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1화. >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삼현 그룹 총 회의실.
일상적인 연말 보고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장내에 흐르는 적막과 분위기는 흉흉했다.
어느 것 하나 이건의 마음에 드는 보고가 없었다. 대한민국 경제와 더불어 아시아 경제가 흔들리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건.
그나마 유럽 쪽과 미국 쪽에서 나름 삼현의 가전이 선방을 하고 있으니 위로라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건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어딘가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덕분에 보고를 하는 중역들은 모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급급했다.
총 회의실의 문 앞에 서 있던 남종현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시발···”
여간해서 욕을 잘 하지 않는 그가 욕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보고하고 있는 2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사실이야?”
“예···”
“난리 났군.”
“후우··· 그 미친 새끼들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정보를 알았는지도 모르겠고요.”
“박중구 그놈이겠지. 하여튼 기업사냥꾼 놈들 더러운 일 처리는 알아주는군.”
“어떻게 할까요?”
와락 인상을 찌푸린 남종현이 말했다.
“미국 놈들이 박중구를 가만뒀겠냐? 우리는 절대 못 찾게 해 놨을거다. 박중구는 포기하고, 일단 전자회사들이랑 통신 회사들을 미친 듯이 사들이고 있다고?”
“예, 그 밖에 몇몇 연예기획사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수작질인지 모르겠군··· 애들 풀어서 우리 전자 쪽 중역들, 연관되어 있는 계열사 중역들 싹 다 저택으로 불러. 네놈들도 전부 집합해.”
입술을 질끈 깨물던 2비서실장이 ‘예!’하고는 빠르고 조심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남종현이 몇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당당하게 보폭을 옮겨 이건의 곁에 다가갔다. 심기가 좋지 않던 이건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남종현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하고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이건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둑놈들 파악되었습니다.”
인상을 쓰고 있던 이건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되려 남종현은 그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마도 자신의 보고가 이어지면 이건의 저 부드러운 표정은 흉신악살 처럼 일그러지리란 생각 때문일 터.
“오늘 회의 여기까지 하지, 연말 보고에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 너무 많아, 다들 네놈들이 받는 월급이 누구 손에서 나오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열과 성을 다해야 할 거야.”
조곤조곤하게 경고하는 이건의 말에 중역들이 ‘예!’하고는 크게 대답했다.
“쯧, 대답은 잘하지. 요즘 실업난으로 북새통이던데 다들 백수 되기 싫음 알아서 잘하라고.”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반드시 성과를 가져오겠습니다.”
“됐어! 노닥거릴 시간 없어! 설 명절에 하루라도 쉬고 싶거든 가서 일들이나 해!”
중역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건이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남종현은 자연스럽게 불을 붙였다.
“자세히 얘기해 봐.”
고급 라이터를 품에 갈무리하는 남종현의 움직임이 일순간 흠칫하고 떨렸다. 그걸 캐치한 이건이 미간을 좁히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후우~ 들으면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닌가 보다 종현아?”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하!”
담배를 몇 모금 하던 이건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읊어봐.”
자신의 주인이 화가 났기 때문일까? 남종현이 ‘까드득’어금니를 한번 씹고는 말했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가 도둑놈들이었습니다.”
쾅!
“내가 잘못 들었어?”
“옳게 들으셨습니다.”
“그 미국 놈들··· 중구구나?”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썩을 놈···”
이건의 싸늘한 눈이 남종현에게 향했다.
남종현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네놈 마음이 너무 물러졌어, 그날 바로 처리했어야지?”
“죄송합니다. 가족들이랑 마지막 하루는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쯧쯧, 네놈이 방심했구나.”
“분명 그날, 중구 그놈은 삶을 포기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계열사 중역이라도 하다못해 부장급 인사라도 되려고 했습니다.”
“쯧쯧,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문 이건이 말했다.
"읊어 봐.”
“예, 스카이 인베스트먼트는 중소기업 전자 회사와 부실해진 통신회사, 규모가 작은 연예기획사 등을 공격적으로 인수하고 있습니다. 곧 그룹화를 이루고 공표할 것으로 보입니다.”
“달러로?”
“예.”
