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오해받는 연예계 생활-23화 (23/200)

[23] 길조(4)

슈퍼스타는 치열한 경합 속에서 탄생한다.

첫 번째 경연장에서 1위에 오른 솔라처럼.

대중과 기자들은 <탑아이돌> 시즌 5를 이렇게 표현했다.

4세대 대표 걸그룹의 각축전.

예측할 수 없는 경쟁의 연속.

굳건했던 아이솔레이션의 위치를 갓 데뷔한 솔라가 뒤흔들었으니.

각자 두 번째 무대를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시아 언니, 우리 잘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으으, 하필이면 비걸즈 다음 무대라니...."

"괜찮아."

첫 번째 무대를 준비하는 류시아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했다.

이전 무대, 비걸즈가 받은 88점의 높은 점수를 애써 무시했다.

'이제 내려갈 곳은 없어.'

지금까지 루나는 대중들에게 인지도 있는 공연을 하지 못했다.

곧, 데뷔하고 금세 사라지는 수많은 걸그룹 중 하나가 되겠지.

'정수호 매니저님이 도와주셨으니까.'

이왕 레게를 할 거면 확실하게 준비하라는 정수호 매니저님.

대충 레게 분위기에 발만 걸치려고 했던 과거가 부끄러웠다.

레게 무대에서 중요한 손짓, 표정, 애드립.

그의 모든 취향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니.

따지고 보면 솔라의 경쟁자인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 감동했다.

"얘들아, 가자!"

"오케이!"

루나가 무대에 오르고, 준비한 음원이 흘러나왔다.

자메이카 한복판의 빈티지샵에서 나올 법한 음악.

"예에─"

예상치 못한 비트에 관객들은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신 나는 음악에 흥을 느끼고 몸을 맡겼다.

정수호 매니저의 추천이 아니었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곡.

사실, 서바이벌에서 레게 장르가 과연 통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머, 먹혔다!'

무대의 텐션은 객석의 리액션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는 법.

류시아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만족감을 느꼈다.

한때, 큐앤지 레이블 최고의 기대주가 아니었던가.

'이게 진짜 무대지.'

다른 멤버들에게 맞추고 배려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었나.

그동안 감춰왔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최고의 기회.

트레이너의 가르침도 잊고,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미친 듯이 신 나게 놀고 나서 엔딩 포즈를 마쳤을 무렵.

객석에서는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 끝났네.'

고작 5분도 안 되는 무대를 위해 하얗게 불태웠다.

객석에서 뒷목을 긁적거리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센세.'

레게 장르를 추천해주고, 지지부진한 실력을 키워준 정수호.

무엇보다,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다.

'더 열심히 성장해야 해.'

그는 솔라가 아닌, 큐앤지 레이블의 보물이니까.

루나가 더 성장하면 함께 케어해 줄 수도 있겠지.

짝, 짝짝짝짝─

계속 이어지는 관객의 박수 속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들었다.

두 번째 경연을 평가해 줄 네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독특한 장르의 무대, 잘 봤어요."

류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평가를 기다렸다.

이내, 심사위원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시즌을 통틀어서 최고의 무대였어요."

"!!!!"

상상도 못한 극찬이었다.

"아티스트로서 루나의 일면을 본 것 같군요."

곧이어, 그의 평가판에 92점이라는 점수가 올라갔다.

관객 평가단의 점수와 합쳐질 경우 더 올라갈 수도.

이내, MC는 두 팀을 스테이지 위에 올리며 다음 순서를 이어갔다.

"과연 루나는 비걸즈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이미 88점을 획득한 비걸즈와 도전자 루나.

두 팀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 * *

최대한 싼마이 느낌으로 조언해 준 레게 무대.

나는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보고 나서 확신했다.

손짓 하나라도 내 눈에 거슬리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걸.

'솔라 말고 다른 걸그룹도 통하네.'

스스로의 촉을 못 믿는다는 단점만 빼면.

그야말로, 연예계 한정 치트키가 아닐까.

