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길조(3)
<탑아이돌> 첫 경연이 공개된 이후,
솔라는 단숨에 모든 포탈 사이트에서 화제성 1위를 점령했다.
특히, 다이애나는 프로듀싱과 맞디스곡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사실, 대충 이렇게 넘어가는 건가 싶었는데.
팀장님이 보낸 톡을 보면 쉽지 않을 듯했다.
[출근하면 바로 본부장실에 들러]
[본부장님 지시야]
'어휴, 너무 욕이 상스럽긴 했지.'
한숨을 내뱉고, 멤버들과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독단적으로 판단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져야지.
"얘들아, 선생님 오실 때까지 연습하고 있어."
"매니저님은요?"
"나는 갈 데가 있어."
"빨리 오세요!"
"그래."
멤버들을 뒤로한 채 굳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순 걸그룹의 욕설 섞인 맞디스곡.
솔직히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래도, 불안할 때 뒤통수가 간지러우면 100% 역배각이니까.
"역배는 승리한다."
터벅, 터벅─
본부장님의 호출을 받고 불려 가는 길에도 마음은 굳건했다.
내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심호흡을 내뱉었다.
"후우, 좀 혼나면 어때."
언젠가 결과는 좋을 테니까.
역배와 존버는 공존하잖아.
똑, 똑─
잔뜩 긴장한 상태로 본부장실에 노크를 두드렸다.
학생부에 끌려가는 학생처럼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어, 들어오게."
큰 결심을 하고 문을 열었을 때, 낯선 여인이 함께 앉아있었다.
"음, 본부장님?"
"인사하게. 이쪽은 홍주, 활동명 레드와인."
"안녕하십니까."
"흐음."
화려한 복장에 진한 화장이 인상적인 여인.
레드와인은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쪽이군요? 솔라의 아버지."
"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말씀이 조금 심하시네.
솔라 아버지는 제가 아니라 각자 따로 있겠죠.
잘그락─
그녀의 목에 걸린 큼지막한 목걸이에서 소음이 발생했다.
'레드와인이 왜 여길....?'
비걸즈의 춤 선생으로 알려진 유명 안무 창작가.
걸그룹 댄스계에선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유했다.
"다이애나, 맞디스곡 때문에 관심이 생겨서요."
"네?"
"저는 걸크러쉬 아니면 상대 안 하거든요."
"...."
솔라에게는 실로 엄청난 기회였는데.
청순 걸그룹 이미지는 점점 멀어졌다.
"두 번째 경연 무대, 그림 한번 만들어보죠."
"넵, 감사합니다!"
브레이킹을 커버하는 댄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기존 트레이너도 주희를 가르치는데 한계가 있었으니.
"본부장님, 그럼 저를 부르신 건...."
"아, 잘했다고."
"네?"
"아주 잘했어. 그냥 이대로만 하게."
"넵."
혹시 혼내려고 불렀는데 태세 전환한 게 아닐까.
"자, 그럼 멤버들부터 확인해 볼까요?"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그럼요."
드르륵─
곧장 레드와인과 함께 본부장실을 나와 연습실로 향했다.
"오늘은 일단 제가 멤버들 실력만 보는 걸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추천해준 사람이 누군지 추측했다.
턴업 레코즈 아티스트들과 자주 협업하니까.
"저기, 혹시 서태성 프로듀서님 추천으로....?"
"맞아요. 제가 부탁한다고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네. 그렇죠."
이래서 인맥은 쌓으면 쌓을수록 누적된다니까.
한 다리 걸치면 유명한 사람들과 계속 맞물려서.
"매니저님, 제가 첫 번째 경연 방송을 봤는데요."
"탑아이돌이요?"
"네. 모든 조 결과를 다 맞히셨더라고요."
"음, 제가 그랬죠."
그땐 내가 봐도 역배각이 딱 섰으니까.
질 것 같은 팀이 진짜 다 이기더라고.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오늘 트레이닝도 한번 보실래요?"
"네. 저야 좋죠."
그때, 솔라의 옆 연습실에서 레게풍 비트가 흘러나왔다.
".... 루나."
진짜 레게 음악으로 경연을 준비하려나 본데.
그저 나한테 추천 장르를 구한 것뿐이었지만.
"응? 저쪽도 탑아이돌 출연자죠."
"네."
"와, 레게 음악이라니. 도전 정신인가."
"...."
왠지 내 책임인 것 같아서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홍주님, 저는 여기 잠깐만 들를게요."
"그래요. 저는 먼저 솔라 멤버들이랑 인사하죠."
"네. 감사합니다."
