 노크를 두드리고 실장실 문을 열었다.
"실장님, 루나 컴백을 미뤄야겠다고요?"
"어쩔 수 없어."
"왜요?"
솔라보다 루나가 먼저 컴백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우리 회사의 루나가 솔라 때문에 묻힐 순 없으니까.
"홍보팀장님께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시더라."
"...."
솔라보다 컴백을 미룬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최소 한 달에서, 어쩌면 두 달을 미뤄야 할지도 몰랐다.
이제 10월인데, 당연히 각종 연말 무대에서 배제될 테고.
"프렌즈 엔터, 신인 걸그룹 반응이 예상보다 너무 강해."
".... 플립나인 데뷔요?"
"그래. 그거."
너튜브에 올라온 데뷔 트레일러.
조회수만 봐도 예상할 수 있었다.
"솔라 데뷔 때보다 훨씬 뜨거워."
"아직 모르는 거죠."
"아니, 솔직히 솔라 데뷔 때랑 비교도 안 될 만큼 반응이 좋아서."
".... 제가 홍보팀장님께 잘 말씀 드릴게요."
"그래. 지금 루나랑 연습실에 계실 거야."
"네. 알겠습니다."
나는 당장 실장실을 벗어나 연습실로 향했다.
'플립나인은....'
다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솔라의 데뷔 성적만큼만 나와도 루나는 묻힐 거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너희들은...."
"홍미영 팀장님."
"아, 정수호 팀장님! 마침 잘됐네."
"...."
무슨 말을 하려는 알 것 같은데.
"공지 보셨죠? 이건 마케팅으로 어떻게 해볼 수준이...."
"루나는 예정에 맞춰서 컴백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입니다."
드림 에이전시 출신 홍보팀장님.
원래부터 고집불통에 본인의 능력만 믿는 성격이었다.
나처럼 좌천된 것도 아니고 커리어를 쌓으러 왔으니.
"저도 정수호 팀장님 실력은 믿는데요. 상대는 프렌즈 엔터예요."
"플립나인 때문에 루나가 망한다는 거잖아요."
"그건."
홍보팀장님은 루나 멤버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후우.... 그래요. 솔직히 저는 무조건 묻힐 거라고 확신합니다."
"루나도 노래 좋거든요. 절대 안 묻힙니다!"
"에휴, 노래로 성공하는 바닥이 아닌 거 잘 알잖아요."
"그건 저도 아는데요."
내 뿌리 깊은 똥촉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까.
"저는 제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다. 홍보팀장님은 뭘 거실래요?"
"뭘 원하시는데요?"
"홍보팀 신입 TO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 쫄?"
쫄리면 뒈지시던지.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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