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42화 (42/458)

< 제 42화. >

호텔 슬리퍼를 신고 어기적 걸어오는 김장원.

조식 뷔페가 예쁘게 차려진 곳에 서서 목을 쭉 빼고 음식들을 구경하다, 접시에 몇 가지를 올려놓고 커피를 홀짝이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아따 잘 주무셨습니까 대표님.”

“예, 어제 한잔하신다더니 과음은 안 하셨나 봐요?”

“대표님이 시킬 일이 있는디 과음하면 쓰겄습니까?”

통통 튀는 사람이지만 확실히 신뢰를 얻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벌써 그의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내가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잘하셨네요.”

“흐흐, 어따 여기 아침 기깔나네요잉.”

“많이 드세요, 힘쓰셔야 되는데.”

“알겄습니다. 아따 정 실장님은 나보다 더 마셨는디 변함이 없으시네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각진 자세로 커피를 마시는 정호석에게 건네는 질문. 정호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골이 나서.”

“흐흐, 프로패셔널 뭐 그런 거지요?”

김장원이 식사를 하고 있기에 일 얘기는 하지 않았다. 실없는 농담들이 오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식사는 계속되었다.

직원이 와 접시를 치우고, 김장원이 오렌지주스를 걸쭉하게 들이켜고는 말했다.

“확실히 재정경제원 쪽에 썩을 넘들이 허벌나게 많아 버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에 모피아라 불리는 세력이 생기고, 그 출발에는 재정경제원이 있다.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모피아란 재정경제부 혹은 재정경제원 출신들이 산하기관을 장악하고 그 행태가 ‘마피아’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세상은 아직 모피아를 잘 모른다. 미래에도 ‘투자’에 관심이 많거나 ‘경제’에 밝은 사람들만 알음알음 아는 단어들이다.

IMF. 이때부터 저놈들이 본격적으로 산하기관들은 물론 기업들과 짝짜꿍해 우리나라 경제를 주무르며 이득을 취해간다.

한 마디로, 자리에 앉았던 놈들이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주며 계속 해 처먹는단 소리다. 기업이랑 배꼽을 맞추고. 그리고 난 그 불공평함을 타파하고 싶은 거다. 그 자리에 내 사람을 앉히고 싶으니까.

“증권사, 종금사랑 붙어먹은 넘들, 기업가랑 붙어먹은 넘들, 지들끼리 작전치는 양아치들이랑 붙어먹는 넘들, 아주 그냥 썩어부렀습니다.”

“IMF협상단의 주축들은 어땠습니까?”

“기업들이랑 붙어먹지 않는 넘이 없든디요, 와따 뒷구멍 조사하는데 열이 받아가지고.”

알고 있었지만 들으니 화가 난다.

“놈들 오늘 저녁에 인천 창고에서 볼 수 있게 준비해주세요.”

“예. 그리하겄습니다.”

“위에서 딱 세 놈만 본보기로 갑시다.”

히죽 웃은 김장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넘들은 적당히 겁만 주어라 그 말씀이시죠?”

“정의찬 검사 일 잘하던데 그 사람한테 익명의 제보로 보내세요.”

“흐흐, 예 적당히 겁주고 보내겄습니다. 자백하라고.”

이런 쪽으론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김장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가 히죽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실장님.”

“예, 대표님.”

“할아버지랑 점심 약속 좀 잡아주실래요?”

***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집은 겨울임에도 제법 사람이 있었다. 천천히 걸어 룸 안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와 철웅이 메밀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어쩐 일로 점심을 다 먹자고 했느냐?”

“하하 할아버지한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흐음, 왜 네 놈이 부탁이란 얘기만 꺼내면 손에 땀이 나나 모르겠어.”

할아버지의 농에 피식 웃으며 따라주신 메밀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특유의 구수함이 찬바람 맞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좋지?”

“예, 확실히 할아버지가 추천하는 식당들은 맛이 좋네요.”

“여기 주인이 이북 출신이야, 지금은 2대째고.”

마침 종업원이 들어오고, 할아버지가 알아서 주문하셨다. 집에서 하는 식사가 아니라 그런지, 철웅과 호석의 메뉴까지 손수 주문하셨다.

“오래 걸릴 얘기더냐?”

“글쎄요, 할아버지의 의중에 따라 다르지 싶습니다.”

“말이 부탁이지 허락을 내놓으란 말이구나.”

도사가 따로 없다.

당장 바깥에서 돗자리를 깔아도 빌딩을 세우지 싶었다.

“예, 맞습니다.”

“오냐 가타부타 결정이야 쉽지, 말해 보거라.”