“하! 장바구니 한 번 두둑하게 챙기시겠다? 하여간 미국 놈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구나.”
“근데 그 전자회사들이··· 우리 삼현의 하청기업들입니다.”
이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보금을 늘리고 카이그룹을 삼키고자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고, 그 결과 도산하는 하청업체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중엔 분명 알짜 회사들도 있었을 터, 시기가 잠잠해지고 유보금이 늘어나면 그 하청업체들을 싹 긁어모아 삼현전자의 덩치를 키우려고 하려던 참이었다.
“규모가 얼마나 돼?”
“유통만 갖춘다면 바로, 하나의 전자회사가 탄생한다고 보셔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얘기구나.”
“예.”
“놈들이 내 사재를 털게 해 내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리려 하는구나. 대처는? 대처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우선 저택으로 전자사와 계열사의 중역들을 불렀습니다.”
“오냐, 가자.”
***
이건의 저택 집무실이 빽빽하도록, 중년이 넘어선 사내들이 죄다 엎드려 있었다.
“뭐 하는 놈들이야? 메모리 시장을 좀 선점했다고 자만하고 있는 거야?”
사내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누가 보면 군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얼차려 현장, 이건은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하청업체 관리를 얼마나 병신처럼 했으면 저 새끼들이 새 주인을 품어! 황경식이 얘기해 봐!”
삼현전자의 사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제대로 단도리 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도록 사전에 철저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네놈한테 그 자리가 과분했던 게야?”
“자리에 알맞은 성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네놈 그 약속 지켜.”
“예!”
“네놈들 당분간 삼시 세끼 밥 처먹고 일만 해, 알아 들어?”
““예!””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나가!”
이렇다 할 대책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은 그저 자신의 분노를 토해내었을 뿐이었다.
중역들이 나가고, 자연스럽게 삼현의 비서실, 보안실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남종현이 알루미늄 배트를 이건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전달했다. 집무실 한 켠의 TV에서 계속해서 스카이 인베스트먼트의 로고가 떠오르며 속보가 이어진다.
선명한 구름 모양의 기업 로고.
그 아래 적힌 SKY란 기업명.
부들부들 떨던 이건이 성큼성큼 TV로 가 배트를 휘둘렀다. 삼현의 로고가 선명한 TV가 박살이 나고, 숨을 씩씩 내뱉던 이건이 외쳤다.
“뻗쳐!”
집무실 내부의 사내들이 하나라도 된 것처럼 자리에 엎드려뻗쳤고, 이건의 성난 배트 질은 해가 저물도록 이어졌다.
***
서울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힐튼 호텔의 최상층 라운지에서, 무알콜의 모히또를 마시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래에는 이것보다 더 휘황찬란한 서울이다.
지금도 제법 멋이 있었다.
“대표님.”
강기태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강기태와 찰리 박, 정호석이 내 곁에 서 있었다. 그들도 저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료를 들고 있었다.
최상층 라운지는 경제 상황에 맞게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거의 전세를 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저마다의 하루를 마무리하듯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 직원들이었다.
“네.”
“제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를 비롯한 찰리 박과 정호석의 시선이 강기태에게 닿았다.
“말하세요.”
“전자와 통신, 이제 손을 뻗칠 유통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어째서 연예기획사와 음반업체 등에도 손을 뻗으싶니까? 영화제작사도 앞으로 담아오실 계획이라니, 제가 조금 의아해서 그렇습니다.”
찰리 박과 정호석도 내심 궁금해하는 듯 보였다.
“앞으로 전 세계는 ‘글로벌’기업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될 겁니다.”
“으음··· 글로벌.”
“기술이 뛰어나거나, 유일무이하거나 분명 어떤 메리트를 가지고 있어야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됩니다. 앞으로 많은 자금들을 R&D에 투자하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돈 안되는 푼돈 정도인 딴따라에 투자하십니까?”
아직까지도, 혹은 미래에도.
연예인들을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 ‘문화’의 일부가 될 터.
“해외시장 진출에 ‘문화’역시 좋은 다리가 될 겁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개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개성은 곧 문화가 될 거고요, 예를 들자면 그런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사용하는 휴대폰’, MP3등.”