'이게 주식이나 코인에도 먹혔어야 하는데.'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깨달았다.

엄씨 집안 아버지께서 왜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잘하는지도.

"지유야, 저기 태양빛 팬클럽 회원들 온 거냐."

"응. 되게 많이."

결국 해체하지 못하고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

일단 말이 통하는지 관리자랑 연락이라도 해봐야지.

"지유야, 네가 가서 저기 카페지기 번호 좀 물어보고 와."

"알겠어."

팬매니저의 역할은 팬클럽과 소통하는 것도 포함이다.

공식 팬클럽이 아닌, 사설이라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차라리 소통하는 게 낫지.'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어, 상모야."

루나의 차례라서 그런지, 상모 옆에 카메라맨이 졸졸 따라다녔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를?"

"네! 시아랑 애들한테 조언해 주셨잖아요."

"에이, 별거 아냐."

뒤통수 조금 가렵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솔직히 가르쳐주면서도 좀 미안하더라고.

'어휴, 쉽지 않아.'

내 입장에선 어떻게 해야 망할 것 같은지 알려줘야 하니까.

레게 음악을 즐겨듣는 내 귀에도 싼마이면 남들은 얼마나 별로일까.

그런 생각에, 쓸데없이 손짓이나 바꾸라고 조언하는 게 민망했는데.

"오, 점수 발표하네요!"

"설마."

진짜로 루나가 이기지는 않겠지?

비걸즈 무대를 감상할 때는 뒤통수가 가렵지 않았다.

나도 김나박이 노래를 들으면 감동하는 사람이라서.

'비걸즈는 잘했어.'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완성도 있는 무대.

그 결과 88점이라는 고득점을 받았으니.

삐비비비빅─

이내, 전광판 위에 두 팀의 스코어가 오르내리며 요동쳤다.

'내 똥촉이 실력을....'

[비걸즈 88 vs 루나 91]

이겨버렸다.

"와아아아아!!!!"

결과 발표 후,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후배는 얼마나 기쁜지 방방 뛰며 좋아했다.

"선배! 이겼어요!"

"그러게."

나도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서 있었는데.

후배는 감탄이 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선배님은 예측하셔서 안 놀랐군요!"

"...."

아니야, 놀랐어.

내 촉에 놀랐어.

"선배는 제가 아는 어떤 프로듀서보다 천재예요!"

".... 음악 전공도 아닌데."

"걸그룹 프로듀서가 꼭 음악 전공자만 하나요? 안목이 전공자보다 뛰어난데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까부터 옆에서 카메라맨 왜 찍고 있는데.

'카메라 안 치워?'

조감독은 냉큼 소감이라도 말하라고 내게 손짓했다.

내가 루나 매니저도 아닌데 왜 나보고 하라는 건지.

"어, 예. 축하드립니다. 무대 좋았어요."

".... 끝?"

"끝."

아 그만해. 계속 손짓해도 더 할 말이 없다고.

"저기 소감 발표하네요."

내 말을 듣고, 조감독이 시선을 돌린 방향.

류시아는 울먹거리면서 소감을 발표했다.

"따뜻한 조언을 해주신 정수호 매니저님께 정말 감사드리고...."

누가보면 이번 경연에서 우승한 줄 알겠네.

* * *

예지는 시아의 소감 발표를 들으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릴 적 여동생에게 아끼는 인형을 빼앗겼을 때.

루나와 솔라로 나뉘면서 데뷔일이 미뤄졌을 때.

'그리고 지금....'

매니저님에게 감사를 표하는 루나의 리더를 보면서.

마음 한쪽에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한 감정을 느꼈다.

"얘들아, 우리 더 열심히 해야겠다."

"어우, 그러게. 루나가 이렇게 잘할 줄이야."

"...."

단순히 이번 무대뿐만이 아니야.

앞으로도 반드시 잘 해내야만 해.

유능한 매니저가 더 높은 '급'의 연예인을 케어하는 게 상식이라.

정수호 매니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어떻게 91점을 이기지?"