똑, 똑─
류시아를 필두로, 레게풍 댄스곡을 연습하는 루나 멤버들.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칼군무가 정박에 떨어졌다.
"오, 정수호 매니저님."
"네. 시아 씨."
"장르 추천해주셨다고요. 감사해요!"
"...."
내 똥촉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불안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것.
지금 루나의 연습을 볼 때는 둘 다 해당하지 않았다.
"조금만.... 제가 조언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정말요? 그럼 감사하죠!"
"연습한 거 다시 보여주세요."
"네에!"
일개 매니저의 조언을 수용할지는 그녀들의 선택이었다.
* * *
홍주는 근육 몬스터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가르쳤을 뿐이었는데.
설마 이것도 따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동작을 보여주면.
"음, 그 부분 관절 쓰는 게 너튜브에서 배운 거랑 다르네요."
"어쩔 수 없어. 여자 힘으로 이 정도가 한계야."
"흐음."
뚜두둑─
양주희는 손목을 꺾으며 에어트랙 자세를 선보였다.
전문 B-girl들도 어려워하는 자세를 쉽게 할 줄이야.
'와우, 이미 완성형 댄서였네.'
자세를 제대로 잡아주니 완벽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였다.
아니, 오히려 여태까지 잘못된 자세로 어떻게 연습했는지.
'.... 근육.'
유연하고 단단해서 다칠 일은 없으니까.
그냥 막무가내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어.
이렇게 무식하게 연습하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와,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많이 배우네요."
"원래 자세가 많이 틀어지는 편이야?"
"아뇨. 너튜브 보고 배우는데 한계가 있어서. 헤헤."
".... 독학?"
"네."
세상에, 그럼 혼자 영상으로 이런 실력을 키웠다는 건가.
앞으로 두 번째 경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때까지 자세만 틀어지지 않게 잘 잡아준다면.
'걸그룹 중에서 최초.... 일까.'
여자 댄서 중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운동한 사람은 드물었다.
걸그룹계에서 전무후무한 댄스 천재가 나오겠어.
댄서와 걸그룹의 경계를 화끈하게 무너뜨릴 수도.
'보면 볼수록 솔라는 재밌네.'
이러면서 걸크러쉬가 아니라고?
굳이 이런 멤버 구성으로 왜 청순 걸그룹 타이틀을 걸고 나왔을까.
설마 정수호 매니저가 그 엄청난 안목으로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드르륵─
마침, 정수호 매니저는 연습실에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제가 늦었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미 다이애나 맞디스곡으로 반전매력을 보여주었으니.
이번 두 번째 경연에서 걸크러쉬로 전향할 생각이구나.
"매니저님, 의도는 잘 알았어요."
"네?"
홍주는 오디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음악을 틀었다.
서태성과 다이애나의 공동 작곡, 「Get up, Beat up」
"이 음악으로 대중에게 증명하려는 거잖아요."
"무슨....?"
"진짜 걸크러쉬가 무엇인지."
"???"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3세대 걸그룹 '블루숄츠'.
걸크러쉬 끝판왕에게 내미는 도전장이 아닌가.
"제가 도와드리죠."
"...."
월드 클래스로 향하는 길목은 언제나 열려있으니까.
음색 깡패와 비트 메이커, 브레이킹 천재까지.
이 정도 준비면 요리할 재료는 충분히 모았다.
<탑아이돌> 경쟁자들은 가벼운 안줏거리도 안 되겠지.
다른 팀을 철저하게 짓밟고 4세대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
'블루숄츠한테 도전하려고!'
정수호 매니저는 어디까지 멀리 내다보고 있을까.
* * *
일주일 뒤, 두 번째 경연의 날 아침이 밝았다.
이번 경연에서는 중간만 갔으면 좋겠다.
저번에 기대치를 너무 높여 놓은 것 같아.
"으아, 오빠."
"어. 지유야."
"요즘 스케줄 넘모 많앙. 으앙."
".... 좀만 참아."
내가 봐도 살인적인 스케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탑아이돌, 세 번째 경연까지니까."
"이제 앞으로 보름 남은 거야?"
"뭐, 그 정도?"
그동안 <탑아이돌>은 세 번의 경연을 끝으로 시즌을 종료했다.
잘나가는 아이돌 여덟 팀을 그리 오랫동안 캐스팅할 순 없으니.
"일단 이번 경연만 끝나면 시간 널널할 거야."
"진짜?"
"...."
아니, 사실 그 뒤로 더 바빠질 것 같아.
지금도 계속 섭외 전화가 들어오더라.
더군다나, 다음 무대에선 솔라의 완전체로 활동할 수 없을 것 같다.
