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오해받는 연예계 생활-24화 (24/200)

[24] 여배우(1)

나는 어릴 때부터 점이나 무속인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친할머니께서 그쪽 일을 하고 계셨음에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이제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팀장님, 혹시 과학을 믿으세요?"

"뭔 개소리야."

내가 미신은 잘 안 믿어도 과학은 믿거든.

고작 대본을 읽었을 뿐인데 촉이 왔으니.

"이거 오디션 그냥 접어요."

"...."

이수연이 주연으로 출연할 수도 있는 SBC 드라마.

「국제변호사 김씨」 대본을 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거 본부장님이 어렵게 가져온 오디션 기회야."

"제가 이따 만나뵙기로 했으니까."

"네가 한번 말해보게?"

"아뇨. 팀장님이 별로라고 했다고 전해드릴게요."

"뭐, 인마?"

어쩌면 명목상 오디션일 뿐, 합격 보장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겠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라서.

"제가 한번 다른 작품 찾아볼게요."

"하아, 난 모르겠다."

이내, 박철민 팀장님은 본인 자리의 서류 한 더미를 가져왔다.

그 양을 보니, 오전 내내 읽어도 다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솔라 앞에 들어온 대본이랑 시놉시스."

"음, 장난 아니네요."

"그치? 한 번씩 읽어봐."

"...."

솔라 멤버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버스 탑승러들.

이렇게 대충 쌓아놓은 작품들이 영양가가 있을까.

"흐음."

나는 대충 위의 작품을 들고 천천히 읽었다.

"뭐야, 예능도 있었네."

드라마 대본뿐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준비했다.

대충 머리 써서 방탈출하는 예능 프로그램인데.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어차피 <탑아이돌> 끝나면 더 들어올 테니.

그때 천천히 생각해 봐도 전혀 늦지 않는다.

스윽─

그러던 중,

어느 웹드마라 시놉시스를 읽으며 멈칫했다.

뒤통수에서 근질근질한 감각이 밀려들었으니.

"웹드라마.... 이게 맞나."

정확히 예지를 콕 찍어서 캐스팅하고 싶다고 어필한 대본.

굳이 수락하기에는 '급'이 너무 떨어져서 마음에 안 들었다.

선입견이 생겨서 그런지 대본도 조금 유치한데.

50만 구독자의 너튜브 채널.

여기 출연하는 게 맞는 건가.

".... 일단 킵."

이후, 다른 대본을 살피며 은서에게 맞는 작품을 찾았다.

'뭔가 확 땡기는 게 없네.'

오전 내내 대본을 확인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찰나.

한 작품을 보고 익숙한 감각이 뒷목을 간지럽혔다.

JTBS 방송국 「재벌가 시집가기」.

대략 일주일 뒤에 공개 오디션이 있는 멜로 감성 드라마.

부티나게 생긴 은서의 이미지랑 맞을 것 같은 배역이었다.

남자 주인공 여동생.

서브 주연급이었네.

"아, 근데...."

워낙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공개 오디션이라 일반인 참가자도 많을 테고.

'혹시 떨어지면?'

굳이 인기 걸그룹 멤버가 오디션을 봐야 할까.

다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고 나가서 떨어지면.

'.... 연기도 너무 어렵겠어.'

재벌인데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라서.

은서가 과연 알바하는 재벌녀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지.

시급 만 원 받고 뽀르쉐 끄는 재벌이라니.

현실에는 이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뭐, 어쩔 수 없지.'

뒤통수에서 스멀스멀 밀려오는 간지러움.

가기 싫어도 직진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것도 킵."

그때, 뒤쪽에서 박철민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수호야, 본부장실 가야 할 시간 아니냐?"

"아, 네. 가려고 했어요!"

"얼른 가. 늦을라."

"네!"

JTBS 오디션용 대본을 힐끗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물 드라마랑 오디션 날짜가 정확하게 겹쳤으니.

'하나는 포기해야지.'

* * *

좋소기업의 경영진은 어떤 삶을 살까.

한때, 권석동 2본부장의 주량은 소주 1병뿐이었다.

허나, 먹으면 먹을수록 느는 게 술이고 뱃살 아닌가.

"아 숙취.... 죽겠네. 진짜."

솔라가 크면 클수록 행복한데 간이 고생해.

어제는 대표님이 불러서 격려도 해주셨으니.

"아 근데 양주는 못 먹겠네."

띠링─

또다시 공세원 실장이 스케줄 메시지를 보냈다.

[엔넷 예능국장님이랑 술자리 있습니다]

[오늘 저녁 10시입니다]

".... 또?"

그저께도 먹었는데 1등 했으니 또 먹겠네.

저녁 10시 약속이면 밤새도록 달리겠구나.

"후우...."

직속 부하는 사장님 낙하산, 그 밑은 헬창 빡빡이, 그 밑은 미친 천재 매니저.

누구 하나도 편하게 상대할 수 있는 부하 직원이 없어서 하소연도 못 하겠다.

"그래도 실적은 좋아서."