"우리 저번에 몇 점이었더라."

".... 85점."

"아."

<탑아이돌> 시즌 5 무대 중 최고의 점수가 터진 루나의 경연.

혹시 무대에서 실수라도 하면 엄청난 점수 차로 질 수도 있었다.

똑, 똑─

그때, 대기실 문밖에서 스탭이 노크를 두드렸다.

"솔라 멤버들, 바로 준비하실게요!"

".... 이겨야 해."

예지의 중얼거림을 듣고, 주변 멤버들이 반응했다.

"모야, 그냥 무대를 즐기면 된다며."

"소미야, 즐기는 건 게임 할 때 즐겨야지."

"아까는 언니가 분명히...."

소미는 광기에 가득 찬 예지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소심해서 입도 뻥끗 못 하는 다이애나의 손을 꼭 붙잡고.

그때, 은서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우리가 이겨야지. 누가 지려고 무대에 서나?"

"역시, 우리 둘째. 자세 아주 좋아."

"굿."

리더는 은서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그녀는 맨몸 운동 중인 주희에게 다가갔다.

"주희야, 당연히 이길 거라서 힘 빼는 거지?"

"아....?"

"끄치?"

"엉?"

예지는 셋째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동공에 섞인 광기를 보고 누가 아니라고 답할까.

"그르치."

물리적인 신체의 강함도 진짜 광기 앞에서는 한낱 피륙에 불과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승부욕을 보이는 예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자세와도 같았다.

"제군들, 루나 떡락시키러 가즈아!"

"가즈아!"

걸크러쉬를 깨트릴 다섯 명의 워리어.

이 자리에 청순 걸그룹 솔라는 없었다.

잠시 후,

소녀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솔라의 멤버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Anna with D.

맞디스 배틀 때 사용한 다애아나의 시그니쳐 사운드.

서태성과 합작한 그녀의 비트가 무대에 울려 퍼졌다.

어두운 배경 속, 눈부신 조명이 다섯 군데를 비추고.

예지의 청아한 음색은 도입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내, 방청객들은 솔라의 파워풀한 퍼포먼스에 눈을 사로잡혔다.

'나왔다.'

이내, 양주희는 무대 중앙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오직 메인댄서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45초간의 브레이크 댄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비트에 맞춰 윈드밀로 기선을 제압했다.

저 자세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동안 들어 올린 무게가 얼마일까.

연습실 불이 꺼져도 혼자 남아 브레이킹 연습했던 양주희.

오늘 화려한 무대 위에서 그 결실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잘하네, 우리 셋째.'

예지는 정말 열심히 노력한 셋째에게 미소를 짓고 시선을 돌렸다.

객석 중앙, 카메라 옆에 뒷목을 긁적이며 앉아있는 사내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감상하는 모습.

'우리 매니저님.'

걸크러쉬가 취향이셨구나.

미리 말씀을 좀 해주시지.

* * *

내 취향은 전혀 아닌데 가볍게 이겼다.

"솔라.... 95점!"

MC 이수연은 중립을 잃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사실상, 루나 팬들을 제외하면 전부 만점을 준 셈이었다.

"어떻게 이런 점수가 나올 수 있죠!?"

아까 루나를 칭찬했던 심사위원들은 태세 전환을 하며 솔라에게 극찬을 퍼부었다.

"와, 진짜 오늘 역대급 무대가 계속 나오네요."

"눈과 귀가 즐겁군요."

"큐앤지 레이블이 걸그룹 명가였군요."

"저는 제트킥만 있는 줄 알았네요."

"아하, 여기 여왕님 소속사였군요! 어쩐지."

"그럼 이해가 되는군요."

여왕님은 세계관만 만들고 관심도 없어요.

지금 혼자 앨범 작업 중이라고 들었는데요.

솔라 멤버들은 졌지만 잘 싸운 루나와 포옹을 나누었다.

<탑아이돌> 두 번의 경연에서 연속 1위.

모든 시즌을 통틀어 최고점을 받았으니.