회사는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걸 다 보여줬다고 판단했으니.
"슬슬 연기시키려고 하더라."
"벌써?"
"드림 에이전시에서 푸시하나 봐."
"으음."
화제성 최고점을 찍을 때 몸값이 가장 비싸니까.
지금 당장 좋은 배역을 따내야 한다는 의도였다.
'얘들도 손해 볼 건 없지.'
모회사에서 얼마나 장기적으로 솔라를 키울지는 모르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걸그룹보다 배우가 수명이 높았다.
연기력만 있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연기할 수 있어서.
".... 탑아이돌 버려?"
"투 트랙으로 가야지. 네가 고생 좀 해."
"아."
예지랑 은서는 걸그룹 중에서도 비주얼 멤버라.
그 두 명은 오디션에 데리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지금 솔라 정도면 그냥 조연 꽂아주려는 감독도 있을 텐데."
"아이돌 끼워팔기? 나는 반대야."
"그런가."
"배우는 첫 작품이 커리어의 반이야."
"...."
롱런하는 대배우들은 첫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대로 된 감독과 작가가 있는 드라마에 들어가고 싶다.
"지금 내려온다."
이내, 샵에서 솔라 멤버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나왔다.
"매니저님, 오래 기다리셨죠?"
"매니저 오빠 하이!"
"안녕하세요."
다들 한껏 꾸미니까 눈 부시게 예뻐졌다.
특히, 비주얼 멤버들은 걸그룹 최상위권.
이러니, 회사 측에서도 연기 쪽에 욕심을 부리는 거겠지.
"형님, 요즘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음, 그치."
양주희는 특히 연습 시간이 길어서 볼멘소리를 낼 만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힘들지?"
"네.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근손실 나요. 죽을 것 같아."
"아, 근손실.... 그게 죽을 정도야?"
"당연하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런 기분이에요."
"...."
진짜 모르겠다. 헬창의 삶이란 뭘까.
매니저 극한직업이었네.
그런 것도 공부해야 하나.
"너는 운동을 왜 하는 거니?"
"흠, 차라리 숨을 왜 쉬는지 물어봐요."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빨리 타자. 시간 없어."
"예압!"
몇몇 팀들은 이미 엔넷 방송국에 도착했다고 들었다.
* * *
엔넷 방송국.
이수연은 오늘의 대본을 확인하며 매니저와 대화를 나눴다.
"주연급 배역이 또 들어왔어?"
"응. 이번엔 JTBS 드라마."
"흐음."
배우의 '급'이 꼭 연기를 통해서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인기 예능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경우에도.
"와, 전성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게. 탑아이돌은 진짜 잘 나왔어."
"...."
문득, 매니저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수연, 그거 들었어?"
"뭐를"
"요즘 회사에서 솔라 배우로 키운다고 하더라."
".... 배우?"
그럼 정수호가 다시 배우를 키운다는 뜻이잖아.
걔들처럼 청순가련 원툴로 미는 아이돌이 무슨.
"참나, 연기판이 만만한가."
"에이, 솔라 요즘 제일 잘 나가지."
"솔라 말고."
그래. 솔직히 걸그룹 키우는 실력은 인정.
이 정도로 성장한 게 우연일 리는 없겠지.
"작품 보는 눈이라는 게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야."
"그런가."
"그냥 타고나야 한다니까."
"그건 맞지."
가끔 기가 막힌 선구안을 가친 천재들도 존재했다.
지금의 드림 에이전시를 세운 대표가 그 예시였다.
'배우는 진짜 아무나 못 키워.'
특히, 정수호의 안목은 이미 수차례 겪어보지 않았는가.
반드시 성공할 작품도 말아먹는 천재적인 똥촉.
그 실력으로 연기판에 다시 발을 들이려고 하네.
똑, 똑─
그때, 밖에서 스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연 씨, 스탠바이 하실게요!"
"네에!"
이내, 수연은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는 대본만 정리해. 무슨 작품이 좋을지 내가 직접 볼 거야."
"알겠어."
또각, 또각─
곧이어, 이수연의 하이힐 소리가 엔넷 촬영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벌써 스테이지에 모인 여덟 팀의 소녀들.
그중, 유독 눈에 띠는 그룹은 두 팀이었다.
저번 경연 때 최고 성적을 낸 솔라.
춤으로는 최고로 평가받는 비걸즈.
이번에도 솔라가 이기면 당연히 파급력은 엄청나겠지.
그러면, 명실상부 4세대 최고의 걸그룹에 오를 것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
수연의 진행과 함께 두 번째 경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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