철웅은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호석은 ‘혹시 그겁니까?’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호석의 눈빛에 철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호석은 알고 자신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SKY시큐리티&PMC를 설립해 볼 요량입니다.”

“시큐리티는, 경호나 경비업체를 말하고, PMC는 용병업체가 아니더냐?”

“예, 맞습니다.”

후루룩, 후루룩 메밀차를 몇 모금 마시던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이놈, 결국 철웅이를 내놓으란 얘기구나?”

정확했다.

“행정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을만한 놈이 없다?”

“예, 철웅 삼촌 정도는 돼야 믿죠, 저와 할아버지의 안전을 책임져 줄 행정 인사 아닙니까?”

“핑계는 좋구나.”

표정을 보니 승낙이었다.

“내 근접 경호는 그래도 사장 놈이 직접 와서 해야지.”

물끄러미 철웅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철웅은 어쩐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백부님···”

“철웅이 네 놈도 고생 많았다. 이제 ‘사장’명함 하나 팔 때도 되었지, 내가 무심했다.”

“아닙니다! 지금도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이놈이 당장 닭똥 같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되도 않는 거짓부렁을 늘어놓는구나.”

“진심입니다.”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곁에 앉은 철웅의 등을 쓰다듬는다.

“쯧, 내가 먼저 줘야 할 자리를··· 손주 놈이 챙겨주는구나, 안 그래도 철웅이 너도 그렇고, 우리 호석이도 그렇고 챙겨주지 못해서 마음을 쓰던 차에 잘 되었다. 네 놈들이 어디 그 회사 잘 맡아서 해 봐.”

호쾌한 허락.

그만큼 철웅과 호석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할아버지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철웅이가 행정이고, 몸 쓰는 것은 호석이가 담당이냐?”

“예, 미국의 어느 기업에 CEO와 CFO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갈 생각입니다.”

“명함을 번드르르 하게 파주겠단 얘기구나.”

철웅과 호석이 피식 웃었다.

“당분간 철웅이 이놈이 바쁘겠구나, 그래도 평소보다 소홀하면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 테니 각오해. 호석이 네 놈도 마찬가지고.”

““예, 백부님!””

뿌듯하게 한 번 웃은 할아버지.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죠 할아버지.”

미간을 꿈틀거리며 날 바라보신다.

“첫 번째 파트너 업체로 역시, 대한종합금융 그룹이 좋을 것 같은데요?”

“날강도 같은 놈.”

“하하하, DC는 제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할애비 돈을 이런 식으로 뜯어가는구나.”

“왜 이러세요? 적을 그렇게 많이 만드셔놓고.”

피식 웃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회삿밥 먹는 놈들 다 제 몸 정도는 지킬 실력이 있는 놈들이야.”

“그분들 밑에 있던 사람들 다 우리 직원 될 겁니다.”

“아주 대 놓고 다 털어가겠다는 얘기구나.”

이번에도 허락의 표시였다.

할아버지 품에서 이렇다 할 명함 없이 살던 사람들이다. 주먹패는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취급을 받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터.

그런 사람들에게 ‘직장’이 생기는 일이니 당연히 ‘좋은 일’이고, 그 직장을 내가 운영할 곳이니 더욱 좋으신 거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롯이 물려받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할아버지로선 내가 귀엽게 보일 터.

“철웅 삼촌, 호석 삼촌은 오늘부터 틈틈이 SKY 가드라는 사명 아래, 시큐리티와 PMC 부처를 만드시고 인사 배치 만들어보세요, 인원선발부터 모든 권한은 두 분께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우진아.”

“정말 열심히 할 게 우진아.”

훈내가 지나가고, 할아버지가 호통쳤다.

“아직 허락 안 했어 이놈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성을 내시는 할아버지.

호석에게 눈짓하자, 그가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쓰윽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우리 직원들이 열심히 조사해놓은 금융사 리스트입니다.”

“이놈이 애초부터 무기를 장전하고 왔구나.”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할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죠, 이게 오늘 메인이었습니다.”

“하여간 저 혓바닥은 쯧.”

천천히 서류를 살피는 할아버지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호오···”

“이제 대한종합금융 그룹도 당당한 1금융에 발을 디디셔야죠?”

“그래, 빠르게 처리하마.”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표정.

“그럼 허락하신 거죠?”

“날강도 같은 놈.”

때마침 종업원이 냉면을 가져왔다.

“어이쿠 밥이 왔네.”

내 과장된 몸짓에 할아버지가 결국 피식하고 웃어버리셨다. 완벽한 허락이 떨어졌음이다.

훈내 가득한 식사가 끝나고,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식혜가 후식으로 들어왔다.

“이열치열도 아니고, 이냉치냉이네요.”

내 농에 할아버지가 피식 웃고는 수저로 식혜의 밥알을 떠드셨다.