"축하드려요, 선배님!"

"...."

좋은 무대를 꾸민 건 어디까지나 멤버들.

솔라의 앞에 항상 길조만 들기를 바랐다.

더 노력해 봐야지.

"아직 많이 부족해."

"아니, 95점인데 아직도 부족해요?"

"...."

이번 무대 말고.

.

.

.

.

.

.

그날 저녁,

나는 멤버들을 숙소에 데려다 주고 밴에서 내렸다.

당장 내일 있을 스케줄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특히, 예지랑 은서는 배우 오디션을 돌아야 했으니.

"저기, 매니저님."

"응?"

예지는 헤실헤실 웃으며 내게 질문을 건넸다.

"오늘 좋은 날인데 회식하면 안 돼요?"

"걸그룹이 무슨 회식이야."

"그럼요?"

"샐러드 먹어."

"아."

유독 술을 좋아하는 은서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솔직히, 내일 스케줄만 없으면 동의할 수 있겠지.

"우리는 매니저님께 감사해서 회식하자고 한 거예요."

"나한테?"

"네! 매니저님 덕분에 95점 받았으니까!"

"너희가 잘했지."

<탑아이돌>에서 보여준 강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의 소녀들.

눈앞의 아이들이 요즘 화제성 최고를 달리는 걸그룹이 되었으니.

'진짜 많이 컸네.'

내심을 숨기고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지랑 은서는 내일부터 오디션 준비하자."

"오디션이요?"

"응. 배우 오디션."

"엥, 아직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 남았잖아요."

"세 번째 무대는...."

사실상, 이미 최고점을 찍은 솔라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잘해도 오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으니까.

"나머지 세 명이 준비할 거야."

"...."

오히려 두 명이 빠져서 더 잘 됐지.

점수가 떨어져도 명분은 있으니까.

"두 명 다 오디션 붙으면 회식 생각해볼게."

"오오, 좋아요!"

"자, 그런 줄 알고 다들 들어가서 자라."

"네에!"

뒤돌아서 걸어가는 작은 소녀들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동안 내가 키운 아티스트 중 이렇게 성공한 적이 있었나.

그것도 이미 스타가 아니라 내가 직접 키운 스타라는 게.

".... 역 베팅."

그냥 '감'으로 걸그룹을 키우는 인간이 나 말고 또 있으려나.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조금만 거슬리면 뒤통수가 가려웠다.

"흐음, 은근히 치밀하셔."

"아 뭐야."

그때, 은서가 헤헤 웃으며 검은 봉투를 스윽 들어 올렸다.

"먹을 거 샀구나."

"네. 이렇게 오래 감시하실 줄은 몰랐죠."

"...."

그냥 서 있었던 거야.

그래도 술은 안 샀네.

"아우, 알았어요. 조금만 먹으면 되잖아요."

".... 들어가서 언능 자."

"매니저님, 오디션은 저 때문에 하시려는 거죠? 제가 연기 욕심 있다고 해서."

"응? 아닌데?"

드림 에이전시에서 시킨 거야.

"치, 그렇게 말 안 해도 다 알아요."

"...."

진짜 아닌데.

* * *

다음 날,

드림 에이전시에서 추천받은 오디션 연습용 대본을 전달받았다.

SBC 방송국 법정물 감성 드라마.

이수연이 물밑 작업 중이라던데.

"수호야, 본부장님이 찾으신다."

"요즘 자주 찾으시네요."

"무대 잘했다고 격려 차원이지."

"근데요."

나는 박 팀장님께 받은 대본을 들고 대화를 이어갔다.

"팀장님, 이거 이수연 배우 출연합니까?"

"글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던데."

"...."

자꾸 뒤통수 가려운 게 심상치 않아.

작가가 유명해서 이름값을 하는구나.

"혹시 팀장님도 대본 읽어보셨어요?"

"어. 대본 괜찮던데?"

"...."

저도 개인적으로 재미는 있는데요.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아뇨. 그냥."

너무 재밌어서.

그게 문제예요.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