그동안 1본부장 재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나댔나.

매번 쩨트킥 자랑하는 게 얼마나 눈꼴 시리던지.

똑, 똑─

그때, 아침에 호출한 매니저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흠흠, 들어오게."

요즘 한창 열일하는 정수호 매니저.

아침에 들어온 광고 때문에 불렀다.

"본부장님, 부르셨습니까?"

".... 광고 하나 들어왔어. 죽이는 걸로."

"오, 이온음료? 화장품?"

"소주."

"아하."

<탑아이돌>을 걸크러쉬 무대로 찢었다는 소문이 방송가에 돌아다녔으니.

'방송 나가면 인기 또 오르겠네.'

이 사람이 딱 일주일만 쉬었으면 좋겠다.

그럼 당분간 술 약속은 없어지지 않을까.

"솔라가 잘 되니까 아주 간이 좋구만."

"네?"

"아니, 간 말고 기분이 좋다고."

"넵. 감사합니다!"

"자네는 휴가도 안 쓰나? 너무 열심히 해."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그보다, 본부장님."

"어, 그래."

"SBC 국제변호사 김씨, 오디션 잡혔던데요."

".... 그건 왜?"

최근에 어렵게 구한 오디션 자리.

그 기회를 따려고 술자리를 몇 번씩 불려 갔는데.

스타 작가의 작품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같은 날 JTBS에서도 오디션이 있어서요."

"SBC는 포기하려고?"

"....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네, 이 오디션을 포기하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힘들게 먹은 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매몰비용이 된다는 뜻이지.

"후우, 맘대로 하게. 자네 선택은 항상 정답이었으니."

"....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그나저나, 천재의 눈에는 단점이 보였다는 뜻일까.

겉보기에는 꽤 괜찮은 대본이었는데 문제가 있나.

'후우, 이제 JTBS 국장이랑 술 약속 잡아야겠네.'

권석동 본부장은 수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간이 더 상하면 상할수록 실적은 올라간다.

젊은 것들은 이걸 웃픈 상황이라고 한다지.

* * *

아씨, 그냥 박 팀장님 핑계 댈 걸 괜히 나댔네.

열심히 구해오신 오디션을 버린다고 했으니.

'눈빛이 아주 그냥.'

그러고 보니까 저번부터 벼르고 계셨던 것 같아.

맞디스로 불렀을 때는 레드와인 덕분에 넘어가서.

'후우, 사회생활 어렵다.'

다음에 양주라도 한 병 선물해 드려야지.

얼핏 봐도 술에 환장하시는 것 같더라고.

드르륵─

연습실 문을 열고 두 팀으로 나뉜 멤버들을 확인했다.

<탑아이돌>의 마지막 세 번째 경연을 준비하는 A팀.

SBC 드라마 「국제변호사 김씨」 오디션을 준비하는 B팀.

"매니저님 오셨어요?"

언제나 예의 바른 예지의 인사를 받으며 멤버들을 불러모았다.

"얘들아, 모여 봐!"

"네에!"

잡다한 광고는 거절하다 보니, 드디어 들어온 첫 번째 광고였다.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이미지.

그 어려운 걸 솔라가 해냈다.

"너희 광고 들어왔다."

"오오, 대박!"

업계 탑급 걸그룹만 찍는다는 소주 광고.

하지만, 제일 기뻐하는 소미는 예외였다.

"근데 소미는 출연 못 해. 나머지 네 명만."

"아, 그런 게 어딨어요!"

"소주 광고야."

"워후."

광고라는 말에도 시큰둥했던 은서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럼 그날 술 엄청 먹겠네요?"

".... 먹겠냐?"

"아."

당연히 물을 소주처럼 먹는 거지.

"좋다 말았네."

우리 은서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원래 사는 게 고달프면 술이 먼저 떠올라.

"술 좀 줄이자."

"네에~"

어느새 소미는 삐쳐서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렇다고 미성년자가 소주 광고를 찍을 순 없잖아.

"매니저 오빠는 나만 미워해."

"소미야, 내가 예능이라도 알아볼게."

"진짜요?"

"응."

최근에 들어온 예능 중에 괜찮은 작품도 여럿 보였다.

<탑아이돌> 첫 방 때 퍼즐 푸는 모습도 잘 나왔으니.

'방탈출 예능.'

불현듯 오전애 본 예능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거기선 소미가 매력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미팅 돌면서 뒤통수 간지러운 걸로 잡아볼게."

"뒤통수?"

"대충 느낌 좋다는 뜻이야."

"알겠어요."

"대신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는 네가 캐리해."

"오케이, 콜!"

예지가 빠져서 서브 보컬인 소미의 역할이 중요했다.

일단 고음만 놓고 보면 오히려 예지보다 높았으니까.

트레이너 평가에서 항상 중간을 유지하는 소미.

루나까지 아홉 명의 연습생 중에선 5등이었는데.

솔라 멤버 다섯 명 중에선 꼭 3등만 기록했으니.

'혹시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스윽─

나는 가방을 뒤져 아까 챙겨온 대본을 꺼냈다.