“김장원이를 불러왔다고?”

“아, 예.”

“피를 과하게 묻히는 것 아니더냐?”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죠.”

할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는 아니더냐? 외환위기와 IMF로 이득을 본 것은 우리도 포함되어 있잖으냐?”

“맞습니다. 막지는 못했지만 더 늦기 전에 알리긴 했죠.”

훈내는 사라지고, 북풍이 몰아닥쳤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식혜의 얼음은 녹을 줄 몰랐다.

식혜의 얼음을 숟가락으로 퍼 올려 와작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위선도 맞고 죄책감도 맞습니다. 저는 그 고리를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끊어 내고 싶습니다.”

“썩은 물이 깨끗한 물도 썩힌다?”

“예, 어느 정도 정화된 물이 있어야 새로운 물이 들어오면 점점 더 깨끗해질 것 아닙니까?”

“쯧, 앞으로 돈 벌기는 글러 먹었다는 얘기구나.”

“에이, 제가 아는 할아버지라면 아니실 것 같은데요?”

“오냐, 네 놈이 만들 세상이니 구경이나 하마.”

“감사합니다.”

식혜를 단숨에 비워낸 할아버지가 일어서며 말했다.

“피의 논리에 너무 빠지지 말거라, 만사형통은 아닐 게다. 더러운 것을 너무 혼자 묻히려 하지말거라 양지에 올라서기 힘드니.”

힘들면 기대라는 말씀이셨다.

더러운 게 치우고 싶다면 본인에게 말하라는 말씀이셨다. 더러운 게 많이 묻어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오는데 오래 걸렸던 할아버지, 그러니 조금 더 묻는다고 다를 게 없다는 그런 말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주 놈이 할아버지한테 똥물을 튀겨서 되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지금처럼, 친 서민적인 분이 되어주세요, 손자는 그거면 족합니다.”

“쯧쯧, 네놈 죄책감을 이 할애비가 덜어라?”

“하하하, 아닌데요? 할아버지 날아가시라고 하는 건데요?”

“저놈의 혓부닥은. 집에서 보자.”

“네!”

***

SKY 그룹의 로고가 선명한 물류창고.

드르르륵.

셔터가 올라가고 정호석을 따라 걸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넥타이를 풀어 헤친 김장원이 날 반겼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밧줄로 온몸이 묶여 있는 세 명의 사내가 보였다.

“이놈들인가요?”

놈들의 면전을 천천히 살폈다.

그 중, 눈에 띄는 놈이 보였다.

분명 전 삶에서 삼현 증권의 투자 고문으로 앉아 있던 놈이었다. 정권 교체의 시기, 경제 수석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놈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읍!읍!읍!”

촤악.

놈의 입에서 청테이프를 땠다.

“네들 뭐 하는 새끼들이야? 어?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로고를 가리켰다.

“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 미국 놈들이 왜?”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

“왜 IMF로 갔지? 올 3월부터 이미 경제 위기를 예상하고 있었잖아?”

“타, 타파할 길이 마땅치 않았어!”

떨리는 동공, 적색의 연기.

누가 보아도 거짓을 얘기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연구 자체를 해보지 않은 것 아니고? 해결책 자체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고?”

“시, 시기의 문제라고! 언제든 불어닥칠 바람이었어!”

“글쎄, 네 놈들이 ‘개혁’이라는 허명으로 국민들을 나락으로 빠트린 것 같은데.”

“우리 덕분에 스카이인베스트먼트도 돈을 버는 거잖아? 흑자 도산한 회사들을 주워 담고 있는 네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아아, 같이 숯검댕이를 뭍이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실은 말이야, 소설보다 괴상해.”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빤히 바라보는 전 경제수석.

“있는 놈은 계속 있고, 없는 놈은 계속 없는 세상을 네 놈들이 만들었어. 이 빌어먹을 IMF를 시작으로 말이야 너 같은 새끼가 한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 한 집의 가장을, 소년 소녀 가장을 그 잘난 혓바닥과 네 놈들의 욕심으로 한강 위로 내몰고 있단 얘기야.”

손을 내밀자 정호석이 내 손위에 예리한 단검을 올려주었다.

“나는 다르냐고? 아니, 나도 똑같아. 똑같으면서 다르지, 네 놈들은 진짜 윗대가리들한테 꼬리를 흔들어 밥그릇을 챙긴다면, 난 철퇴를 휘둘러 내껄 챙길 거거든.”

시선은 칼에 고정하고, 애벌레가 기어가듯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놈.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네 놈들의 자리에 내 사람이 앉아 있으면 한다, 그런 얘기야. 누구한텐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 제 42화. > 끝

3