“흐음···”
“또, 우리는 삼현이라는 거대 기업을 상대할 기반이 많이 부족합니다. 특히 ‘인지도’에서 그렇습니다. 내가 중점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는 사업은 가전, 휴대폰, PDA와 같은 모바일, 반도체입니다.”
강기태는 생각에 잠기고 찰리 박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역시 보스, 생각이 남다르시군요.”
“내가 만들 SKY그룹을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문화’에 가장 가깝고 근접한 ‘연예인’들, ‘음악’, ‘영화’, ‘드라마’와 같은 것에 적극적인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SKY의 로고가 박힌 가전과 휴대폰 등을 익숙하고 친숙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강기태는 이제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쉽게 말해, 마케팅의 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마케팅에 돈을 아끼는 기업은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될 겁니다.”
찰리 박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멋진 말입니다. 마케팅이라··· 오늘도 좋은 것 하나를 배운 것 같습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점.
그 이점을 극대화하는 것들은 많겠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문화 산업과 공격적인 투자라고 생각한다.
“SKY그룹의 출범은 삼현이 카이그룹을 인수하고 난 뒤로하죠, 당분간은 강기태 본부장과 찰리 박 대표가 SKY그룹의 얼굴입니다.”
“예, 대표님.”
“예스, 보스.”
“찰리, 한잔합시다 이리 와요.”
강기태가 찰리를 데리고 사라지고, 정호석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삼현의 저택에 전자계열사 쪽 중역들과 비서실, 보안실 직원들이 들어갔습니다.”
“하하하, 줄 빠따라도 칠 모양이네요.”
정호석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는 이건이라면 반드시 줄빠따를 쳤을 테다.
제 놈의 분노는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속이 후련한 놈이니까.
과연, 줄빠따를 쳤다고 놈의 분노가 해소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삼촌.”
“음, 그래.”
“이제 삼촌도 ‘실장’ 그만하고, 사장 한 번 하시죠.”
정호석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보안회사 하나 설립하려고요, 거기 사장은 삼촌이 하세요.”
“하하, 내가 경영은 영 젬병인데?”
“철웅 삼촌 있잖아요?”
“아, 철웅이··· 글쎄, 회장님이 허락하실까?”
“번듯한 명함 하나 있어야죠, 삼촌도 철웅 삼촌도 이제 우리 양지 생활해야죠.”
“으음··· 사채 시장 관리할 인물도 필요할 텐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차차 시작해야죠, 김장원 사장 좀 불러주실래요?”
“또 무슨 일을 하려고?”
말은 걱정이 서려있지만 어쩐지 얼굴을 즐거워 보이는 정호석.
“IMF에 손까지 내민 대한민국에, 처벌받는 놈이 없네요, 법으로 안 되면 주먹으로 해야죠.”
“으음··· 바로 부르겠습니다.”
“예, 사나운 직원들 몇도 불러주세요.”
“예, 대표님.”
전 삶.
지금은 죽어서 땅속에 묻힌 이재현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 알아?’
‘예,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얘기입니다.’
‘아니 천실장아 그 ‘만인’ 말고 새끼야 딱 만 명만 평등하다는 얘기 새끼야.’
‘······’
‘근데 내가 그 만 명 중에 한 명이거든? 그러니까 천실장아 내가 하녀들을 패든지 죽이든지, 너 따위가 날 컨트롤하려고 하지 말란 얘기야, 알아 들어?’
‘······’
‘꺼져.’
확실히 놈의 말처럼.
어떤 탈옥수의 마지막 외침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대한민국의 더러운 법 앞에 IMF의 경제지배를 받아야 할 현 시국에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건 뭣 같다.
천가 키즈와 함께 땀을 흘리며 공을 차던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이 올라갈 자리는 마련해 주고 싶다고.
정당하게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말이다.
그러니, IMF에 나라를 홀라당 바치는 미친놈들은 처리를 해야지 싶다. 법 앞에 평등한 그 ‘만 명’을 전부 처리할 순 없어도, 적어도 내가 아는 확실한 나쁜 놈 정도는 치워줘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번 IMF와의 협상을 진두지휘하며 우리나라를 통째로 가져다 바친 재정경제원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 제 4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