JTBS 방송국 멜로 드라마 「재벌가 시집가기」.

"은서야, 이거 받아."

"뭐예요?"

"이제부터 이거로 연습해."

".... 오디션 날짜 겹치네요."

"맞아."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받았다.

"이 작품이 뜰 것 같다는 거죠?"

"맞아. 근데 공개 오디션이라 일반인 참가자랑 경쟁해야 해."

"그럼 열심히 해서 붙어야죠."

"괜찮겠어?"

"당연하죠."

사실, 이게 뜰 거라는 확신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느낀 똥촉 하나뿐인데.

그래도 멤버들은 나를 믿어주었다.

"저기, 매니저님."

"응. 예지야."

"저는요?"

아무리 그래도, 솔라의 리더님인데.

웹드라마를 추천해주기 좀 미안해서.

"그거, 손에 들고 있는 대본 제 거예요?"

"어? 아, 그게...."

"저 주세요."

예지는 내 손에 들린 웹드라마 대본을 가져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솔라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메인 보컬.

팬들이 알면 억장이 와르르 무너질 텐데.

"예지야, 그냥 내가 다른 거 다시...."

"재밌는데요?"

"응?"

"매니저님이 골라주신 거잖아요. 역시 재밌어요!"

"...."

나는 재미없던데.

"저 이거 할래요!"

"웹드라마, 괜찮겠어?"

"그럼요."

50만 너튜브 채널 주인만 계탔네.

조만간 100만 구독자는 찍겠구나.

* * *

SBC 방송국 미팅룸.

이수연은 드림 에이전시 직원과 함께 방송국에 입장했다.

법정 드라마 「국제변호사 김씨」 계약을 위한 방문이었다.

이게 대체 몇 번째 방문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슬슬 도장을 찍을 때도 됐는데.

"실장님, 이 정도 조건이면 그냥 가시죠."

"아니, 이번 기회에 확 올려야지."

"...."

몸값 올려주겠다는데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노릇.

확실히, <탑아이돌> 효과는 대단했다.

개런티가 눈에 띌 만큼 차이가 났으니.

'이번 드라마만 끝나면 나도 영화 쪽을....'

행복한 상상을 하던 그때, 실장이 다시 말을 걸었다.

"수연아, 정수호 매니저 말인데."

"정수호 매니저? 왜요?"

"여기 드라마 출연 포기했다더라."

"엥? 오디션 잡았다면서요."

"그랬었지."

SBC 드라마는 비공개 오디션 기회.

대사를 절지만 않으면 합격할 텐데.

당연히 같이 출연할 거라고 예상했다.

솔라 멤버들에게 유감은 없어서 잘해줄 생각이었다.

함께 <탑아이돌>에 출연하면서 나름 정이 들었으니.

"법정물이니까, 연기가 너무 어려웠을 수 있죠."

"글쎄. 더 신기한 게 뭔지 알아?"

".... 뭔데요?"

"JTBS 공개 오디션 나간다더라. 큐앤지 직원한테 들었어."

"재벌가 시집가기?"

"어. 그러고 보니 우리한테도 들어왔던 거네."

"...."

비공개 오디션을 포기하고 공개 오디션에 나간다니.

이전의 정수호였으면 역시 똥촉이라고 놀렸을 텐데.

드르륵─

그때, SBC 방송국 측 직원이 인사를 하면 나타났다.

"아이고, 이수연 배우님 오셨습니까?"

"아, 네."

"이렇게 오실 줄 알았으면 더 좋은 곳에서 봤을 텐데요."

"아뇨. 괜찮아요."

수연은 대충 대답을 하면서 정수호 매니저를 떠올렸다.

솔라의 실력을 키우거나, 곡을 고르는 안목.

드림 에이전시 시절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루나까지....'

서태성 프로듀서와 안무가 레드와인의 극찬도 모자라서.

전문가도 예측할 수 없는 무대의 결과를 전부 맞췄으니.

"자, 이 정도 조건이면 만족하시겠죠?"

"오, 출연료를 이렇게 올려주시게요?"

"그럼요. 이수연 배우님이 직접 오셨는걸요."

"하하하. 오늘은 계약을...."

귓가에서 누군가 '수연아, 또 속냐.' 라고 속삭이는 듯했지만.

실장님이 계약서에 사인하기 직전.

수연은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남에게 의존하는 성격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심각한 선택 장애.

다시 한번 병이 도졌다.

"저기, 일정 맞추려면 이번에는 꼭 사인을 해주셔야...."

"정말 죄송해요."

딱 한 번만 더 미팅을 미루고 싶었다.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내, 수연은 미팅룸을 벗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었다.

'정수호....'

항상 그를 무시하면서도 그의 실력을 의식했다.

<탑아이돌> 촬영 중에도 겨우 눈인사만 했던 사이.

이 중요한 순간에 왜 그의 생각을 물어보고 싶을까.

뚜루루루─

수연의 전화기에서 수신음이 흘러나왔다.

".... 차단당했나?"

아 내가 차단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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